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오늘부터 폭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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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휴식 시간이야? 10분, 그 정도밖에 안 지났어! 말이나 돼? 그쪽이 숨기는 게 있겠지!"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는 커크를 따라 맥코이도 걸음을 빨리했다. 커크는 즉시 리프트에 탑승했고, 우후라는 빠르게 앞서 일어난 일들을 요약해서 보고했다.
"휴식을 요청한 것은 저희 측입니다."
"뭐?" 커크가 눈을 황망하게 떴다.
"스팍 중령님께서 휴식을 요청하셨고, 보안 회선으로 아레비크의 저의를 간파했다고 말씀하신 후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긴급 보안 프로토콜에 따른 연락이 오지 않는 상태입니다. 함장님."
2차 협상 재개까지 3분 남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커크의 귀에 직접 들어왔다. 리프트의 문이 열리자마자 술루가 벌떡 일어섰지만, 커크는 손을 저어 술루를 다시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커크는 그 와중에도 흘깃 칸을 살폈다. 그는 변함없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간다. 칸이 나와 동행해. 프로토콜대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 즉시 중립 행성 전체에 경고 메시지를 발신하고 지원을 보내. 알겠지, 술루? 믿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술루 또한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크로노스에서 스팍과 커크가 칸을 찾기 위해 내려갔을 때 대신 함장의 자리에 앉았던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분주히 손을 움직였고, 칸은 벌떡 일어서서 커크를 향해 다가왔다. 커크의 뒤에 서 있던 맥코이만이 머리를 저으며 그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함장과 부함장이 모두 내려가는 건 규율 위반이라고 스팍이 누누히 말했을텐데?"
"내가 언제나 그 반대에 반대했던 거 알잖아."
커크가 씁쓸하게 웃고 칸과 함께 리프트에 들어섰다. 맥코이는 그런 커크를,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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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규약 3조라고?"
커크는 칸의 말에 내심 찔렸으나 아무렇지 않게 리프트의 문을 노려보았다. 칸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한 바였다. 그는 브릿지에서는 함장인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주었으나, 단둘이 있으면자신의 이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만약 그가 마음을 바꿔 브릿지에서조차 자신을 압박하려 든다면-. 아마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엔터프라이즈가 그의 손아귀에 빠졌다는 사실을. 커크는 자신이 칸에게 다시 한 번 이용당하는 그러한 장면을 다시는 크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예민하게 구는 건 네 쪽이지. 난 스타플릿 규약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협상은 나 혼자로도 충분해."
하지만, 칸이 운을 뗐다. 커크는 칸이 내뱉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심장 깊숙한 곳을 여지없이 찔러왔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것을 간파했다. 그가 직접 말했던 대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넌 그가 걱정되서 달려가는 게 아닌가?"
때마침 리프트의 문이 열렸다. 커크는 칸에게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걸어나가 전송기 위치에 섰다. 스콧이 레버를 잡고 있었다. 칸은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띄운 채 커크의 옆에 나란히 섰다.
"2분 남았슈. 함장 나리."
"말할 시간도 아까워. 전송해."
"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목적이 협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라는 스콧의 말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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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의 예상대로였다. 커크는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둘의 생각이 반쯤 공유되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칸을 데리고 중립 행성으로 내려왔고, 아레비크 종족들의 앞에 섰다. 스팍 또한 본드를 통해 커크가 어떻게 협상을 진행할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1차 협상자와 다르군."
가벼운 갑옷을 걸친 아레비크 종족 대표가 커크와 칸을 맞이했다. 회의장 안에는 종족 대표를 비롯해 한 명의 보좌관, 그를 호위하는 군인 두 명과 중립 행성 소속의 중개자- 이를테면 평화유지군이 회의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카다시안 계통이라는 아레비크 종족은 일반적인 카다시안과 마찬가지로 휴머노이드 종족이었으며, 안면에 돌기가 솟아있는 게 특징이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죠. 전 행성 연방 스타플릿 소속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제임스 T. 커크고 이쪽은 부관인 과학자 칸입니다."
"우리의 협상 조건을 듣자마자 휴식을 요청한 뒤 협상자를 바꿔 내보낸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커크 함장."
"그쪽이 신경쓸 필요는 없는 문제입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행성 연방 가입이죠. 심지어 듀테륨을 제공하겠다고. 그렇다면 우리로부터 정말 원하는 게 뭡니까?"
커크의 예리한 질문에 칸이 눈썹을 움직였다. 듀테륨이라면 원자로, 특히 워프 코어에 필수적인 물질이었다. 워낙 희소하여 대량으로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고가치의 물질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것을 행성 연방에 제공하겠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동시에, 믿기 힘든 제안이었다.
"말했다시피 평화와-."
"평화와 동맹으로서의 안전 보장. 그것뿐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대표님. 행성 연방은 연방 전체의 안전을 위해 가입 당사 종족을 검증할 의무가 있습니다. 듀테륨 저장고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다소 무례한 커크의 말에 아레비크 종족 대표가 불쾌한 듯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커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좋다."
대표가 몸을 일으키자 커크와 칸 또한 일어섰다. 커크는 칸의 어깨를 짚었다.
"칸이 직접 확인할 겁니다."
그들이 동의하고 앞장섰다. 칸은 뒤에서 커크의 멱살을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날 사지로 몰아넣는군. 제임스."
"알아서 살아남아."
커크의 대꾸에 칸이 피식 웃었다. 그들의 제안 자체가 거짓이라면, 지금 안내하는 것 또한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원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협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협상하러 내려온 자들 일부를 죽이고 카다시안으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한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부디 살아있는 그를 찾길 바라지."
"네 시체 정도는 수거해줄게."
칸이 비꼬자 커크가 맞받아쳤다. 곧 칸은 그들을 따라 어딘가로 향했고, 대표와 보좌관을 비롯하여 평화유지군도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들은 회의장 밖에서 통로를 지킬 터였다. 홀로 남은 커크는 즉시 커뮤니케이터를 열었다.
"스카티. 혹시 점검 다시 할 수 있어?"
"뭐라굽쇼?"
"중요한 일이야. 칸이 엔터프라이즈에 무슨 짓을 해뒀는지 모르는데, 잘못하면 폭발할지도 몰라."
커뮤니케이터 너머로 스콧이 길게 욕설을 쏟아붓는 소리가 들렸다. 커크는 잠시 커뮤니케이터를 멀찍이 들고 있다가 다시 가까이했다.
