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설정덕후 주의
한마디: 너무 오랜만에 써서 문체가 바뀐 느낌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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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두려움, 공포, 체념, 자괴감.
이 모든 것들이 커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들이었다. 스팍은 함장석에 앉은 채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스팍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전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허공을 응시하듯 어딘가 흐려져 있었다.
스팍은 본드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커크의 쿼터에서 쫓겨난 즉시 스팍이 행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니 정신적 연결인 본드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빈 그릇이라도 된 것처럼 커크의 감정을 마음 안에 가득 받아들였다. 그가 느끼는 것을, 그가 경험하는 것을 자신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게 커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자 칸을 감시하는 방법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벌칸이란 사실에 이렇게 감사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스팍은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현재 커크는 불안정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
두 번째. 아직까지는 칸이 커크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
세 번째. 커크에게 계획이-.
"부함장님. 스타플릿 본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우후라의 보고에 스팍의 생각이 끊어진 실처럼 뚝 멎었다. 스팍은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우후라를 바라보았다. 비록 비논리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언정, 임무에까지 소홀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 내용은?"
"행성 연방에 가입을 원하는 아레비크 종족과 협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레비크 대표의 위치는 베타 우르세 섹터. 정확한 좌표는 수신중입니다."
"술루 중위. 현재 위치에서 베타 우르세 섹터까지 걸리는 시간은?"
스팍의 질문에 술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광속으로 약 4시간 걸립니다."
"진로를 그쪽으로 돌리도록."
"아예, 부함장님."
때맞춰 모든 메시지를 수신한 우후라가 좌표를 읊어주었고, 술루는 스팍의 명령에 따라 엔터프라이즈의 기수를 틀었다. 함장이 위기에 빠진 이 마당에 임무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스타플릿에서 엔터프라이즈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스팍은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돈했다.
아레비크라면 행성 연방 가입을 꾸준히 거절했던 카다시안의 친척뻘 되는 종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연방 가입을, 그것도 먼저 요청하고 나섰다? 스팍은 차근차근 그들의 의도를 추리했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행성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현재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칸을 커크에게서 떼어놓는 일-.
스팍이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추리 과정 중에 커크와 칸에 대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즉, 비논리적인 일이었다.
스팍은 팔걸이를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다간 두 가지 모두 그르칠 게 분명했다. 현실적으로 동시에 두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이상, 한 가지를 먼저 끝내고 다른 한 가지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먼저 해결할 것인가.
스팍은 커크의 일과 스타플릿의 명령을 저울질했다. 자신을 쌀쌀맞게 내보내던 커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자신을 대신해 그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장교가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더 효율적일까. 그 생각에 도달하자 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스팍은 마음 대신 머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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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댱님께서 함교에……. 에에??"
체코프의 가감없는 놀람에 함교의 전원이 터보 리프트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모두가 체코프와 같은 심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커크와 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커크가 입은 지휘부의 노란 셔츠와 칸이 입은 검은색 공용 셔츠는 지나치게 서로를 각인시켰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보색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철천지 원수와 같은 관계를 가진 두 사람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함께 있다는 것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엔터프라이즈의 크루 일부는 이것이 벤젠스 호와 맞설 때의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도 했다.
차라리 과거였다면.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았을텐데.
스팍과 커크는 속으로 동시에 읊조렸다. 누구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스팍은 그것이 과도하게 확장한 본드의 영향인지 본인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후라. 전 채널을 열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우후라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터치 몇 번에 순식간에 엔터프라이즈 전체의 채널이 열렸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던 크루들이 잠깐 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중대 발표가 있다."
커크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팍이 함장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스팍은 그것을 막고자 했다.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임무를 앞둔 상황에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함장님. 규정상 장교들과의 상의 없이는-."
커크가 스팍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스타플릿 규약 3번에 의거하여 함장의 우선명령권을 발동한다. 지금 이 시간부로 칸 누니엔 싱은 엔터프라이즈의 비정규 크루로 등록되며, 임시로 과학부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커크가 말을 흐리는 사이 그 공백을 메우듯 카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캐롤 마커스였다. 벌떡 일어난 캐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서 자신의 PADD를 주워들었다. 그녀는 PADD를 두 팔로 껴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캐롤의 눈동자는 명백한 혼란과 혐오가 뒤섞인 채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장님. 부서-, 부서 이동을 요청합니다."
"…승인한다. 캐롤 마커스 중위는 기술부로 부서를 이전한다. 엔지니어실로 이동해 스콧 소령에게 새 임무를 배정받도록."
캐롤은 함장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한시도 있고싶지않은 듯 빠른 속도였다. 캐롤이 터보 리프트를 향해 다가서자, 커크는 칸 앞을 가리고 서서 그녀와 칸이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캐롤은 이에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빠르게 리프트 안에 들어섰다.
리프트의 문이 닫히기 직전, 커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원망의 빛을 읽었다. 캐롤과 커크는 함께 벤젠스 호에서 칸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함께 칸이 마커스 제독을 죽이는 것을 봐야만 했다. 마커스 제독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캐롤 마커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칸은 캐롤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캐롤이 큰 눈 가득히 커크를 비난했다. 문이 닫히자 커크는 그것을 애써 잊으려는 듯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그래도 명령은 끝마쳐야 했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네."
커크의 말이 함교의 허공을 황망하게 떠돌았다. 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칸마저도.
"칸 누니엔 싱은 함교로 배치된다. 그의 임무는 과학 부서의 전반적인 임무와 동일하며,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기각한다. 발표를 종료한다."
커크 아웃,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후라가 채널을 닫았고 함교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자리했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젠장(Dammit). 저게 뭔 빌어먹을 개소리야!"
메디컬 베이에서 달려나온 맥코이와,
"울 함장님 병이 나았다더니 쌩구라 아녀? 저런 미친 짓을 다 허고."
엔지니어실의 스콧뿐이었다.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현처럼 함교에 긴장이 가득 찼다.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그 현 위에 손가락을 얹은 사람은, 모든 책임과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함장 제임스 커크였다.
"배정된 자리로 가. 칸."
커크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칸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커크는 스팍과 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 교환을 감지했다. 스팍이 이동하지 않는 한 칸은 움직이지 않을 태세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네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스팍."
커크의 말에 스팍은 생애 처음으로 항명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끊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스팍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임무가 우선이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였다. 칸은 자신이 흔들릴 것을 계산하고 이런 구도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팍은 주먹을 세게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커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칸 또한 순순히 몸을 돌려 캐롤의 자리로 향했다. 칸이 의자에 앉자 양 옆에 앉은 크루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사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상황이 정돈되고 나서야 커크는 함장석에 앉을 수 있었다. 거친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온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함장의 직책은 그가 피곤해질 겨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커크는 부러 눈을 세게 짓눌러 비비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항로가 어제와 다른 것 같은데. 술루?"
"…스타플릿 본부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베타 우르세 섹터로 향하는 중입니다. 함장님."
잠깐 호흡을 놓친 술루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커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명령 내용은?"
함교가 조용해졌다. 보통 때라면 커크의 명령에 즉시 답했을 스팍이 입을 열지 않자, 마지못해 술루가 말을 이었다.
"…아레비크 종족과의 연방 가입 협상입니다."
"협상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여전히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다. 술루는 이미 포기한 모양인지 커크에게 망설임없이 답했다.
"아레비크 대표가 있는 중립 행성까지 도착하는데 남은 시간은 28분이며, 협상 개시 시각까지는 33분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았네. 전략은?"
