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의 능력이 대대적으로 알려진 이후, 프리마텍의 조직을 모체로 한 능력자들의 조직이 만들어져. 안젤라가 다시 그 수장이 되고 노아와 피터, 가브리엘이 그들을 돕지. 클레어는 너무나 잘 알려진 탓에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동시에 그 조직의 대외적인 간판? 같은 느낌으로 정부에 접촉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 하지만 역시나 문제가 많겠지. 능력자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러던 중 네이슨의 기일이 돌아오고 모두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 그 날을 지내. 가브리엘이 피터를 위로해주려 해도 소용없었지. 결국 피터는 한 가지 결심을 하고 히로를 만나. 그리고 몰래 능력을 복사해오지. 그리고 과거로 가버려.
피터는 시즌1때부터 닥터(닥터후의)처럼, 자신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해. 살아있는 네이슨을 보고, 자신을 보고. 시간여행자는 과거에 간섭하면 미래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개입할 수 없는거야. 지켜보기만 할 뿐. 그러다가 시즌3 마지막에, 네이슨이 죽는 순간에 결국은 참지 못하고 뛰어들려 해. 그 상황은, 피터(과거)가 어디론가 튕겨져 날아가고 네이슨(과거) 사일러(과거)가 있는 상황에 피터(미래)가 끼어들어 네이슨을 구하려는 거야. 그런데 그때 시간이 멈추고 가브리엘(미래)가 오지. 히로에게서 소식을 전해듣고 그를 쫓아 과거로 온 거야.
과거를 바꾸면 우리도 없어질지 모르고 미래의 그 모든 게 변할지도 모른다고 그를 말리지만, 피터는 자기를 말리지 말라고 해. 자신이 네이슨을 구할 거라고. 그 와중에 가브리엘은 자신이 과거 사일러였을 적에 네이슨을 죽이던 기억을 떠올려. 변화된 지금과 달리 과거의 자신은 분명히 네이슨을 죽일거고, 그가 없어진다면 분명히 피터도 죽일거야. 그래서 그를 살리기 위해 피터한테 형이 자신을 살리는 것을 원할 것 같냐고 말해. 그 말에 피터가 그만 울컥 하고 말지. 자신은 어머니에게 속아서 형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알게 됐어. 형이 진짜로 죽은 때조차 지키지 못한거야. 그리고 형을 죽인 게 바로 자신의 앞에 있는 가브리엘이고! 그래서 화가 나서 그에게 덤벼들지.
가브리엘은 어쩔 수 없이 피터를 기절시켜. 그리고 안전한 곳에 넣어두고 자신의 외형변환 능력으로 네이슨으로 변신, 실제의 네이슨은 다른 곳에 가둬둬. 그리고 자신이 사일러에게 죽음을 당하지. 자신이 죽인 사람이니까 그 연기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래서 그는 사일러, 과거의 자신에게 죽임을 당한 뒤에 자가 치유를 통해 다시 살아나. 때마침 피터가 쫓아오지.
형 어디있냐고, 네이슨 어디있냐고 따져. 가브리엘은 걱정 말라고 장소를 알려준 뒤에 한 가지를 당부해.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피터.
뭔데. 말해.
우리의 관계를 유지하고,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모든 과거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야 해.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개브. 말해봐.
가브리엘은 다시 네이슨으로 변신해. 그리고 자신의 머리 뒤에 못을 박아 죽음을 위장하라 하지. 피터나 클레어 모두 부활 능력이 있지만 신경을 관장하는 부위인 연수나 소뇌 쪽에 이물질이 박혀 있으면 깨어나지 못하고 죽은 상태가 되거든. 그런 경험들이 있기에 자신도 그렇게 죽은 척 네이슨의 시체로서 있어야 한다는 거지. 피터는 그건 또 차마 못하겠어서 망설이지만, 가브리엘이 피터에게 그걸 쥐여주고 말해.
네이슨은 안쪽 방에 있어. 그를 데리고 네 능력으로 원래 시점으로 돌아가.
하지만 너는....
난 걱정 마. 피터, 대신 네가 날 찾아와줘. 벽 안에 홀로 있던 나를 찾아왔던 것처럼, 다시 찾아내서 구해줘.