"어, 스카티?"
"니미럴 칸이 그 짓을 할 때꺼정 뭘 한거요! 대체!!"
"...풀점검 다시 하고, 알아낼 때까진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엔진인지 워프 코어인지 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닫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스팍 또한 어딘가에서 멀쩡히 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본드 때문이겠지. 칸도 내보냈고 스콧에게 명령도 내렸으니 이제 스팍을 찾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 걸까. 그것도 안전 요원들도 모두 데리고. 그가 알아냈다는 아레비크의 저의는 무엇일까. 그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커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스팍의 목소리였다. 커크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느새 회의실 안에 들어왔는지, 스팍이 자신의 옆에 꼿꼿이 선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에 걱정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커크는 활짝 웃었다.
"스팍!!"
커크가 벌떡 일어나자 스팍이 그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팔걸이를 짚은 채 몸을 기울였다. 졸지에 스팍의 팔 안에 갇힌 커크는 의아한듯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상태로 점점 스팍의 얼굴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커크는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스팍의 손이 마인드 멜드를 하려는 것처럼 자신에게 다가왔다.
스팍은 커크와 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칸이 없는 지금이 기회였고 이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기실 본드로는 완전한 것을 볼 수 없었다.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불완전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마인드 멜드가 필수였다. 스팍에게는 지금 당장,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설정덕후 주의
한마디: 너무 오랜만에 써서 문체가 바뀐 느낌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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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두려움, 공포, 체념, 자괴감.
이 모든 것들이 커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들이었다. 스팍은 함장석에 앉은 채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스팍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전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허공을 응시하듯 어딘가 흐려져 있었다.
스팍은 본드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커크의 쿼터에서 쫓겨난 즉시 스팍이 행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니 정신적 연결인 본드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빈 그릇이라도 된 것처럼 커크의 감정을 마음 안에 가득 받아들였다. 그가 느끼는 것을, 그가 경험하는 것을 자신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게 커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자 칸을 감시하는 방법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벌칸이란 사실에 이렇게 감사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스팍은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현재 커크는 불안정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
두 번째. 아직까지는 칸이 커크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
세 번째. 커크에게 계획이-.
"부함장님. 스타플릿 본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우후라의 보고에 스팍의 생각이 끊어진 실처럼 뚝 멎었다. 스팍은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우후라를 바라보았다. 비록 비논리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언정, 임무에까지 소홀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 내용은?"
"행성 연방에 가입을 원하는 아레비크 종족과 협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레비크 대표의 위치는 베타 우르세 섹터. 정확한 좌표는 수신중입니다."
"술루 중위. 현재 위치에서 베타 우르세 섹터까지 걸리는 시간은?"
스팍의 질문에 술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광속으로 약 4시간 걸립니다."
"진로를 그쪽으로 돌리도록."
"아예, 부함장님."
때맞춰 모든 메시지를 수신한 우후라가 좌표를 읊어주었고, 술루는 스팍의 명령에 따라 엔터프라이즈의 기수를 틀었다. 함장이 위기에 빠진 이 마당에 임무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스타플릿에서 엔터프라이즈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스팍은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돈했다.
아레비크라면 행성 연방 가입을 꾸준히 거절했던 카다시안의 친척뻘 되는 종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연방 가입을, 그것도 먼저 요청하고 나섰다? 스팍은 차근차근 그들의 의도를 추리했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행성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현재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칸을 커크에게서 떼어놓는 일-.
스팍이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추리 과정 중에 커크와 칸에 대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즉, 비논리적인 일이었다.
스팍은 팔걸이를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다간 두 가지 모두 그르칠 게 분명했다. 현실적으로 동시에 두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이상, 한 가지를 먼저 끝내고 다른 한 가지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먼저 해결할 것인가.
스팍은 커크의 일과 스타플릿의 명령을 저울질했다. 자신을 쌀쌀맞게 내보내던 커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자신을 대신해 그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장교가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더 효율적일까. 그 생각에 도달하자 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스팍은 마음 대신 머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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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댱님께서 함교에……. 에에??"
체코프의 가감없는 놀람에 함교의 전원이 터보 리프트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모두가 체코프와 같은 심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커크와 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커크가 입은 지휘부의 노란 셔츠와 칸이 입은 검은색 공용 셔츠는 지나치게 서로를 각인시켰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보색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철천지 원수와 같은 관계를 가진 두 사람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함께 있다는 것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엔터프라이즈의 크루 일부는 이것이 벤젠스 호와 맞설 때의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도 했다.
차라리 과거였다면.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았을텐데.
스팍과 커크는 속으로 동시에 읊조렸다. 누구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스팍은 그것이 과도하게 확장한 본드의 영향인지 본인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후라. 전 채널을 열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우후라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터치 몇 번에 순식간에 엔터프라이즈 전체의 채널이 열렸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던 크루들이 잠깐 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중대 발표가 있다."
커크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팍이 함장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스팍은 그것을 막고자 했다.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임무를 앞둔 상황에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함장님. 규정상 장교들과의 상의 없이는-."
커크가 스팍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스타플릿 규약 3번에 의거하여 함장의 우선명령권을 발동한다. 지금 이 시간부로 칸 누니엔 싱은 엔터프라이즈의 비정규 크루로 등록되며, 임시로 과학부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커크가 말을 흐리는 사이 그 공백을 메우듯 카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캐롤 마커스였다. 벌떡 일어난 캐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서 자신의 PADD를 주워들었다. 그녀는 PADD를 두 팔로 껴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캐롤의 눈동자는 명백한 혼란과 혐오가 뒤섞인 채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장님. 부서-, 부서 이동을 요청합니다."
"…승인한다. 캐롤 마커스 중위는 기술부로 부서를 이전한다. 엔지니어실로 이동해 스콧 소령에게 새 임무를 배정받도록."
캐롤은 함장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한시도 있고싶지않은 듯 빠른 속도였다. 캐롤이 터보 리프트를 향해 다가서자, 커크는 칸 앞을 가리고 서서 그녀와 칸이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캐롤은 이에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빠르게 리프트 안에 들어섰다.
리프트의 문이 닫히기 직전, 커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원망의 빛을 읽었다. 캐롤과 커크는 함께 벤젠스 호에서 칸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함께 칸이 마커스 제독을 죽이는 것을 봐야만 했다. 마커스 제독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캐롤 마커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칸은 캐롤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캐롤이 큰 눈 가득히 커크를 비난했다. 문이 닫히자 커크는 그것을 애써 잊으려는 듯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그래도 명령은 끝마쳐야 했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네."