술루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명백히 스팍을 향하여 한 말이었다. 스팍은 언제나 커크에게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협상 측면에서는 전략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곤 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스팍 마누라 뺏길 기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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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님?"
스팍은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쿼터 안에 커크와 칸이 서 있었다. 칸이 커크를 제압하거나 위협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란 것에 일단 안심했지만, 스팍은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급속히 불안을 느꼈다. 즉시 허리춤에서 페이저를 꺼내든 스팍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어째서 칸이 여기 있는 것인지, 커크는 어째서 태연하게 칸의 앞에 서 있는 것인지, 자신의 모든 추리력을 동원해 봐도 논리가 연결되지 않았다.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함장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아냐. 스팍."
커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팍은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커크 때문에 칸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물러서야 할 건 너야."
스팍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커크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은 페이저를 집어들었고, 서서히 올라와서, 결국은 자신을 겨누었다. 스팍은 암담한 심정으로 질문했다.
"함장님. 왜 제게 페이저를 겨누시는 겁니까?"
"물러서라고 했어."
"함장님!"
스팍이 미간을 찌푸렸다. 커크는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칸이 어떤 짓을 했기에 커크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스팍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칸, 이건 전부 칸 때문이었다. 칸에 대한 분노가 거세졌다. 스팍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예상이나 한 듯 커크가 그를 마주보고 움직였다. 마치 칸을 보호하는 듯했다.
"비켜주십시오."
"너나 페이저 내려놔. 명령이야."
스팍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현재를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스팍은 아주 천천히 몸을 굽혔다.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적용 가능한 모든 규정과 예외 조항과 역대 사례들을 훑었다. 그 순간 한 가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페이저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스팍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그는 빠르게 읊었다.
"닥터 맥코이로부터 당신이 PTSD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현재의 함장님은 환각, 환청 및 현실검증력 저하로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 여겨지며, 스타플릿 규정에 의해 제 임의로 현 상황을 해결하겠습니다."
스팍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칸이 커크의 곁으로 다가왔고, 커크가 급히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만둬! 스팍, 난 본즈가 처방해준 약을 먹었고, 지금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도 알아. 그리고 내 우선임명권에 의해 칸은 오늘부터 엔터프라이즈 크루야. 그러니까 페이저는 당장 치워."
"뭐라고요(Pardon, sir)?"
스팍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스팍과 칸 모두 커크를 바라보았다. 커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칸은 5년 임무 동안 그가 필요한 임무에 참여할 거야. 내 치료에 협력했고 그 기간 동안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으니까. 5년 임무가 끝나고 지구로 돌아가면, 다시 수감되어 형을 집행할 거고. 이해했어?"
"어디서, 언제 그런 논의가 이루어진 겁니까?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거나 생존에 직결되는 위기가 아닌 이상, 그것은 장교들의 동의를 받아 결정할 사안입니다. 또한 저 자가 탈옥한 거라면 응당 그에 대한 처분이 먼저-."
칸이 비웃듯이 스팍의 말을 끊었다.
"그럴 필요 없어."
스팍은 즉시 시야에 들어온 칸을 노려보았다. 커크의 바로 곁에 칸이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칸은 커크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있기까지 했다. 스팍은 당장 페이저를 그에게 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커크를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탈옥…하지 않았어."
커크의 짧은 대답에 스팍은 입술을 깨물었다. 탈옥하지 않았다? 불충분한 설명이었다. 탈옥하지 않았으니 처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터였다. 하지만 탈옥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손의 마디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자제심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팍은 자신의 추론을 통해 나온 결론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함장님께서 그를 구금실에서 꺼내주셨습니까?"
"…그래."
"함장님께서 그를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
"……. 그래."
스팍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마지막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함장님. 그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당신을 협박한 거라고… 말해주십시오."
제발, 스팍은 속으로 덧붙였다. 커크가 긍정한다면 그 즉시 칸을 제압할 모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스팍은 칸을 조준한 채로 간절히 빌었다.
"아니야."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스팍은 한없는 절망을 느끼며 커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드를 통해 전해져오는 커크의 심정과 생각을 알아내려 했다. 함부로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것을 커크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팍이 천천히 그의 생각을 읽었다.
-내가 전부 책임지겠어.
스팍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커크는 이미 모든 것을 결심한 듯 단호했다. 스팍은 그런 커크의 태도에서 다소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커크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인가? 처음 구금실에서도, 스팍은 구금실을 열어준다면 칸을 제압하고 커크를 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커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은 칸에게 유린당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커크는 스팍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스팍은 새삼 씁쓸한 감정을 경험했다.
스팍이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어쨌든 커크가 칸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게 그의 높은 자존심 때문이든 옆에 있는 칸에 대한 공포 때문이든 상관 없었다. 본인이 커크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스팍은 칸을 제압하고 그를 다시 냉동 튜브에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와 한 번 싸운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커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칸을 제압하면 된다. 간명한 결론에 이른 스팍이 즉시 페이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칸을 향해 쏘았다.
"안 돼…!"
미약하게 외치며 칸의 앞을 막아서는 커크를 보았을 때, 스팍은 무정형의 변수인 커크를 간과한 점을 그 즉시 후회했다.
"함장님!!"
페이저의 광선을 맞은 커크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뒤에 있던 칸이 그를 부축했다. 스팍은 이를 악물고 커크에게 달려갔다. 커크는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이런 걸로 안 죽어. 오버하지 마."
"함장님, 죄송합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무사하십니까?"
"괜찮다니까. 비켜."
커크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스팍은 그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들었다.
-난 죽지 않지만, 스팍은 죽을 수도 있어. 내가 그를 보호해야 해.
의외의 생각에 스팍이 멍하니 커크를 바라보았다. 그 틈에 칸이 스팍의 손을 쳐냈다.
"함장의 안위를 지킨다는 부관이 함장을 공격하다니. 놀랍군." 칸이 비꼬았다.
"지금 함장님의 안위를 위협하는 건 너라는 사실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 함장님을 놔."
스팍도 만만치 않게 맞섰다. 스팍의 눈동자는 맹수처럼 위험한 빛을 띄었고, 칸의 눈동자는 마치 그를 깔보는 것처럼 선명한 조소의 빛을 띄었다. 칸이 스팍을 도발하듯 커크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직접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지. 제임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커크는 미약하게 떨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스팍. 나가."
"함장님!" 스팍이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난 휴식이 필요해. 다음 시프트까지 함장석을 맡아. 그때 칸에 대한 제반 사항을 발표하겠어."
커크가 확고하게 명령을 내렸다. 스팍은 커크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어난 커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칸만이 흥미롭다는 듯 스팍과 눈을 마주쳤다. 스팍은 속에서 파도처럼 솟구치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중범죄자의 탈옥, 함장에 대한 협박은 즉결처분권을 발동할 충분한 이유가 돼. 주지하고 있길 바라지."
자신을 위협하는 스팍을 향해, 칸이 커크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답했다. 칸은 커크의 허리를 반쯤 안은 채 입을 열었다.
"자신의 함장을 죽일 뻔한 부관이 할 말로는 안 들리는군. 내 피가 아니었으면 그는 벌써 죽었어. 예전에 죽었겠지."
"내 발언과 내 행동은 상관성이 적어. 또한 네 피가 그를 살렸다고 해서 네가 저지른 범죄들이 상쇄되는 건 아니지. 그리고 네가 현재 취하고 있는, 함장님과의 불필요한 접촉은-."
"그만!"
커크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칸과 스팍 모두 입을 다물었다. 커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쿼터를 울렸다.
"스팍. 제발 나가. 쉬고 싶어."