피터는 기쁘긴 한데 고맙고 미안해서 울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결국은 네이슨의 모습을 한 가브리엘의 뒤통수를 대못을 박지. 그게 또 네이슨 모습이어서 찝찝하고 슬퍼.. 그래서 네이슨의 모습을 한 가브리엘의 시체를 소파에 원래대로 앉혀놓고, 안젤라와 파크만이 오기 전에 그 자리를 피하지.
그리고 기절한 네이슨을 데리고 원래의 자기 세계, 그 시점에서는 미래겠지. 시즌5의 세계로 데리고 와서 모든 설명을 해줘.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 시즌4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형이 죽고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되었다, 라고. 네이슨은 혼란스러워하지만 워낙 똑똑한 사람이니 금방 이해할거야. 죽었어야 할 자신을 살렸지만, 그게 현재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도록 과거의 자신들을 속였으니까 문제도 없고.
그래서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안젤라도 만나고... 안젤라는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해. 가족들의 재회지. 피터도, 네이슨도, 결국은 클레어까지, 네이슨이 없었던 동안 저지른 일들에 대해서 복잡한 심경은 있지만, 그래도 죽었던 사람이 돌아왔는데 그게 별거겠어. 어렵고 힘들어도 결국은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버텨낼거야.
사실 헬리콥터 사고사로 위장했던 네이슨의 가짜 죽음은, 다시 외부에 '헬기사고 직전에 탈출에 성공했으나 착지시에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은 채로 방황하다가 찾았다'는 식으로 꾸며대지. 네이슨은 핵폭발에 휘말렸다가도 살아나고, 총맞고도 살아나고, 헬기사고에서도 살아나고, 세간에서 '기적' 그 자체로 묘사돼. 차기 대통령감이지. 정계에 복귀하는 대신 그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차기 대통령 자리를 노리기 시작해. 클레어가 저질러놓은 사고도 수습해야 하고.
한편 피터는 다시 타임리프를 해서 과거의 자신이 네이슨의 시체를 헬기에 실어보내기 직전에 시체를 빼돌려서 가브리엘을 구해. 머리에 박힌 못을 제거하면 그가 다시 살아나겠지. 계속 냉동 보관했으니 육체가 손상될 염려는 없었는데, 단지...
오랜 기간 죽음 상태였던 후유증으로 가브리엘은 기억을 잃고 말아. 피터가 그를 깨웠을 때 그는 사일러로서나 가브리엘로서 히어로즈 시즌1~4의 기억이 모두 없는 상태인 거야. 일종의 리셋이지. 그를 데려오자 네이슨은 가브리엘에게 고마움을 느낌과 동시에, 아직 사일러에게 남아있는 앙금이 있을 거고, 자신을 구하느라 기억을 잃은 그를 보면 또 죄책감도 들거야. 피터는 자신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형을 살리는 대신 자신을 잃어버린 가브리엘에게 온 정성을 쏟을 거고. 가브리엘은 영문도 모르고 사랑을 받거나, 이유모를 복잡한 시선을 느낀다거나 할거야. 아마 기억이 없으니 능력들도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를 평범한 시계수리공으로 돌아가도록 놔두기에는 그의 잠재된 능력이 너무 위험해서 차마 못하고. 그에게 그가 사일러로서 사람을 죽이고 다닌 일을 다 말하자니 심약한 그에게 어떤 충격이 갈까 걱정이 되고. 그래서 가브리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피터는 자신이 그의 소중한 친구였다는 식으로만 설명을 하는데...
여기서 끝나면 해피엔드겠지만 능력자들에게 반대하는 세력, 드라마로 치면 빌런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어두운 밤길을 대낮같이 걸으며, 다니엘은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 통화 중에 들리던 그의 목소리.
불안해하고, 매달리다가도, 갑자기 뿌리쳐 버리고, 다시 붙잡는-.
손을 뻗어도 곧 사라져버리는 따스한 연기 같은 느낌.
다니엘은 그가 왜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에 큰 의미를 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앞을 볼 수 없는 자신이야말로 정상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잘 적응해서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다른 사람의 어깨에 기대지 않고서는 낯선 곳을 갈 수 없는 자신과 달리 가브리엘은 홀로 걸어다닐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내게 어깨도 빌려주고 말이지. 다니엘은 중얼거렸다.