커크의 말이 함교의 허공을 황망하게 떠돌았다. 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칸마저도.
"칸 누니엔 싱은 함교로 배치된다. 그의 임무는 과학 부서의 전반적인 임무와 동일하며,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기각한다. 발표를 종료한다."
커크 아웃,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후라가 채널을 닫았고 함교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자리했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젠장(Dammit). 저게 뭔 빌어먹을 개소리야!"
메디컬 베이에서 달려나온 맥코이와,
"울 함장님 병이 나았다더니 쌩구라 아녀? 저런 미친 짓을 다 허고."
엔지니어실의 스콧뿐이었다.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현처럼 함교에 긴장이 가득 찼다.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그 현 위에 손가락을 얹은 사람은, 모든 책임과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함장 제임스 커크였다.
"배정된 자리로 가. 칸."
커크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칸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커크는 스팍과 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 교환을 감지했다. 스팍이 이동하지 않는 한 칸은 움직이지 않을 태세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네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스팍."
커크의 말에 스팍은 생애 처음으로 항명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끊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스팍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임무가 우선이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였다. 칸은 자신이 흔들릴 것을 계산하고 이런 구도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팍은 주먹을 세게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커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칸 또한 순순히 몸을 돌려 캐롤의 자리로 향했다. 칸이 의자에 앉자 양 옆에 앉은 크루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사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상황이 정돈되고 나서야 커크는 함장석에 앉을 수 있었다. 거친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온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함장의 직책은 그가 피곤해질 겨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커크는 부러 눈을 세게 짓눌러 비비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항로가 어제와 다른 것 같은데. 술루?"
"…스타플릿 본부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베타 우르세 섹터로 향하는 중입니다. 함장님."
잠깐 호흡을 놓친 술루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커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명령 내용은?"
함교가 조용해졌다. 보통 때라면 커크의 명령에 즉시 답했을 스팍이 입을 열지 않자, 마지못해 술루가 말을 이었다.
"…아레비크 종족과의 연방 가입 협상입니다."
"협상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여전히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다. 술루는 이미 포기한 모양인지 커크에게 망설임없이 답했다.
"아레비크 대표가 있는 중립 행성까지 도착하는데 남은 시간은 28분이며, 협상 개시 시각까지는 33분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았네. 전략은?"
술루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명백히 스팍을 향하여 한 말이었다. 스팍은 언제나 커크에게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협상 측면에서는 전략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곤 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스팍 마누라 뺏길 기세....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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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장님?"
스팍은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쿼터 안에 커크와 칸이 서 있었다. 칸이 커크를 제압하거나 위협하고 있는 모양새가 아니란 것에 일단 안심했지만, 스팍은 그들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급속히 불안을 느꼈다. 즉시 허리춤에서 페이저를 꺼내든 스팍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어째서 칸이 여기 있는 것인지, 커크는 어째서 태연하게 칸의 앞에 서 있는 것인지, 자신의 모든 추리력을 동원해 봐도 논리가 연결되지 않았다.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함장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아냐. 스팍."
커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팍은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커크 때문에 칸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물러서야 할 건 너야."
스팍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커크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 손은 페이저를 집어들었고, 서서히 올라와서, 결국은 자신을 겨누었다. 스팍은 암담한 심정으로 질문했다.
"함장님. 왜 제게 페이저를 겨누시는 겁니까?"
"물러서라고 했어."
"함장님!"
스팍이 미간을 찌푸렸다. 커크는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칸이 어떤 짓을 했기에 커크가 이런 식으로 나오는지 스팍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칸, 이건 전부 칸 때문이었다. 칸에 대한 분노가 거세졌다. 스팍이 몸을 옆으로 움직였다. 그런 그의 움직임을 예상이나 한 듯 커크가 그를 마주보고 움직였다. 마치 칸을 보호하는 듯했다.
"비켜주십시오."
"너나 페이저 내려놔. 명령이야."
스팍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현재를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스팍은 아주 천천히 몸을 굽혔다.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적용 가능한 모든 규정과 예외 조항과 역대 사례들을 훑었다. 그 순간 한 가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페이저를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스팍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그는 빠르게 읊었다.
"닥터 맥코이로부터 당신이 PTSD를 겪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현재의 함장님은 환각, 환청 및 현실검증력 저하로 이성적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라 여겨지며, 스타플릿 규정에 의해 제 임의로 현 상황을 해결하겠습니다."
스팍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칸이 커크의 곁으로 다가왔고, 커크가 급히 팔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만둬! 스팍, 난 본즈가 처방해준 약을 먹었고, 지금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것도 알아. 그리고 내 우선임명권에 의해 칸은 오늘부터 엔터프라이즈 크루야. 그러니까 페이저는 당장 치워."
"뭐라고요(Pardon, sir)?"
스팍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스팍과 칸 모두 커크를 바라보았다. 커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칸은 5년 임무 동안 그가 필요한 임무에 참여할 거야. 내 치료에 협력했고 그 기간 동안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으니까. 5년 임무가 끝나고 지구로 돌아가면, 다시 수감되어 형을 집행할 거고. 이해했어?"
"어디서, 언제 그런 논의가 이루어진 겁니까?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거나 생존에 직결되는 위기가 아닌 이상, 그것은 장교들의 동의를 받아 결정할 사안입니다. 또한 저 자가 탈옥한 거라면 응당 그에 대한 처분이 먼저-."
칸이 비웃듯이 스팍의 말을 끊었다.
"그럴 필요 없어."
스팍은 즉시 시야에 들어온 칸을 노려보았다. 커크의 바로 곁에 칸이 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는데, 칸은 커크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있기까지 했다. 스팍은 당장 페이저를 그에게 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커크를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입니까?"
"탈옥…하지 않았어."
커크의 짧은 대답에 스팍은 입술을 깨물었다. 탈옥하지 않았다? 불충분한 설명이었다. 탈옥하지 않았으니 처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 터였다. 하지만 탈옥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손의 마디 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자제심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다. 스팍은 자신의 추론을 통해 나온 결론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입을 열었다.
"함장님께서 그를 구금실에서 꺼내주셨습니까?"
"…그래."
"함장님께서 그를 여기로 부르신 겁니까?"
"……. 그래."