이것 보라는 양, 칸이 스팍을 노려보았다. 커크는 아예 몸을 돌려 칸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스팍은 가슴 깊이 비참함을 느꼈고, 계속 저런 커크를 보느니 쿼터를 나가는 게 말 그대로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커크와 칸을 함께 놔두고 싶지 않았다. 커크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칸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자신들을 어떤 방식으로 괴롭힐지 감도 오지 않았다. 스팍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빠른 복귀를 기다리겠습니다. 함장님."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스팍이 쿼터를 나서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칸과 커크가 입을 맞추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스팍은 자기도 모르게 쥐고 있던 페이저를 우그러뜨리고 말았다.
-
"칸, 그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칸의 거친 키스에 커크는 그를 말리려 했지만, 칸은 힘있게 커크를 몰아붙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커크는 결국 침대에 걸려 쓰러졌다. 칸이 그대로 그의 위에 엎드렸다.
"널 꿈에서 현실로 꺼냈어. 그걸로 충분하잖아……."
"충분하지."
커크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칸이 즐거이 대답했다. 칸은 손을 들어 커크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그 부드러운 손길을 외면하려 애썼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칸의 시선을 피하면,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싶었다. 하얗게 질리던 스팍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고, 놀라서 크게 뜬 스팍의 눈과 자신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스팍의 선명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실은 다시 그를 부르고 싶었다. 스팍이 이 절망에서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스팍의 이름을 들었을 때 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회상하며 커크는 긴장했다. 칸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의 말로 판단컨대 칸은 엔터프라이즈를 '폭발'시킬 어떤 장치를 해둔 것이 분명했다. 설령 장치가 없더라도, 벤젠스 호를 만든 그의 실력이라면 엔터프라이즈를 해킹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그 위협을 제거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칸이 엔터프라이즈와 스팍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일전에 원자로 코어에 직접 들어갔던 것처럼,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함장의 역할이었다.
"제임스. 다시 말하지만 넌 내 거야. 네 몸도, 네 혈관을 흐르는 피도, 네 생명도."
"…그래."
커크는 체념했다. 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스쳐, 턱을 지나고 목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온전하게 느끼면서 커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흡을 진정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자명했다: 바로 자신이었다. 그것만으로 칸을 잡아둘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장사이리라. 커크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 피가 너를 고쳤으니, 우린 이를테면 혈연 관계지. 넌 내 가족이고 난 네 가족이야."
칸은 커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커크에게서 떨어졌다. 의외의 말과 행동에 커크는 눈을 번쩍 떴다. 칸은 이미 몸을 돌려 커크의 책상으로 향한 뒤였다.
"피곤하다면 편히 쉬도록."
칸은 커크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골라 꺼내들었다. 커크는 그런 칸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를 믿을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믿고 싶기도 했다. 칸이 정말 자신을 가족이라 여기는 걸까? 72명의 다른 증강인간들- 그의 크루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이것을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커크는 미약하게 희망을 느꼈다. 칸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한, 5년 임무를 진행중인 엔터프라이즈에 위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이에 칸이 손을 써둔 것을 제거하고 칸을 제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커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게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해결 방안이었다. 역으로 자신이 칸을 이용하리라.
커크는 조금이나마 안심하며 눈을 감고 누웠다. 칸이 그의 쿼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쓰였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커크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니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내 힘으로 해결하겠어, 커크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1편부터 강렬한 게 미드의 특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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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프라이즈는 대형 계류장에 정박해 있었다. 계류장 자체에서는 연료봉을 구할 수 없어 베르포 항성계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연료봉 운반 셔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스팍은 함장석에 앉아 자잘한 지시를 내렸고, 커크는 여전히 자신의 쿼터에서 숙면을 취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커크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임스."
칸의 손가락이 커크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커크는 자꾸 몸을 뒤척거릴 뿐,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스팍과 격렬하기 그지없는 밤을 보낸 덕분이었다. 칸이 거듭 그의 이름을 부르자 커크가 결국 비몽사몽한 채로 칸에게 대답했다.
"응……?"
"피곤한가?"
"우웅……. 피곤해……."
칸이 커크의 옆에 앉은 채로 몸을 굽혔다. 서서히 칸의 얼굴이 커크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칸은 그가 귀엽다는 듯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고 커크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칸의 혀가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와 잇몸을 쓸어대는 것, 자신의 혀를 빨아들이듯 잡아당기는 것도 허용했다. 생각보다 짙고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자 커크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서, 부지중에 칸의 팔을 붙들었다. 커크가 간신히 입을 뗐다.
"진짜, 진짜 피곤해. 스팍."
그 순간 칸이 얼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커크가 짐짓 놀라 칸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부볐지만, 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커크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스팍…?"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스팍이 아니라 칸이었다! 커크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고,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자신의 온몸에서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커크는 두 눈을 의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칸……?"
그의 목소리가 들린 즉시 칸이 커크 위로 거칠게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칸은 유령처럼 하얀 얼굴로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불쾌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뭐라고?"
"미, 미안해."
커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딱히 미안하진 않았다. 미안할 것도 없었다. 왜 미안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스팍을 부른 것이 칸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커크도 분명히 알았다.
"나는 스팍인 줄 알고……."
순간 뺨에 불이 일었다. 커크는 얼얼한 볼을 감싸쥘 생각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칸을 돌아보았다. 칸이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손을 뻗고 있었다. 커크는 되살아난 악몽에 몸을 움츠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커크가 예상한 것처럼 다시 그가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칸은 커크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커크는 그 통에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제임스 커크."
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도저히 이게 꿈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커크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저 불안하게 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았고, 손아귀를 벌린 심연 같았다.
"내가 네 병을 고쳤지. 내가 널 우월하게 만들었어. 넌 내 피조물이고 난 네 조물주야. 너는-."
칸이 선고를 내리듯 커크와 자신에 대한 정의를 늘어놓았다. 사실을 나열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칸의 다른 손이 커크의 부어오른 뺨을 쓸었다. 부드럽게, 다시 부드럽게.
"-내 거야(Mine)."
그 한 단어에서 커크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관계 정립에 대한 미약한 기쁨과 다가올 일에 대한 가슴 저릿한 공포, 그리고 나약한 자신에 대한 절망까지.
볼을 매만지던 손이 어느새 입술에 도달했다. 칸이 강제로 그의 입을 벌렸다. 커크가 작게 숨을 뱉었다.
"흐윽."
칸은 아랑곳않고 거칠게 커크의 입 안을 더듬었다. 차마 그의 손가락을 깨물 수 없었던 커크는 입을 벌린 채 칸의 시선을 피했다. 침대 시트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다시 다른 자식의 이름이 나오도록 해봐. 어서."
커크는 절망했다.
"…자, 잘못했어……."
"해봐!"
칸이 윽박질렀다. 커크는 칸의 팔에 매달렸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커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칸이 그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칸이 정강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커크는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눈앞에 칸의 발이 보였다. 커크는 호흡을 진정하려 애썼다.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절망감에 저항해야만 했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도대체 그가 언제 어떻게 구금실에서 탈출한 것인지, 그가 왜 자신에게 집착과도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인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칸을 수틀리게 한다면 자신을 물론이고 엔터프라이즈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커크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날 고문했지." 칸이 운을 뗐다.
커크는 처음 듣는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매일. 한 시간씩. 마커스보다 지독했어. 적어도 그는 내 눈을 태우지는 않았거든."
"난 전혀 몰랐어…!"
칸이 커크의 얼굴을 쥐었다. 혼란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르고 푸르렀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듯, 순결하고 투명했다. 칸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이 말했다.