가브리엘의 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행인이 많지 않았다. 과제를 모조리 해치우고 나니 꽤 늦은 시간인 탓이었다. 다니엘은 그것이 오히려 편했다.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면서 뻥 뚫린 길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평소처럼 누군가와 부딪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까.
흐응. 얇은 컨버스 사이로 익숙한 양감이 느껴졌다. 가브리엘의 집 앞 길이었다. 많이 놀라려나? 다니엘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걸음을 빨리했다. 가브리엘의 목소리, 빨리 듣고 싶어.
Knock. Knock.
두 번 노크했다. 가벼운 나무문을 뚫고 가브리엘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커지고, 다가와서, 짜잔. 문을 열겠지.
"누구-."
"개브!"
문이 열리자마자 다니엘은 가브리엘이 서 있는 바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듬직한 몸을 꽉 껴안고 그의 가슴에 볼을 부볐다. 따뜻했다. 엄마와는 다른 느낌.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느낌. 그게 참 좋았다.
"!... 대니."
"으흥흥. 아, 진짜 보고 싶었어!"
가브리엘은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다니엘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다니엘이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다는 눈빛을 하고, 들어올렸던 팔을 내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다니엘의 양쪽 어깨를 잡았다.
"...고마워. 일단 이거 놓고..."
가브리엘은 먼저 문 앞을 살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확실히, 늦은 시간이었지. 이 시간에 혼자 찾아온 거야?
"왜~ 제대로 안아줘. 팔 여기다 두르고!"
다니엘이 가브리엘의 팔을 잡아다가 자신의 허리에 착 붙였다. 가브리엘의 생각이 끊겼다.
"......."
자신의 두 팔 안에 가득 담긴 다니엘을 보자, 가브리엘은 더더욱 할말을 잃었다. 무어라 대꾸할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아니, 사실은 너무 여러 생각이 떠올라서 입 밖에 내뱉을 수가 없었다. 불가능했다.
답이 없자, 다니엘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직도 삐졌어?"
"....... 아니. 아니야... 따뜻하다."
품 안에서 기분좋게 울리는 심장 박동. 마치 작은 짐승을 껴안은 기분이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울리는 두 개의 심장 소리란 꽤나 강렬해서, 한 번 붙어버린 이후에는 다시 떨어지는 게 아쉬울 정도로 중독성이 있었다.
아, 미치겠다.
가브리엘은 자기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몸. 연약한 몸. 내 것. 내 다니엘.
너무 예뻐. 손아귀에 가두고 싶을 만큼. 하지만...
"....... 대니."
다니엘은 가브리엘의 팔이 자신을 단단하게 조여오자 살짝 불안해졌다. 정말 화가 많이 났나봐.
"으응. 혀엉. ...어. 큼. 개브. 응."
애교를 부리다 말고 정신을 차린 다니엘이었다. 가브리엘이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이라고? 대니?"
"음. '오빠'는 변태 같잖아. 아하하."
"흐음. 그래서 문 열리자마자 '형' 품에 뛰어들었어?"
다니엘의 웃음 소리에 가브리엘의 굳었던 팔도 천천히 내려갔다. 그의 마음도 차분해졌다. 놀라웠다.
허리케인처럼 휘날리던 생각들도 다니엘의 웃음 소리만 들리면 사르륵 가라앉았다.
"화 풀렸어?"
"....... 괜찮아. 시간 있어? 잠깐 들어와 앉아."
굳었던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괜찮은 척 할 수 있었다. 잠깐이라도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더 괜찮아지겠지. 가브리엘은 고개를 돌리며 생각했다.
"형 나 자고 가도 돼?"
"자고... 뭐?"
"한 번 물어봤어. 허락 안 해 줘도 자고 갈 거야."
다니엘이 씨익 웃었다. 가브리엘은 그 웃음에 다시 한 번 심장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을 감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길 필요가 있었다. 과제, 과제 있다며. 너 임마. 과제 때문에 못 만난다고 했잖아. 빌어먹을 과제 말야.
"...... 음. 과제는. 다 끝내놨어?"
"응. 힘냈어! 자기 보려고. 잘 했어?"
"어......."
역효과였다. 젠장맞을.