스팍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마지막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함장님. 그가 자력으로 탈출했고 당신을 협박한 거라고… 말해주십시오."
제발, 스팍은 속으로 덧붙였다. 커크가 긍정한다면 그 즉시 칸을 제압할 모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스팍은 칸을 조준한 채로 간절히 빌었다.
"아니야."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스팍은 한없는 절망을 느끼며 커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본드를 통해 전해져오는 커크의 심정과 생각을 알아내려 했다. 함부로 자신의 속마음을 읽는 것을 커크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스팍이 천천히 그의 생각을 읽었다.
-내가 전부 책임지겠어.
스팍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커크는 이미 모든 것을 결심한 듯 단호했다. 스팍은 그런 커크의 태도에서 다소 슬픔을 느꼈다. 어째서 커크는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것인가? 처음 구금실에서도, 스팍은 구금실을 열어준다면 칸을 제압하고 커크를 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커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은 칸에게 유린당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커크는 스팍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스팍은 새삼 씁쓸한 감정을 경험했다.
스팍이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어쨌든 커크가 칸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게 그의 높은 자존심 때문이든 옆에 있는 칸에 대한 공포 때문이든 상관 없었다. 본인이 커크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스팍은 칸을 제압하고 그를 다시 냉동 튜브에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와 한 번 싸운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면, 커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칸을 제압하면 된다. 간명한 결론에 이른 스팍이 즉시 페이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칸을 향해 쏘았다.
"안 돼…!"
미약하게 외치며 칸의 앞을 막아서는 커크를 보았을 때, 스팍은 무정형의 변수인 커크를 간과한 점을 그 즉시 후회했다.
"함장님!!"
페이저의 광선을 맞은 커크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고, 뒤에 있던 칸이 그를 부축했다. 스팍은 이를 악물고 커크에게 달려갔다. 커크는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이런 걸로 안 죽어. 오버하지 마."
"함장님, 죄송합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무사하십니까?"
"괜찮다니까. 비켜."
커크의 몸에 손을 댄 순간, 스팍은 그의 생각을 보다 분명하게 들었다.
-난 죽지 않지만, 스팍은 죽을 수도 있어. 내가 그를 보호해야 해.
의외의 생각에 스팍이 멍하니 커크를 바라보았다. 그 틈에 칸이 스팍의 손을 쳐냈다.
"함장의 안위를 지킨다는 부관이 함장을 공격하다니. 놀랍군." 칸이 비꼬았다.
"지금 함장님의 안위를 위협하는 건 너라는 사실에 한 치의 오차도 없어. 함장님을 놔."
스팍도 만만치 않게 맞섰다. 스팍의 눈동자는 맹수처럼 위험한 빛을 띄었고, 칸의 눈동자는 마치 그를 깔보는 것처럼 선명한 조소의 빛을 띄었다. 칸이 스팍을 도발하듯 커크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직접 본인의 의사를 물어보지. 제임스?"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커크는 미약하게 떨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스팍. 나가."
"함장님!" 스팍이 비명처럼 그를 불렀다.
"난 휴식이 필요해. 다음 시프트까지 함장석을 맡아. 그때 칸에 대한 제반 사항을 발표하겠어."
커크가 확고하게 명령을 내렸다. 스팍은 커크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어난 커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옆에 서 있던 칸만이 흥미롭다는 듯 스팍과 눈을 마주쳤다. 스팍은 속에서 파도처럼 솟구치는 분노를 이길 수가 없었다.
"중범죄자의 탈옥, 함장에 대한 협박은 즉결처분권을 발동할 충분한 이유가 돼. 주지하고 있길 바라지."
자신을 위협하는 스팍을 향해, 칸이 커크를 잡아당기는 것으로 답했다. 칸은 커크의 허리를 반쯤 안은 채 입을 열었다.
"자신의 함장을 죽일 뻔한 부관이 할 말로는 안 들리는군. 내 피가 아니었으면 그는 벌써 죽었어. 예전에 죽었겠지."
"내 발언과 내 행동은 상관성이 적어. 또한 네 피가 그를 살렸다고 해서 네가 저지른 범죄들이 상쇄되는 건 아니지. 그리고 네가 현재 취하고 있는, 함장님과의 불필요한 접촉은-."
"그만!"
커크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칸과 스팍 모두 입을 다물었다. 커크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쿼터를 울렸다.
"스팍. 제발 나가. 쉬고 싶어."
이것 보라는 양, 칸이 스팍을 노려보았다. 커크는 아예 몸을 돌려 칸의 품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스팍은 가슴 깊이 비참함을 느꼈고, 계속 저런 커크를 보느니 쿼터를 나가는 게 말 그대로 속이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절대로 커크와 칸을 함께 놔두고 싶지 않았다. 커크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한 칸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자신들을 어떤 방식으로 괴롭힐지 감도 오지 않았다. 스팍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빠른 복귀를 기다리겠습니다. 함장님."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스팍이 쿼터를 나서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칸과 커크가 입을 맞추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스팍은 자기도 모르게 쥐고 있던 페이저를 우그러뜨리고 말았다.
-
"칸, 그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칸의 거친 키스에 커크는 그를 말리려 했지만, 칸은 힘있게 커크를 몰아붙였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던 커크는 결국 침대에 걸려 쓰러졌다. 칸이 그대로 그의 위에 엎드렸다.
"널 꿈에서 현실로 꺼냈어. 그걸로 충분하잖아……."
"충분하지."
커크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칸이 즐거이 대답했다. 칸은 손을 들어 커크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그 부드러운 손길을 외면하려 애썼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칸의 시선을 피하면, 조금이나마 이 상황을 견딜 수 있을까 싶었다. 하얗게 질리던 스팍의 얼굴이 자꾸 생각났고, 놀라서 크게 뜬 스팍의 눈과 자신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스팍의 선명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실은 다시 그를 부르고 싶었다. 스팍이 이 절망에서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스팍의 이름을 들었을 때 칸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회상하며 커크는 긴장했다. 칸의 시선을 자신에게 붙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의 말로 판단컨대 칸은 엔터프라이즈를 '폭발'시킬 어떤 장치를 해둔 것이 분명했다. 설령 장치가 없더라도, 벤젠스 호를 만든 그의 실력이라면 엔터프라이즈를 해킹하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그 위협을 제거하기 전까진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칸이 엔터프라이즈와 스팍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일전에 원자로 코어에 직접 들어갔던 것처럼,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함장의 역할이었다.