"상관없어. 다시 그의 이름을 말해. 그자부터 죽여버릴 테니까."
"안 돼!"
깜짝 놀란 커크가 칸의 다리를 붙들었다. 스팍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떠안고 가야만 했다. 애초에 칸을 이 엔터프라이즈에 태운 것조차 자신 때문이지 않던가?
"칸. 전부 내 책임이야. 내 잘못이야. 차라리 날 죽여. 대신 아무도 죽이지 말아줘. 부탁이야-."
"'부탁'?"
순식간에 커크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커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칸은 커크의 얼굴을 바닥에 짓누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뭐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부탁이라.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냐."
"우윽, 칸……."
"선택은 내가 해."
"제발……."
겁에 질린 커크가 몇 번이고 빌었지만,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커크의 마음속이 때늦은 절망과 후회로 가득 찼다. 이젠 정말로 되돌릴 수 없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커크는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애원했다. 답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칸은 커크의 등을 짓누르며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이미 늦었어. 내가 엔터프라이즈를 폭파시키기 전에 날 막을 방법을 찾아봐."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칸, 제발 그러지 마……."
"아아. 제임스. 생각해."
칸이 커크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커크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넌 나만큼 똑똑하잖아(You are as clever as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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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은 연료봉을 얻기 위해 상대 셔틀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행성 연방의 군부 스타플릿 소속임을 밝히고 해당 절차에 따라 연료봉을 보급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단지 커크가 늦게까지 브릿지에 출석하지 않는 것만이 계속 신경쓰였다. 피로감이 상당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가 이렇게 늦을 이유는 아니었다. 스팍은 커크에게 찾아가는 대신 다시 PADD에 감시 영상을 불러왔다. 커크를 감시할 수는 없으니 칸을 감시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음."
여전히,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영상대로라면 칸은 분명 구금실에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팍의 눈이 매 초 간격으로 영상 내의 칸을 훑었다.
스팍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기억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좋은 편이었고 덕분에 한 번 본 것은 웬만하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칸은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일어났고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들어올려진 손의 각도까지 동일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스팍은 그 순간 가능한 모든 논리를 동원했다. 빠르게 결론이 나왔다. 이 영상은 가짜였다! 더 정확히는, 녹화된 영상이었다. 스팍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브릿지의 모든 크루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술루. 의자."
스팍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짧게 지시한 후 터보 리프트로 날듯이 달려갔다. 당장 구금실에 가서 확인해야 했다. 어째서 아무도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인지, 칸이 도대체 언제 이 링크를 바꿔치기한 것인지, 스팍은 구금실로 달려가는 중에도 추론하고 또 추론했다.
"……."
스팍이 지긋이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칸이 있던 구금실은 텅 비어 있었고, 그를 감시하던 카메라는 해킹된 뒤였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갔는지는 몰라도 브리그 베이를 지키던 보안 요원이 전혀 몰랐을 정도니, 정식 통로가 아닌 다른 경로를 선택한 것일 터였다.
스팍은 즉시 커크의 쿼터로 향했다. 칸이라는 위험한 존재가 엔터프라이즈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테러리스트가, 커크를 한 번- 아니 여러 번 위험하게 만들었던 자가, 도대체 언제부터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게 이 닫힌 작은 세계 안에 숨어들었다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도 스팍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겨우 화해한 커크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물론 칸의 탈옥이라는 1급 중대 상황이니 그도 이해해줄 테지만. 스팍은 커크의 쿼터로 달려가는 길에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맥코이와 마주쳤다.
"스팍?"
"아직 함장님을 방문하지 않은 건가?"
"네가 푹 쉬어야 할 것 같다며? 지금쯤은 일어났을 것 같아서 가보는 참이지."
스팍의 마음이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아직 맥코이마저 커크를 확인하지 않았다? 커크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스팍은 맥코이에게 바로 커크에게 가라고 하지 않은 것을 짧게나마 후회했다.
"칸이 탈옥했어."
"뭐??" 맥코이가 반쯤 비명을 질렀다.
"그가 우주선을 빠져나갔다는 증거는 없으니 칸은 아직 이 안에 있겠지. 경계를 발령했다간 그를 자극하거나 크루의 불안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어서, 그에 대한 판단을 함장님께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스팍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맥코이는 불안한 얼굴로 스팍에게 물었다.
"대체 언제?"
"확실하지 않아."
이를 갈듯 스팍이 대답했다.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화가 났다. 맥코이는 발길을 돌렸다.
"메디컬 베이에서 대기할게. 어디 숨어있는지도 모르니까, 일단 이쪽만이라도 비상 경계 태세로 돌려서 샅샅이 검사하고."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나았다. 맥코이가 바쁘게 움직였다. 스팍 또한 커크의 쿼터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칸은 지금까지 맞이했던 적들 중 가장 위험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없이 높은 지능을 가졌다. 이쪽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즉 비상 경계 발령을 통해 자신의 탈옥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인질을 취하거나 위협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스팍은 절대로 견딜 수 없었다. 스팍이 서둘러 커크의 쿼터 문을 열었다.
"함장님?"
문이 열린 후, 스팍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칸이 있었다.
겁에 질린 커크가 몇 번이고 빌었지만,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커크의 마음속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젠 정말로 되돌릴 수 없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커크는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애원했다. 답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칸은 커크의 등을 짓누르며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이미 늦었어. 내가 엔터프라이즈를 폭파시키기 전에 날 막을 방법을 찾아.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칸, 제발. 그러지 마…….
아아. 제임스. 생각해.
칸이 커크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커크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ㅡ넌 나만큼 똑똑하잖아.
(You are as clever as I am.)
함장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아냐. 스팍.
커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팍은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커크 때문에 칸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물러서야 할 건 너야.
스팍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함장님. 왜 제게 페이저를 겨누시는 겁니까?
(Captain. Why are you taking aim at me with a phaser?)
스팍. 너 또 날 감시했어? 본드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때까지도 스팍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커크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고. 자신이 그를 이해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이해하리라고. 몇 번이고 부딪치고 싸웠지만, 결국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벌칸으로서 논리와 이성을 신봉하는 만큼, 스팍은 제임스 T. 커크를 믿었다.
본드 끊어.
아니, 믿었었다. 그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스팍이 끝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커크의 얼굴은 여전히 섬뜩하리만치 희푸르고 평온했다. 그 무신경한 모습에 더 분노라는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커크가 이럴 리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커크가 아니었다. 스팍은 거칠게 항변했다.
지금 그 의미를 인지하고 발화하는 중입니까? 본드는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짐, 저는 벌칸에 대한 당신의 이해력을 의심할 수밖에-.
맥코이가 부러 세게 트라이코더를 그의 목에 들이밀었다. 커크가 아야야, 하고 엄살을 피웠다.
"의사로서의 세심함이라고 해줄래? 그리고 너 예수랑 하나도 안 닮았거든."
"부활했잖아!"
"그는 3일 만에 눈을 뜨셨고 네놈은 15일이나 걸렸지. 어차피 난 무신론자야.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어디보자. 악몽은 어때? 좀 나아졌어?"
트라이코더를 내려놓은 맥코이가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커크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맥코이는 팔짱을 낀 채 커크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슬슬 눈치를 보는 게 또 거짓말을 할 모양이었다.
"그게......."
"또 거짓말 하면 내 의사자격 전부 내놓고 엔터프라이즈에서 내릴거야."
못됐다, 커크가 눈을 크게 뜨며 불만을 토했다. 하지만 맥코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사에게 거짓말을 하는 건 정상적인 진단을 방해하는 일이었고, 이는 처방과 결부되어 큰 위험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또한 맥코이는 커크가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본인도 경험한 것이었기에 더욱 더.