...내가 대체 네게 뭘 해줘야 할까. 넌 이렇게 내게 달려와 주는데. 나는...
칭찬을 바라듯 헤헤, 웃고 있는 다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다니엘은 모를 테니까.
"잘 했어. 착하기도 하지. 대니 어린이. 도장이라도 찍어 줄까요?"
"간식은 안 줘요. 선생님?"
"우리 대니. 배 고파요? 뭐가 먹고 싶어요."
"개브요오오-...는 장난이고 쿠키 있어?"
"......."
너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이 멈춰. 0.3초간 멈춘다고. 네가 날 죽이는데, 이렇게 죽일 것 같은데.
이럴 때 정상적인 반응이란 게 대체 뭐냔 말이야.
네가 날 죽이기 전에 널 죽여야 해? 그래?
"쿠키는 없고 프링글스 두 통 있는데."
간신히 단어를 끄집어냈다. 다니엘은 환호하는 표정으로 문을 닫고 집 안에 들어섰다. 그래, 이제 아주 네 집이지.
"나 프링글스 좋아해."
"오리지널하고 멀티그레인. 어떤 거? 일단 앉아 봐. 그... 휴. 그래. 네 소파에."
"오리지널. 앉았어."
다니엘이 소파에 기어올라가는 사이에, 가브리엘은 찬장을 열고 프링글스를 꺼냈다. 바로 옆에 쿠키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냉장고를 열며 다니엘을 불렀다.
"....... Coke?"
"오렌지 주스 갖고 와서 여기 앉아."
다니엘이 소파 위를 토닥거렸다. 얼른 와, 얼른 와, 하고 강아지가 꼬리를 탁탁 치대는 것 같았다.
"여기. 네 오른손 두 뼘 옆. 안 쏟게 조심하고..."
"응."
가브리엘이 옆에 앉자, 다니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많이 고심한 끝에 정리한 자신의 생각이었다.
"있지. 개브가 잘못한 거 없어. 우리 사귀는 사인데... 매일매일 보고 싶은 게 맞는 거지. 나도 개브 보고 싶어서 혼났어."
"......."
"하나도 안 이상해."
다니엘이 조곤조곤 이야기하자, 가브리엘은 가슴 한 구석에 먹먹했던 것이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통화를 하면서 잠깐, 그래, 갈라졌던 상처에 부드럽게 약을 발라주는 느낌. 하지만 그 속에는 더 단단한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절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 절대로, 절대 다니엘에게만큼은 보일 수 없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에게만큼은 털어놓고 싶은 것...
"대니. 난..."
"응. 나 듣고 있어."
"난... 난 두려워. 대니."
가브리엘이 주먹을 쥐었다. 두려웠다. 알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 때문에 두려웠다. 자신이 두려웠고, 그 자신을 아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 뒤에 뭐가 숨어 있을지- 괴물일지, 혹은 또다른 것일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자신이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절망적이었다. 이것은 자신조차 고칠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한 자리에서 튕기는 시계 초침처럼 고장난 거야. 뭐가 정상이고, 뭐가 비정상인지. 전혀..."
"쉬이. 괜찮아. 당신이 내게 잘못하는 건 없을 거야. 아직까지도 한 번도 없었잖아."
"...넌 절대 모를 거야."
절대로. 알게 두지 않을 거야. 알게 되면 네가 어떻게 나올지... 그것조차 알 수 없으니까. 두려우니까. 생각하기조차 싫다.
"적어도 지금 나한텐 자기가 너무 사랑스러운데. Chu. 자기한텐 아니야?"
다니엘이 부드럽게 가브리엘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턱을 잡고 입술을 맞췄다.
입술이 떨어지자 가브리엘의 시선이 다니엘의 입술에 머물렀다.
분홍빛. 아, 다니엘. 사랑스럽다는 단어는 네 입술에나 쓰는 거겠지. 내가 아니라.
이번엔 가브리엘이 다니엘의 턱을 쓸었다. 그가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대니."
"으응?"
"키스해도 괜찮아?"
"나도 잘은 모르지만 그런 거 물어보는 남자는 매력 없댔어."
멍청아. 어느 게 정상인지 아닌지 모른다니까. 가브리엘이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니엘의 입술을 쓸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그건 명백한 허락이겠지."