"제임스. 다시 말하지만 넌 내 거야. 네 몸도, 네 혈관을 흐르는 피도, 네 생명도."
"…그래."
커크는 체념했다. 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스쳐, 턱을 지나고 목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는 것을 온전하게 느끼면서 커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흡을 진정하려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칸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자명했다: 바로 자신이었다. 그것만으로 칸을 잡아둘 수 있다면 오히려 싸게 먹히는 장사이리라. 커크는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 피가 너를 고쳤으니, 우린 이를테면 혈연 관계지. 넌 내 가족이고 난 네 가족이야."
칸은 커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뒤 커크에게서 떨어졌다. 의외의 말과 행동에 커크는 눈을 번쩍 떴다. 칸은 이미 몸을 돌려 커크의 책상으로 향한 뒤였다.
"피곤하다면 편히 쉬도록."
칸은 커크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골라 꺼내들었다. 커크는 그런 칸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변한 그의 태도를 믿을 수가 없었지만, 동시에 믿고 싶기도 했다. 칸이 정말 자신을 가족이라 여기는 걸까? 72명의 다른 증강인간들- 그의 크루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이것을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커크는 미약하게 희망을 느꼈다. 칸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한, 5년 임무를 진행중인 엔터프라이즈에 위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사이에 칸이 손을 써둔 것을 제거하고 칸을 제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커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게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해결 방안이었다. 역으로 자신이 칸을 이용하리라.
커크는 조금이나마 안심하며 눈을 감고 누웠다. 칸이 그의 쿼터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신경쓰였지만, 달리 해결할 방법도 없었다. 커크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니 결국 자신이 해결해야 했다. 내 힘으로 해결하겠어, 커크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1편부터 강렬한 게 미드의 특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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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프라이즈는 대형 계류장에 정박해 있었다. 계류장 자체에서는 연료봉을 구할 수 없어 베르포 항성계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연료봉 운반 셔틀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스팍은 함장석에 앉아 자잘한 지시를 내렸고, 커크는 여전히 자신의 쿼터에서 숙면을 취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커크는 혼자가 아니었다.
"제임스."
칸의 손가락이 커크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커크는 자꾸 몸을 뒤척거릴 뿐, 쉽게 깨어나지 않았다. 스팍과 격렬하기 그지없는 밤을 보낸 덕분이었다. 칸이 거듭 그의 이름을 부르자 커크가 결국 비몽사몽한 채로 칸에게 대답했다.
"응……?"
"피곤한가?"
"우웅……. 피곤해……."
칸이 커크의 옆에 앉은 채로 몸을 굽혔다. 서서히 칸의 얼굴이 커크의 얼굴과 가까워졌다. 칸은 그가 귀엽다는 듯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고 커크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윽고 칸의 혀가 자신의 입 안으로 들어와 잇몸을 쓸어대는 것, 자신의 혀를 빨아들이듯 잡아당기는 것도 허용했다. 생각보다 짙고 뜨거운 키스가 이어지자 커크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서, 부지중에 칸의 팔을 붙들었다. 커크가 간신히 입을 뗐다.
"진짜, 진짜 피곤해. 스팍."
그 순간 칸이 얼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췄다. 커크가 짐짓 놀라 칸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부볐지만, 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커크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스팍…?"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스팍이 아니라 칸이었다! 커크는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고,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자신의 온몸에서 본능적으로 위험 신호가 울리고 있었다. 커크는 두 눈을 의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칸……?"
그의 목소리가 들린 즉시 칸이 커크 위로 거칠게 올라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잡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칸은 유령처럼 하얀 얼굴로 잔뜩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불쾌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났다.
"뭐라고?"
"미, 미안해."
커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사실 딱히 미안하진 않았다. 미안할 것도 없었다. 왜 미안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자신이 스팍을 부른 것이 칸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는 것 하나만큼은 커크도 분명히 알았다.
"나는 스팍인 줄 알고……."
순간 뺨에 불이 일었다. 커크는 얼얼한 볼을 감싸쥘 생각도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칸을 돌아보았다. 칸이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손을 뻗고 있었다. 커크는 되살아난 악몽에 몸을 움츠리고 질끈 눈을 감았다.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꿈이어야만 해.
커크가 예상한 것처럼 다시 그가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칸은 커크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커크는 그 통에 다시 눈을 뜨고 말았다.
"제임스 커크."
칸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도저히 이게 꿈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너무도 선명했다. 커크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저 불안하게 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같았고, 손아귀를 벌린 심연 같았다.
"내가 네 병을 고쳤지. 내가 널 우월하게 만들었어. 넌 내 피조물이고 난 네 조물주야. 너는-."
칸이 선고를 내리듯 커크와 자신에 대한 정의를 늘어놓았다. 사실을 나열하는 그의 태도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칸의 다른 손이 커크의 부어오른 뺨을 쓸었다. 부드럽게, 다시 부드럽게.
"-내 거야(Mine)."
그 한 단어에서 커크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관계 정립에 대한 미약한 기쁨과 다가올 일에 대한 가슴 저릿한 공포, 그리고 나약한 자신에 대한 절망까지.
볼을 매만지던 손이 어느새 입술에 도달했다. 칸이 강제로 그의 입을 벌렸다. 커크가 작게 숨을 뱉었다.
"흐윽."
칸은 아랑곳않고 거칠게 커크의 입 안을 더듬었다. 차마 그의 손가락을 깨물 수 없었던 커크는 입을 벌린 채 칸의 시선을 피했다. 침대 시트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다시 다른 자식의 이름이 나오도록 해봐. 어서."
커크는 절망했다.
"…자, 잘못했어……."
"해봐!"
칸이 윽박질렀다. 커크는 칸의 팔에 매달렸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커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칸이 그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다.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칸이 정강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커크는 뼈가 부러질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눈앞에 칸의 발이 보였다. 커크는 호흡을 진정하려 애썼다.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절망감에 저항해야만 했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도대체 그가 언제 어떻게 구금실에서 탈출한 것인지, 그가 왜 자신에게 집착과도 같은 감정을 갖는 것인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칸을 수틀리게 한다면 자신을 물론이고 엔터프라이즈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할 거라는 사실이었다. 커크는 동물적인 직감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날 고문했지." 칸이 운을 뗐다.
커크는 처음 듣는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매일. 한 시간씩. 마커스보다 지독했어. 적어도 그는 내 눈을 태우지는 않았거든."