파멜라나 자신 또한, 일이 생겼을 때 그때 그때 이야기했다면 이렇게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작은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손대지 못할 큰 벽이 되었고 그것은 그들의 사이를 영영 갈라놓았다. 아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맥코이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결국은 맥코이의 눈빛에 진 커크가 꼬리를 내렸다.
"또 꿨어."
"같은 내용?"
"응. 그런데 조금 달랐어."
"어떻게?"
커크는 그 꿈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 고민했다. 다시 생각해도 낯이 뜨거워졌다. 아, 젠장. 이게 뭐야. 쪽팔리게. 커크는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맥코이는 늘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꿈을 심리적으로 분석한다나 뭐라나. 외과의사가 심리학이라니 아주 유능하기 그지 없었다. 커크가 다시 망설였다.
"그게, 그가 나를 '가족'이라고 불렀는데...."
"계속해."
"되게 자극적으로 대하더니, 나머지는 똑같았어. 나를 협박하고 박아대고.... 알잖아. 트라우마로 이런 걸 계속 보는 거라며? 그런데 갈수록 감각이 명확해지는데, 이거 어떻게 해야 돼?"
스팍이 자르타클라 교도소에 도착해 죄수들을 인도하고 난 뒤에도 엔터프라이즈는 움직이지 못했다. 엔진 점검은 거의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보조 동력 쪽에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해 기술부원들이 모두 그리로 몰려갔기 때문이었다. 스콧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스팍은 결국 통신을 종료해버렸다.
스팍은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엔터프라이즈의 점검이 완료되는데 최소 4시간. 점검이 완료될 경우 이곳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시간. 총 5시간. 대신 이 교도소의 셔틀을 빌려타고 갈 경우 걸리는 시간은 순수하게 8시간. 중간에 점검을 완료한 엔터프라이즈가 나와 자신의 셔틀을 맞이한다면 약 5시간 20분이 걸리지만, 접촉 지점은 불안정한 별무리 지대이므로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한 이 셔틀을 돌려주러 다시 이곳에 와야만 한다.
이곳에서 엔터프라이즈를 기다리는 것이 경제적이었다. 스팍은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그는 습관처럼 자신의 영혼을 더듬어 커크를 찾았다. 커크는 희미하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스팍은 초조해졌다.
대체 왜, 커크는 타인과 관계를 한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왜 거부한 것일까. 그는 혹시 '일부러' 자신을 멀리 보낸 것이 아닐까?
아냐, 억측이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을 가라앉혀야 했다. 물론 가능성이 존재하나 그것 또한 차근차근 검증해보자. 스팍은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 현실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가정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과학자였다. 자신이 관찰한 객관적 사실(fact)만을 증거로 결과를 추론하는 벌칸이었다.
첫 번째 사실. 커크는 타인과 관계를 가졌다. 타인의 정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여자든, 남자든, 휴머노이드든. 그의 성향으로 볼 때 충분히 발생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확을 요하기 위해 규명이 필요하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두 번째 사실. 커크는 자신의 도움을 거절했다. 왜? 과학에서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는 차후에 그가 밝힐 것이다.
세 번째 사실. 커크와 자신은 본딩되어 있다. 하지만 커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정보의 불균형이 발생한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본드. 커크는 그것을 몰랐다. 스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커크로부터 보다 분명한 정보를 확인해 사실을 확정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할 수 있으리라.
스팍은 즉시 엔터프라이즈에 통신을 시도했다.
"엔터프라이즈. 여기는 스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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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함장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 전에 심하게 장난을 친 탓에 체코프는 반쯤 삐쳐 있었고, 술루는 자신의 시프트가 아니라서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커크는 물끄러미 스팍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그의 텅 빈 자리가 웬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자리에 없으니까 더 보고 싶은걸.
커크에게 있어 스팍은 든든하고 능력 있는 부함장이었다. 또한 전장에 나가서 자신의 등을 맡길 수 있는 믿음직한 동료이자 친구였고,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보여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주변 사람을 (특히 자신을) 배려할 줄 아는 남자였다. 물론 그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측면이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랬다. 커크는 그의 그런 측면을 그의 일부로써 존중했다. 커크는 그가 싫지 않았다.
"함장님. 자르타클라로부터의 통신입니다. 부함장님께서 개인 회선을 요청했습니다."
스팍이? 텔레파시라도 통했나? 커크가 반가운 얼굴로 손짓하자 우후라가 통신을 넘겼다.
"헤이, 스팍. 나 보고 싶었어(Did you miss me)?"
정작 보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었지만, 늘 그렇듯이 질문으로 상대방에게 인사하는 커크였다.
"함장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히' 얘기해봐."
"사적인 일입니다. 통신을 함교가 아닌 별개의 공간에서 할 것을 요청합니다."
마냥 웃던 커크가 입을 다물었다. 덜컥 불안해졌다. 저 벌칸에게 사적인 일이라면 틀림없이 '그 때'의 일일 것이고, 커크는 그 기억을 수면으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스팍이 왜 자꾸 그 일을 상기시키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하면 안돼? 네가 그러니까 무섭다."
"그렇다면 제가 돌아간 뒤에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함장님. 한 가지 사실만 확인해 주십시오."
"뭘."
"약 10시간 전에 성관계를 가지셨습니까?"
커크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그의 통신을 누구라도 들었을까 싶어 커뮤니케이터를 쥐고 주변을 슬그머니 둘러보았다. 체코프는 별지도를 보고 있었고, 우후라는 다른 통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크루들 또한 저마다 자기 일에 충실히 임하고 있었다.
커크는 결국 몸을 일으켜 터보 리프트로 향했다. 체코프를 불러 함장석을 지키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프트 벽에 몸을 기댄 커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야??"
커크의 거친 반응에 스팍은 자신의 모든 가정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느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커크는 그 사실을 부정했다. 사실은 두 개일 수 없었다: 팩트는 언제나 하나였다. 즉 가능성은 둘이었다. 자신이 옳고 커크가 틀렸든가, 커크가 옳고 자신이 틀렸든가. 스팍이 차분하려고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감정을 억눌러야 했다.
"이해합니다. 당신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상대와 관계를 했든지-."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너 혹시 나 감시해?"
커크가 답답하다는듯이 말해왔다. 스팍의 마음이 불안으로 차올랐다. 대화 중에 뭔가가 맞지 않고 삐그덕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함장님? 저는 사실 확인을 하려던 것뿐입니다. 예와 아니오로 대답해주십시오."
맥코이의 말마따나 커크 스스로도 자신이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난 꿈이 명백히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도대체 스팍은 뭘 보고, 뭘 알고 이렇게 연락을 해온걸까?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날 감시하는 걸까?
커크는 떨리는 손을 들어 PADD를 확인했다. 혹시나 지난 일이 정말 꿈이 아니라면.... 현실이라면.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커크가 버튼 몇 개를 터치해 모니터실과 연결된 화면을 불러왔다. 칸의 감금실이 비쳤다. 칸은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들이닥친 안도감에, 커크가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니야......."
그의 힘없는 목소리에 스팍이 주먹을 쥐었다. 거짓말이었다. 스팍은 두 번째 사실도 규명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함장님. 그렇다면 왜 그때 저의 도움을 거절하셨습니까?"
"무슨......."
"당신의 욕구를 해결하는 것을 도와드리겠다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그것을 해소했습니다. 왜입니까? 저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부족했습니까?"
커크 또한 스팍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뭐? 하고 되묻자, 스팍은 더 그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저는 안 되는지 질문하고 있는 겁니다."