"얼마나 대단한 키스를 하려고 자꾸 뜸을-."
자꾸 오물거리는 입술을 도저히 봐줄 수가 없어서, 삼켜 버렸다. 핥고, 쓸고, 먹었다.
"...대니. 내 다니엘."
가브리엘의 팔이 다니엘의 목을 껴안았다. 다니엘은 순순히 안겼다. 그리고 자신도 그의 머리를 팔 안에 가두었다.
"보고 싶어서. 미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미안- 미안해..."
너무나 소중해서, 한 올도 남김없이 자신의 입 안에 가두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호흡조차 전부.
그러니 빠져나가게 둘 수 없었다.
"예전처럼. 네가 없던... 빛이 없던 그 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다시 갈망에 미쳐버릴 거라고..."
속에서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울음 대신, 응어리져서 엉켰던 악몽들이 하나하나 풀어졌다. 그럴수록 가브리엘은 더 진하게 다니엘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숨이 막혀 죽어도 상관없었다.
"대니. 나한텐 네가 너무 절실히 필요해. 하루라도 떨어지면... 그러면..."
사람이 죽어나가.
"지금 네가- 키스하고 있는 건. 후으..."
가브리엘의 입이 쉴틈없이 부딪쳐 오는 통에 다니엘은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누군데? 나 여기 있다니까."
"가지 마. 여기... 하."
입을 붙이고, 혀를 부대끼면서, 폐의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 호흡을 섞었다가, 잠깐 떨어졌다.
"여기 있어. 가지... 가지 마. 가지 마. 아무데도... 사라지면 안 돼. 가지 마..."
"으응. 음... 잠깐.. 응. 잠깐만..."
"가지. 말라고. 여기서..."
다니엘이 말을 하려고 입을 뗄 때마다 다시 가브리엘이 덤벼들었다. 소파 등받이에 파묻힌 다니엘이 자유로운 손으로 가브리엘의 등을 쓸었다. 그리고 달래듯이 토닥여 주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도통 멈추질 않아서, 결국 가브리엘과 입을 맞댄 채 다니엘이 중얼거렸다. 서로의 이가 스치며 묘한 소리가 났다.
"개브- 개브... 잠깐만..."
"왜... 하. 왜."
"......."
"...대니."
"개브."
다니엘은 말해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에 기대어 입을 열었다.
"좋아해. 조금은 사랑하는 것 같기도 해."
"...... 나는..."
가브리엘의 코에 자신의 코를 비비며,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의 불안,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을 날려버리기 위해서 다니엘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있지. 음... 이렇게 말하자. 내가 당신이 말했던 그 진흙 속에서 당신을 꺼내 줄게. 다시 거기로 가지 마."
가브리엘, 너의 그 진흙 속엔 뭐가 있었을까. 나는 볼 수 없겠지만.
"..너라면 할 수 있겠지."
"응. 할 수 있어."
가쁜 호흡 사이로 짧은 입맞춤 소리가 났다. 다니엘이 먼저 입술을 건네고 떨어지자, 가브리엘이 답하듯 되돌려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따스한 공기와 숨소리가 차올랐다.
"...... ...있잖아."
"음... 말해."
"사실 쿠키 있어."
가브리엘은 수많은 고백에 이어 한 개의 고백을 추가했다.
"............ 아까 일부러 안 준 거야? 삐져가지고?"
"시끄러."
다니엘이 웃음을 터뜨렸다. 가브리엘은 미간을 모았다. 딱히 삐진 건 아니었다. 주기 싫었을 뿐이지.
"푸훗. 푸후후. 아저씨가 왜 이렇게 유치해요?" "그 말 후회하게 해 줘? 유치의 끝까지 가 보자. 뽀뽀 한 번에 쿠키 하나씩이야. 임마."
"오호라. 해 보자는 거야? 쪽! 하나."
".......... 말을 잘못했네. 키스 일곱 번에 쿠키 한 조각-."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니엘의 주먹이 가브리엘을 응징했다.
"주먹 한 대엔 몇 개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착하게 일어서서 부엌으로 가는 가브리엘에게, 다니엘은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었다. 키스 한 번에 쿠키 하나라. 괜찮네.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