"난 전혀 몰랐어…!"
칸이 커크의 얼굴을 쥐었다. 혼란이 가득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르고 푸르렀다. 그의 무죄를 주장하듯, 순결하고 투명했다. 칸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똑똑이 말했다.
"상관없어. 다시 그의 이름을 말해. 그자부터 죽여버릴 테니까."
"안 돼!"
깜짝 놀란 커크가 칸의 다리를 붙들었다. 스팍만큼은 지켜야 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떠안고 가야만 했다. 애초에 칸을 이 엔터프라이즈에 태운 것조차 자신 때문이지 않던가?
"칸. 전부 내 책임이야. 내 잘못이야. 차라리 날 죽여. 대신 아무도 죽이지 말아줘. 부탁이야-."
"'부탁'?"
순식간에 커크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릴 새도 없었다. 커크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칸은 커크의 얼굴을 바닥에 짓누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뭐든지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이제 와서 부탁이라. 그건 네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냐."
"우윽, 칸……."
"선택은 내가 해."
"제발……."
겁에 질린 커크가 몇 번이고 빌었지만,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커크의 마음속이 때늦은 절망과 후회로 가득 찼다. 이젠 정말로 되돌릴 수 없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커크는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애원했다. 답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칸은 커크의 등을 짓누르며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이미 늦었어. 내가 엔터프라이즈를 폭파시키기 전에 날 막을 방법을 찾아봐."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칸, 제발 그러지 마……."
"아아. 제임스. 생각해."
칸이 커크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커크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넌 나만큼 똑똑하잖아(You are as clever as I am)."
-
스팍은 연료봉을 얻기 위해 상대 셔틀에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행성 연방의 군부 스타플릿 소속임을 밝히고 해당 절차에 따라 연료봉을 보급받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단지 커크가 늦게까지 브릿지에 출석하지 않는 것만이 계속 신경쓰였다. 피로감이 상당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가 이렇게 늦을 이유는 아니었다. 스팍은 커크에게 찾아가는 대신 다시 PADD에 감시 영상을 불러왔다. 커크를 감시할 수는 없으니 칸을 감시해야 했다. 그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음."
여전히, 미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영상대로라면 칸은 분명 구금실에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스팍의 눈이 매 초 간격으로 영상 내의 칸을 훑었다.
스팍의 눈이 커졌다. 그는 기억력이 인간보다 월등히 좋은 편이었고 덕분에 한 번 본 것은 웬만하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칸은 몇 시간 전에 일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일어났고 정확히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들어올려진 손의 각도까지 동일했다.
이게 무슨 의미지?
스팍은 그 순간 가능한 모든 논리를 동원했다. 빠르게 결론이 나왔다. 이 영상은 가짜였다! 더 정확히는, 녹화된 영상이었다. 스팍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브릿지의 모든 크루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술루. 의자."
스팍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짧게 지시한 후 터보 리프트로 날듯이 달려갔다. 당장 구금실에 가서 확인해야 했다. 어째서 아무도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것인지, 칸이 도대체 언제 이 링크를 바꿔치기한 것인지, 스팍은 구금실로 달려가는 중에도 추론하고 또 추론했다.
"……."
스팍이 지긋이 입술을 깨물고 곧바로 몸을 돌렸다. 칸이 있던 구금실은 텅 비어 있었고, 그를 감시하던 카메라는 해킹된 뒤였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빠져나갔는지는 몰라도 브리그 베이를 지키던 보안 요원이 전혀 몰랐을 정도니, 정식 통로가 아닌 다른 경로를 선택한 것일 터였다.
스팍은 즉시 커크의 쿼터로 향했다. 칸이라는 위험한 존재가 엔터프라이즈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테러리스트가, 커크를 한 번- 아니 여러 번 위험하게 만들었던 자가, 도대체 언제부터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게 이 닫힌 작은 세계 안에 숨어들었다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 와중에도 스팍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노력했다. 겨우 화해한 커크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물론 칸의 탈옥이라는 1급 중대 상황이니 그도 이해해줄 테지만. 스팍은 커크의 쿼터로 달려가는 길에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맥코이와 마주쳤다.
"스팍?"
"아직 함장님을 방문하지 않은 건가?"
"네가 푹 쉬어야 할 것 같다며? 지금쯤은 일어났을 것 같아서 가보는 참이지."
스팍의 마음이 급속도로 불안해졌다. 아직 맥코이마저 커크를 확인하지 않았다? 커크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스팍은 맥코이에게 바로 커크에게 가라고 하지 않은 것을 짧게나마 후회했다.
"칸이 탈옥했어."
"뭐??" 맥코이가 반쯤 비명을 질렀다.
"그가 우주선을 빠져나갔다는 증거는 없으니 칸은 아직 이 안에 있겠지. 경계를 발령했다간 그를 자극하거나 크루의 불안을 가중시킬 위험이 있어서, 그에 대한 판단을 함장님께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스팍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맥코이는 불안한 얼굴로 스팍에게 물었다.
"대체 언제?"
"확실하지 않아."
이를 갈듯 스팍이 대답했다.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다시금 화가 났다. 맥코이는 발길을 돌렸다.
"메디컬 베이에서 대기할게. 어디 숨어있는지도 모르니까, 일단 이쪽만이라도 비상 경계 태세로 돌려서 샅샅이 검사하고."
스팍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나았다. 맥코이가 바쁘게 움직였다. 스팍 또한 커크의 쿼터로 향하는 걸음을 빨리했다. 칸은 지금까지 맞이했던 적들 중 가장 위험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없이 높은 지능을 가졌다. 이쪽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즉 비상 경계 발령을 통해 자신의 탈옥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인질을 취하거나 위협을 가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스팍은 절대로 견딜 수 없었다. 스팍이 서둘러 커크의 쿼터 문을 열었다.
"함장님?"
문이 열린 후, 스팍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거기에 칸이 있었다.
커크는 스팍의 강의에 드나들기 시작했어. 몇 개 없기도 했고, 순수과학 쪽이었지만, 커크는 일단 마음을 정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그래서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아는 여자들과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쪽 일원인 것처럼 있었지. 정각에 스팍이 들어오자, 커크는 아주 환한 웃음을 지었어. 스팍은 잠깐 놀랐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손을 흔드는 커크를 보고 스팍은 결국 할말을 잃고 말았어.