"뭐가 안돼?"
"당신의 성욕을 해소하는 상대 말입니다."
미쳤어. 커크가 입을 벌렸다. 스팍이 지금 왜 그것에 집착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이렇듯 자신을 추궁할 때마다, 그와 자신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커크는 먹먹한 목구멍에서 간신히 말을 끌어올렸다.
"괜찮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과 하지 마십시오.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안 했다고!!"
"거짓말 마십시오."
스팍의 단호한 말에 커크는 포기했다. 그리고 될 대로 대라 하고 내뱉어 버렸다.
"씨발, 그래. 했다. 했어."
스팍의 눈썹 끝이 치솟았다. 사실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해도 그가 이렇게 나오니 더없이 불쾌했다.
"칸이랑."
커크가 통신을 끊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스팍의 손에 있던 통신기가 부서졌다.
예수의 12제자 중 도마(Thomas). 부활한 예수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함. [본문으로]
요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그리고 스팍과 커크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위: R(15세)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의: 다크니스 스포주의, 앵슷 주의, 키스 주의
한마디: 드디어 삼각관계가 시작되고 있어요
-
퍼뜩 정신이 들었다. 커크는 자신이 잠들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천천히 눈을 떴다. 쿼터가 온통 어두웠다. 내가 언제 불을 껐던가? 아리송했다. 누워있던 커크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옆에 선 누군가가 그를 붙잡아 다시 눕혔다.
"본즈?"
커크가 물었지만 그림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커크는 문득 온몸을 엄습해오는 불안감에 눈을 깜빡였다. 설마, 또 악몽이야? 그 잠깐 사이에 또 잠들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지독하다.
커크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극한 긴장 때문에 지친 몸이 금방 잠들었을 테고, 또다시 악몽이 시작된 것일 터였다. 커크는 몰려오는 피곤과 절망감에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좀 그만둬...."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커크의 손목을 잡았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것이 보였다. 커크는 그 순간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고통에 놀라 신음을 뱉었다.
그때의 악몽과 똑같았다. 여러날의 악몽과 동일했다. 다시 회복되지 않는 자신의 몸을 확인하고, 자신을 유린하면서, 엔터프라이즈를 끝으로 몰아가는 꿈. 자신의 크루가 한 명 한 명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꿈. 칸은 정말이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것이었다.
커크는 그에게 손을 잡힌 채 다시 중얼거렸다.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만둬...."
"무엇을?"
"이런 것. 모든 것.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서 나가버려...."
칸이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 커크는 잠깐 안도하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지난 꿈들은 모두 그에게 고문과 같았다. 그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을 늘어놓는 것 뿐이었다. 반항을 해도 애원을 해도 들어주지 않는 무자비한 칸 앞에서, 커크는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보는 게 꿈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꿈은 모든 것이 파괴되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버티기 힘들어.... 제발."
"제임스 커크."
"제발."
칸이 손을 뻗었다. 커크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 손은 놀랍게도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내 가족과 같아. 나에 의해 다시 살아났고 내 피로 살아가고 있지. 그리고 이젠 나와 동일하게 우월해. 내가 널 아끼지 않을 이유가 있나?"
"우으......."
의외의 말에 커크가 말을 멈췄다. 이건 다른 종류의 악몽인가? '가족'이라고? 칸이 다시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난 널 파괴하지 않아. 대신 하등한 것들을 말살하지."
안돼, 커크가 탄식하듯 토해냈다. 결국은 변하지 않았다. 결과는 모두의 죽음이었다. 견딜 수 없었던 커크는 몸을 일으켜 칸의 손에 매달렸다. 그의 손이 구세주라도 되는 것마냥, 붙들고 애원했다.
"죽이지 마. 아무도. 제발, 제발......."
다시 울음이 터져나왔다. 커크는 정말이지 이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꿈이라 해도 반복된 실패와 절망과 슬픔은 자신을 심적으로 나약하게 만들었고, 절벽의 끝으로 몰아갔다. 커크는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다고 느꼈다: 무력하고 무능했다. 커크는 칸의 손이 자신을 뿌리치는 것을 느끼고 다시금 절망했다. 그는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정말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쉬- 울지 마."
다정하면서도 칼날같이 단호한 목소리에 커크는 눈물을 삼켰다. 참으려고 애썼다. 무서웠고, 그저 무서웠다. 다시 칸의 손이 다가오자 커크는 목을 움츠리고 눈을 꽉 감았다. 그는 꿈 속에서 자신이 울 때마다 뺨을 올려붙이곤 했다.
"눈 떠."
그의 말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게 설령 꿈이라 해도. 커크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칸의 손은 명백히 자신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커크는 그의 손이 언제 자신을 그대로 내칠지 몰라 두려워하며 떨었다.
칸이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방금 전에 '뭐든지 한다'고 했나?"
"응, 응. 그러니까 제발...."
"그럼 일어나."
커크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침대에서 내려와 칸의 앞에 서자 칸이 말을 이었다.
"벗어."
그래, 어차피 다 꿈이니까. 커크는 기계적으로 그의 말에 따랐다. 셔츠를 벗으려는 찰나 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냐. 벗지 마."
커크는 그 말에도 순종했다. 그리고 칸이 손을 뻗어 자신을 끌어안아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행동했을 때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이미 절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자신의 셔츠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지분거려도, 자신의 등을 아프게 긁어내려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서서히 달아오른 칸이 자신을 벽으로 밀었다. 그가 자신에게 이를 들이댔을 때, 커크는 그가 자신을 더 쉽게 탐할 수 있도록 목을 기울여주기까지 했다. 커크 또한 칸의 애무에 자극받고 있었다. 이것은 기실 다른 악몽과는 달랐다. 그는 막무가내로 자신을 범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커크는 그런 생각에 도달한 자기 자신에게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뭐지? 이것을 뭐라고 설명하지?
악몽의 결말이 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지?
"아......."
생각이 끊어진 커크가 결국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칸이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목에 잡아먹을듯이 키스를 퍼붓는 것이 좋아서, 그리고 그 좋다는 느낌에 다시 한 번 소름이 끼쳐서, 커크는 머리를 털었다.
하지만 안될 건 뭐야?
불쑥 솟아오른 생각에 꼬리를 물고 결정적인 생각이 이어졌다.
어차피 나는 깨끗하지 않잖아(already dirty).
무기력하게 떨어져 있던 커크의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망설이던 손은 더없이 조심스럽게 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칸은 잠깐 놀란 듯 움직이지 않았으나 곧 커크가 인도하는 대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강하게 키스했다. 키스라는 것을 강약으로 따질 수 있다면, 그랬다. 그는 강하고 세게 커크의 입을 침략했다.
그의 혀가 커크의 치열을 훑고 입천장을 내밀하게 긁어냈다. 어쩔 줄 모르고 굳어있는 커크의 혀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어울려 춤을 추듯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는 입술을 빨아당기고 깨물어서 커크가 멀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칸은 숨이 막힐 때까지 그의 입을 삼키고 또 삼켰다. 한참이나 굶주렸던 것처럼.
틈 없이 밀착된 두 남자의 다리가 끊임없이 서로를 파고들었다. 서서히 달라붙는, 비비는, 피어오르는 그것에 커크는 도무지 아찔함을 견딜 수 없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도 강렬했다. 반쯤 이성이 날아간 커크가 칸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칸은 멈추지 않았다.
종국에는 호흡이 가빠진 커크가 간신히 그를 떼어내고 입을 열었다.
"하아, 칸, 칸......."
"왜."
"이거, 전부 다 꿈이지...?"
칸이 다시 입을 맞춰오며 속삭였다.
"그래. 꿈이야."
-
자르타클라 교도소로 가는 여정은 지난했다. 범죄자들은 기절한 채 창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엔터프라이즈의 보안 요원 두 명은 심심한지 셔틀 내부를 둘러보다가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스팍은 커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잘 참아내고 있었다.
그는 사실 요 며칠 사이에 본딩된 커크로부터 들어오는 감정이나 감각을 조절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았다. 자신이 커크 앞에서 비논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건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그러한 노력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사건이 만약 임무 중에 발생한다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본드의 영향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더라도 (게다가 그는 벌칸이기에 정신적인 측면은 인간인 커크보다 훨씬 예민했다) 적응하거나 무뎌지게 만드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커크로부터 들어오는 감각을 구분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다. 스팍은 그가 수면할 때마다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브릿지에서는 다소 즐거웠고, 식사 시간에는 약간 우울했다. 이러한 것들을 절대적인 수치로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스팍은 현 시점에서 당혹스러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커크로부터 전해지는 느낌은 '쾌감'이었다. 스팍은 낯선 이 감각에 놀라 온 신경을 곤두세우려 했지만, 곧 자신이 임무 중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임무 중에 정신이 팔리는 것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다. 스팍은 인내심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엔터프라이즈에 통신을 보냈다.
"여기는 스팍. 엔터프라이즈, 응답하라."
술루의 답신이 왔다.
"여기는 엔터프라이즈. 말씀하시길."
"현재 순항중이다. 4시간 뒤면 자르타클라 교도소에 도착한다. 함장님은?"
"피로하다며 들어가셨습니다. 혹시 필요한 게 있습니까, 부함장님?"
"부정한다(Negative). 프로토콜대로 다시 연락하겠다."
통신을 끊고 스팍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수면 상태에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이 패턴은 뭐지? 스팍은 궁금증을 키워갔다. 커크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그는 마뜩찮았다. 엔터프라이즈가 자신을 데리러 오는 것을 기다리느니 최대한 빨리 셔틀을 구해서 돌아가리라. 그리고 확인하리라. 다만 지금은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다.
스팍이 결심하고 마음을 비우려던 찰나에 다시 통신이 들어왔다.
"스팍이다. 그쪽 신원을 밝히도록."
"여기는 맥코이다. 스팍, 혹시 짐한테 연락 받았어?"
커크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스팍은 다시금 머릿속이 온통 커크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부정한다. 무슨 일이지?"
"임상 테스트를 한 지 딱 148시간이 지났는데, 짐 이 자식이 자기 쿼터에 콕 박혀있겠다고 했거든."
그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세상에! 스팍은 조종간을 힘주어 잡았다. 임상 테스트, 그 결과에 따라 칸의 처리가 결정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잊고 있을 수가 있지? 스팍은 자기 자신에게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닥터. 그에게 가서 확인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그렇잖아도 지금 연락중인-. 어. 메세지가 왔는데......."
뭔가 삐빅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맥코이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팍은 그를 다그쳤다.
"뭐라고 왔지?"
"'치료되었다'? 이렇게만 왔는데. 정말 완전히 나은 건가?"
"닥터 맥코이. 직접 가서 확인할 것을 요청한다. 제대로 치료되었다면 당장 칸을 붙잡아 넣어."
"그건 곤란해. 완전히 치료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만약 이게 주기만 늘어나거나 다른 부작용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서 칸은 지금 이 상태로 놔둬야 해."
"그러니까 지금 가서 확인할 것을 요청......."
스팍은 그 순간 자신의 정신에 들이닥친 감각에 하마터면 조종간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그 감각을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감각과 대조한 스팍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은 약 4주 전 그와 잤을 때 느꼈던 그것과 동일했다. 틀릴 리가 없었다.
"스팍? 상황 발생인가? 무슨 일이야?"
"확인은....... 메세지 발신이 가능한 정도라면 양호한 것으로 판단된다. 함장님께서 다시 연락하실 때까지 기다려. 이곳은 문제없다. 통신을 종료한다."
스팍은 그 순간 이성적으로 그가 성관계 중이라면 주변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될 것이라 판단했다. 하지만 자신의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막을 수가 없었다. 이성과 감정이 양립했다. 당장에라도 조종간을 돌려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는 속으로 강렬한 질문과 생각을 던졌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명백한 증거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를 추궁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함장님. 제임스 커크. 짐. 지금 다른 상대와 관계중인 겁니까? 제가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제 도움은 거절했으면서? 당신이 문란한 성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건 곤란하군요. 저와 본딩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당신의 쾌감이 제게 전달되어 오는 데다가,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확률이 50%를 넘어가는 현재 질투라는 감정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스팍이 조종간을 부서져라 쥐었다. 이따위 임무에 나오는 게 아니었다. 아니, 커크를 눈에서 떼어놓는 게 아니었다.
요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그리고 스팍과 커크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위: R(15세)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의: 다크니스 스포주의, 앵슷 주의, 근거없는 임무 주의
한마디: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좀 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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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테스트를 한 후로 6일이 지났다. 그동안 엔터프라이즈는 커크의 주도 하에 성공적으로 한 행성의 탐사를 마쳤고, 한 행성의 멸망을 구했으며, 한 행성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수십억 개의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우주는 지구를 닮아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듯이 별 또한 태어나서 죽어갔다. 그 수많은 탄생과 죽음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것이 바로 엔터프라이즈의 일이었다.
함장 일지를 기록한 커크는 팔을 쭉 뻗었다. 불안의 씨앗이 슬그머니 싹을 틔우려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최초의 '부활' 이후, 그의 삶은 7일을 주기로 탄생과 죽음을 반복해왔다: 두 번째 기회의 대가는 그만큼 혹독했다. 맥코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치료제의 임상 테스트의 결과 또한 7일째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결과는 기대하지 말라 했다. 커크는 벌칸이 아니었기에 정확한 확률을 계산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결과가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는 알았다. 낫거나, 낫지 않거나였다. 낫는다면 칸을 다시 냉동시켜 창고에 처넣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었고, 낫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삶과 다를 바 없이 7일마다의 시한부 삶을 영위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불안했다.
악몽의 그림자가 그의 발밑에서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다. 그 꿈이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칸이라는 이름의 블랙홀에 삼켜지는 엔터프라이즈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게 커크의 악몽이 끝나지 않은 이유였다. 커크는 여전히 칸의 꿈을 꿨다. 그에게 삼켜지고 짓밟히는 꿈을. 스팍의 따스한 위로도 그것을 물리치진 못했다.
"그러니까 함장님, 점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20시간만 주셔. 누누히 말했지만 우리 아가씨도 휴식이 필요하지 않겠수? 증말 함장님은 말이요, 내가 엔터프라이즈에 있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 이 말씀이요. 이 엔티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어? 아주 그냥 막 때 빼고 광 내고 선 보러 나온 아가씨처럼 말끔하게 겉부터 속까지 싸악 정비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우주에 몇이나 있겄어? 그것도 하루 내에? 어? 동의하쥬?"
커크는 스콧의 통신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정말로 이런 소소한 것들이 행복하고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하루를 빛과 어둠으로 분절하여 살고 있는 듯했다. 혹은, 삶과 죽음으로.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순간에 더 즐겁게 웃고 행복하게 지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커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절대적으로 동의해. 그러니까 스카티, 이렇게 기도하라고. 엔진 점검 중에 절체절명의 긴급 구조요청 신호 같은 걸 받지 않도록 말야. 그리고 난 결혼 전야의 신부님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첫날밤 기대해도 돼?"