커크 생도는 무슨 이유로 여기 있지?
청강인데요.
지휘부가 과학부 강의를? 스팍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강의 시간에 맞춰 수업을 해야 했기에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지. 물론 커크는 강의 내내 신나게 졸았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거든. 그래도 강의가 끝날 때쯤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반짝반짝하게 떴지. 하나도 안 졸았다는 듯. 스팍은 기가 찼어.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지.
점심 시간에도 교관 식당까지 따라온 커크는 스팍의 맞은편에 앉았어. 교관 식당에서 받을 수는 없으니까 생도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서 여기까지 쫓아들어온 거야. 검은색 교관복만 가득한 교관 식당에서 붉은 생도복은 더없이 눈에 띄었지만,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스팍도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았지. 그 둘을 바라보는 교관들만이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어. 스팍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원래 벌칸은 신체적 특징상 식사를 자주 할 필요가 없어서 함께 먹는 사람도 없었지. 야채와 스프밖에 없는 스팍의 식판을 보고 커크가 한 마디 했어.
교관님. 다이어트 하십니까?
부정한다.
제 거 드릴까요?
거절한다.
외계생물학 공부나 더 하도록. 스팍은 벌칸의 특징(채식주의, 적은 양을 섭취하고도 충분히 생활 가능)에 대해 거의 모르는 커크에게 면박을 주었지. 그래도 커크는 꿋꿋이 스팍의 앞에서 밥을 다 먹었어. 아주 제멋대로였지. 예전과 다를 게 없었어. 그런데 스팍은 그게 귀찮긴 했어도 싫지는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느낀 자기 자신에게 새삼 놀라했지. 그들은 그렇게 종종 함께(?) 식사를 했어.
결국 그 장면을 목격한 교관과 몇 생도들에 의해 급속도로 소문이 퍼져나갔지. 커크가 이제 교관, 그것도 남자, 그것도 벌칸!을 따먹으려 한다는 소문이었지. 스팍은 몰랐지만 커크는 이에 꽤 흡족해했어. 본즈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울 뿐이었지.
미쳤냐? 여학생이 모자라? 하필이면 그 뾰족귀를 노리냐.
본즈. 얘기했잖아. 스팍이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라니까.
내 눈에는 니가 뾰족귀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보이거든.
아니라고!
슬슬 커크도 뭔가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지. 이 정도로 공을 들여 놨는데, 스팍이 자기한테 넘어오지 않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얼마 전에 본 생물학 책에서 벌칸의 신체적 특징을 보고는 입을 떡 벌린 커크거든.
야. 벌칸 성기가 내장형이래. 여자랑 똑같잖아!
그거 1학기 때 배운 거다. 공부를 대체 어디로 했냐.
좇으로 했던가?
임마. 스팍한테 꼬리치다가 혼쭐나지나 마.
걱정도 팔자다.
커크는 히죽 웃었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랑 자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야. 그는 쾌락주의자였기에, 자신에게 쾌락을 줄 수만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3P든 개의치 않았어. 단 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자신이 탑이라는 거였지. 그는 자신이 바텀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스팍과 하게 되더라도 무조건 자신이 탑이리라 생각했지. 물론 그 생각은 오산이었지만.
그때도 스팍의 살인적인 과제는 계속되고 있었어. 커크는 그걸 느지막히 끝내고 스팍에게 제출하러 가는 길이었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간 거야. 스팍은 그걸 지키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맨날 무엇인가를 하느라 연구실에 남들보다 오래 남아있었지만. 그러니까 커크는 노리고 간 거지. 연구실이 줄줄이 가득한 복도에 재실중 표시가 떠 있는 건 스팍의 연구실 하나였어.
교관님.
커크가 들어서자 스팍이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지. 뭔가에 집중하느라 바쁜 모양이었어.
책상 위에 두고 가.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팍에게 다가왔지.
수업 내용 중에서 질문이 있는데요.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제야 스팍이 눈을 들어 커크를 봤어. 교관이니만큼 생도들의 질문에는 최우선으로 대답해주는 게 원칙이었지. 사실 스팍은 커크가 다가올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커크가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어. 커크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에게 의도적으로 접촉해왔다는 점도 있었지. 그래서 그는 일단 물어봤어.
질문이 뭐지?
그게, 잠깐 몸 좀 빌려주셔야겠는데요.
커크가 스팍의 의자 위에 반쯤 올라탔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신체 일부가 맞닿자 스팍은 약간의 아찔함을 느꼈지. 그에게서 어렴풋이 전해져오는 감정은 무언가, 뜨거웠어. 배가 살살 간지러웠지. 커크의 눈빛이 푸르고 선명했다는 점도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어. 스팍은 그대로 커크를 떼어놓으려 했지.
제가 말입니다. 시키신 대로 생물학 공부를 했죠.
커크 생도. 불필요한 접촉은-.
벌칸은 좇이 내장형이라면서요?
커크의 손가락이 스팍의 다리 사이를 훑었어. 남자라면 거기서 뭔가 잡혀야 하는데, 없었지. 진짜네. 커크가 입맛을 다셨어. 거기서 여자처럼 애무를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스팍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잡아 책상으로 밀었지. 커크가 뭐라 말할 새도 없었어. 쾅, 하고 책상과 거칠게 부딪힌 허리가 무척이나 아팠지. 커크는 끙끙대며 변명을 덧붙였지.
그러니까, 제 말은, 그걸 실제로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요.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어. 커크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 그와의 접촉 정도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그가 빌어먹게도 먼저 자극해온 거야. 커크가 자신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중임을 몰랐던 스팍은 멍청하고 장난기 넘치는 커크가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스팍도 그 즈음에는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어. 커크가 자신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반쯤 장난으로 대하고 있음을.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그가 즐기고 있음을. 문제는 스팍이 그런 것에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서 그저 어린애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곤 했던거야. 딱히 일에 방해가 될 정도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는 그 이상 갈 정도도 아니었고, 가서도 안 되었던 거야. 스팍의 판단으로는. 스팍은 커크가 자신과 섹스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는 커크를 당장 뒤로 돌려 세우고 싶은 마음을 참았지.
커크는 스팍의 침묵으로 그가 고민하고 있음을 간파했어. 하지만 그는, 스팍이 자신과 섹스하고 싶은데, 그것을 벌칸으로서 감정을 참는 수준으로만 여겼지. 그런 여자들이 종종 있었거든. 자신과 자고는 싶은데 여러 이유로 빼는 여자들. 그래도 결국은 모두가 넘어왔지. 커크는 알았어. 게다가 그런 것에 자신이 있었고 스스로도 재능이 있다고 여겼지.