"말도 마슈. 화끈쌔끈불끈하게 해드릴 테니까."
"마음에 든다. 당장 시작해."
커크는 통신을 종료하고 함장석에 기댔다. 엔터프라이즈는 소행성의 바다 건너 별의 잔해가 뿌려진 우주 한 구석에 정지해 있는 상태였다. 우주는 물리적인 바다가 아닌 탓에 해류가 흐르지 않았지만, 커크는 모든 엔진을 끄고 우주 공간에 두둥실 떠 있는 것이 마치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는 해수욕을 특히 좋아했다.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비우고 물 위에 떠 있으면 파도가 자신을 쓰다듬곤 했다. 그들은 친근했고, 다정했다. 언제고 임무 중에 수영을 할 수 있는 행성에 가면 좋겠다. 커크는 막연히 바다를 그렸다.
스팍은 그런 커크를 바라보며 함께 바다에 대한 생각을 했다. 바다, 큰 물, 무질서하고 규정되지 않은 혼란의 집합. 스팍이 나고 자란 벌칸은 혹독하고 뜨거운 행성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광막한 대지와 붉은 사막뿐이어서, 눈씻고 찾아봐도 바다 따위는 없는 세계였다. 스타플릿에 근무하며 지구의 바다에 가볼 기회가 있기는 했지만 스팍은 바다를 봄으로써 얻을 효용이 없다며 거절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스팍은 바다를 보고 싶었다. 커크가 원하는 바다란 어떤 곳일까. 어떤 느낌일까. 그가 느끼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고 싶었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하겠지만.
그날 이후로 스팍과 커크의 관계는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스팍은 아직까지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커크가 자신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질투'라는 감정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아 우정보다는 사랑일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것이 '본드'로 인해 증폭된 효과에 불과하다면? 커크는 자신에게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그 사실을 고한다면? 현재까지 그들이 가졌던 관계조차 어그러질 수 있었다.
위험 부담이 크다. 스팍은 그렇게 판단했다. 더군다나 커크는 칸, 부작용, 연이은 사건으로 인해 예민한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까지 고민거리로 떠넘겨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스팍은 자신이 인간보다 훨씬 인내심이 강하고 절제할 수 있는 벌칸이란 사실에 감사했다.
"함장님."
우후라가 커크를 돌아보았다. 생각 속의 바다를 수영하던 커크가 멍하니 대답했다.
"어?"
"근처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시그널을 잡았습니다."
"꼭 이런 식이지."
점검 시작한지 10분도 안 됐는데 도움 요청? 영화도 이것보단 낫겠다. 투덜거리던 커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발신자의 소속과 요청 내용은?"
우후라가 집중하는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이런 일에 아주 탁월했고 그만큼 함장의 명령에도 빨리 대답할 수 있었다. 시그널 감도를 조정한 우후라가 확신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르타클라 교도소장으로부터의 요청입니다. 수감 예정인 범죄자들을 호송 중에 셔틀을 탈취당했다고 하는군요."
"셔틀을?"
커크가 턱을 긁적이며 고민했다. 지금 막 점검에 들어간 엔터프라이즈는 모든 엔진이 정지되어 이동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셔틀들은 사출구를 통해 빠져나갈 수 있었고 더러는 고속 워프가 가능한 신형 셔틀도 있었다.
"셔틀 대 셔틀로 한 판 떠보자고. 호송용이라면 공격과 방어 장비가 충분히 갖춰져 있을 거야. 우리도 페이저 챙겨서 간다. 셔틀 두 대에 백병전 가능한 크루들 세 명씩 선별해서 덱4로 보내. 나도 간다."
커크의 말이 끝나자 스팍이 벌떡 일어서서 다가왔다. 커크가 히죽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잘 지키고 있어."
"아뇨. 제가 갑니다."
"그럼 같이 가."
"안됩니다. 함장님은 지난 임무에서 돌아오신지 8시간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스팍의 말에 커크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 엉덩이가 좀 가볍거든. 아니, 그보다 너 내 운전 솜씨 기억 안나? 기막히게 멋졌잖아!"
"쉬십시오. 함장님의 안위를 고려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때 스팍의 마음을 확인한 탓인지 그의 말이 그렇게 고깝게 들리지는 않았다.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던 그 말의 확장이겠지. 커크는 부끄러운 마음에 괜시리 스팍의 시선을 피하며 턱을 긁었다.
"생각해주니 고맙긴 한데......."
"그럼 대신 제가 가겠습니다."
술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코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곁눈질했다. 술루를 따라 일어설까 말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커크는 체코프가 결심하기 전에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브릿지에 그마저 없으면 굉장히 심심할 터였다.
"물론! 둘이라면 믿을 수 있지. 무사히 다녀와. 다쳐서 오면 징계 먹일거야."
"함장님. 규정상 부상은 징계 항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내가 5초 전에 신설했어. 행운을 빈다."
터보 리프트 앞에서 커크가 웃으며 그들을 전송했다. 스팍과 술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프트의 문이 닫혔다.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그 임무가 또다른 문제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
"셔틀에 있던 간수들이 모두 죽었다고?"
커크의 질문에 스팍이 다시 답했다.
"예. 그래서 현재 다섯 명의 범죄자들을 교도소로 인도할 방법을 모색중입니다."
"니요타, 교도소장으로부터의 답신은?"
"현재 워프 가능한 셔틀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을 보낼 수 없다는 뜻이네. 뭐 어쩔 수 없지."
터보 리프트가 열리며 술루가 들어왔다. 커크는 한 손에 커뮤니케이터를 든 채로 다른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그가 타고 나갔던 셔틀의 다른 크루들 또한 모두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커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스팍, 수고스럽겠지만 네가 그 셔틀을 몰아서 교도소까지 가줘야겠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이 셔틀의 워프 최대속도와 거리를 계산했을 때 약 8시간 걸립니다."
"생각보다 머네. 추가로 필요한 건?"
"제가 이 셔틀을 운전해서 가면 다시 엔터프라이즈에 돌아올 방법이 전무합니다."
스팍의 말에 커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엔터프라이즈가 너를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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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은 교도소에 범죄자들을 인도하러 떠났고, 엔진 점검은 11시간 뒤면 끝날 예정이었다. 커크가 스콧을 닦달한 덕분에 그것도 두 시간이 줄어든 것이었다. 모든 게 평소와 같았고 별다른 문제 없이 흘러갔다. 커크의 7일 주기를 셈하는 시계가 1시간이 남았다는 것만 제외하면.
커크는 그 기다림의 불안함을 견딜 수 없어 자신의 쿼터로 향했다. 거기까지 부득불 쫓아오겠다던 맥코이는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겠다며 메디컬 베이로 쫓아보낸 참이었다. 만약에 대비해 칸의 혈청이 담긴 하이포도 탁상 곁에 놓여 있었다. 낫거나, 낫지 않거나,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서 커크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모든 준비를 해두면 그 긴장도 조금은 줄어들곤 했다.
"스팍이 같이 있었다면 좋았을걸...."
커크는 침대에 앉아 다리를 끌어당겼다. 자신을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 한 명이나마 있다는 것으로도 기뻤다. 그렇게 말해줬다는 것이 감사했다. 그러니까, 커크도 사실은 스팍이 소중하고 좋았다. 가끔은 말이 안 통하는 게 답답했지만, 마냥 좋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친구였다. 본즈와는 달랐지만, 어쨌든 둘 모두 소중했다. 커크는 그렇게 스팍의 이름을 중얼거리다 깜빡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