커크는 책상 위에 반쯤 누운 채로 손을 뻗었어. 스팍의 볼을 쓰다듬고,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스팍에게 속삭였지.
보여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직접 볼까요?
과한 장난은 삼가도록. 이제 나가.
스팍이 딱딱하게 대답하고 그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어. 커크가 그를 그렇게 놔둘리가 없었지. 커크는 그대로 스팍의 교관복 멱살을 쥐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어. 얼굴이 가까워져 코가 스쳤지. 커크는 그와 이마를 맞댄 채목소리를 깔고 허세를 부렸지.
누가 장난이랍니까? 진심입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스팍의 앙다문 입술을 핥았어. 뜨거운 숨이 스팍의 얼굴을 어루만졌지. 스팍은 커크를 똑바로 노려보았어. 어렵지도 않았지. 그들의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의 거리는 5cm도 채 안되었거든. 커크 또한 뇌쇄적인 눈길을 보냈는데, 제딴에는 섹시한 눈빛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팍에게는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 스팍은 이를 악물었지.
더티블러드 1부 퇴고는 다했는데 2부 퇴고가 남아있ㄴㅔ...?^^ 그런데 왜 저는 새 썰을 쓰고 있는 걸까요
그냥 달달하고 설레는 요망 잔망 앙큼한 커크가 보고 싶습니다
스팍커크 live long and prosfuck
그 날의 격투술 훈련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일대일 대련이었어) 이후 스팍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어. 커크가 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스팍이 그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차츰 늘어났지. 마치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커크는 눈치가 빨랐기에 그런 스팍의 변화를 알아차렸어. 그는 과거를 비롯해서 현재도 애정결핍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기에, 감정의 레이더에 아주 민감했지. 특히 자신을 향한 거라면 더더욱.
오늘도 그랬어. 스팍은 자신을 바닥에 눕힌 뒤에도 그의 잘못을 느리게 지적하며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어. 그를 제압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 그리고 사실 그 말이 맞았어. 스팍은 커크와 접촉하는 순간 동안 그로부터 빨아들이듯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에 거의 중독되어 있었지. 벌칸들 간의 접촉에는 그런 게 없었어. 마치 차가운 로봇이나 기계와 대화하는 양, 견고한 유리벽에 세워져 있는 양, 생각의 교류는 오가도 감정은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거든. 하지만 커크는 달랐어. 생동감 넘치는 그의 생명력이 느껴졌지.
그것은 어머니와도 비슷했어. 스팍은 자라는 내내 벌칸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사이에서 늘 경계선 위를 걸었거든. 결국은 벌칸을 선택하고 말았지만 말야. 그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어. 사실 그는 늘 자신은 인간인지 벌칸인지 고민했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벌칸이었고, 아버지 또한 벌칸이었지. 그가 누구보다 벌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어. 그는 완벽한 벌칸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그를 쉬쉬했거든. 그래서 그는 더 노력했지. 하지만 어머니는 그들과 달랐어. 스팍이 굳이 벌칸과 인간 중에서 고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었지. 스팍은 스팍이라고. 벌칸이면서 인간, 둘 다라고. 그게 더 사랑스럽다고.
어쨌든, 스팍은 커크와 접촉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부분이 그에게 감화되고 있는 것을 알았어. 반쪽의 벌칸은 자신의 행동이 다소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음을 일찍부터 감지했지. 하지만 그는 이건 모두 커크의 격투 기술을 위한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어. 물론 구실이었지. 스팍은 벌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자신이 '커크에게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커크는 스팍의 눈빛을 통해 그가 자신을 상당히 복잡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것이 벌칸에게는 일어나기 힘든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지. 커크는 타인이 자신을 보는 선망 혹은 욕망의 시선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거든. 커크는 벌칸으로부터 그런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고, 자신감이 충만해졌지. 이야, 벌칸, 그것도 벌칸 남자를 홀리는 내 매력이란! 이럼서. 결국 그때부터 커크의 장난기가 발동되고 말았어.
커크는 모두가 아다시피 카사노바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치고 빠지는 것을 잘 했기 때문이었지. 밀당이라고 해야 좋을까? 옴므 파탈이라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한 번 찍은 상대를 공략하는 것을 즐겼고, 그가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장난을 쳤지. 그와 하룻밤을 자게 되면 그제야 그의 목적이 달성되는 거였어. 물론 한 번 잔 상대와 다시 자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커크는 모든 여자에게 꽤나 살갑고 다정해서 함께 잤다고 해서 그 관계가 와장창 깨지는 일은 없었지. 여자들은 그의 엉덩이가 가볍다는 것을 알았지만,그와 가깝다는 것이 삶에 해가 되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관계를 유지했어.
그러니까 커크의 모든 관계의 목적은 섹스 외에는 별 거 없었다는 얘기야. 그는 감정 따위로 정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어. 감정은 그에게 애들 장난에 불과했지. 그래서 커크는 스팍이 자신에게 다소 감정이 있음을 확인한 순간 그것을 즐기기로 했어.
교관님.
질문이라도?
이번에는 제가 적이라고 상정하고, 교관님께서 막아보시죠.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훈련이었지. 하지만 커크가 싱글싱글 웃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어. 스팍은 커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오케이를 했어. 결과는 평소와 같았지. 스팍의 팔을 세 번 정도 막아낸 게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달까. 커크는 헉헉대며 스팍의 발치에 쓰러졌어. 스팍은 그런 그를 가만히 주시했지. 커크가 투덜거렸어.
좀 일으켜주면 지문이 닳는답니까?
스팍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지. 평소라면 그런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커크였기에 가능했어. 그리고 그랬기에 스팍은 그대로 커크의 수에 넘어가고 말았지. 커크는 스팍의 손을 잡자마자 자기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어. 방심한 스팍은 그대로 커크의 위에 쓰러졌지. 커크는 스팍을 껴안고 킬킬 웃었어.
적에게 손을 뻗으면 안 되죠. 교관님.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리듯 말하는 커크였어.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스팍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 하지만 커크가 슬슬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었어. 스팍의 움직임이 즉시 멈췄지.
지금 뭐하는 거지, 커크 생도?
미인계요.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의 커크는 도저히 혼을 낼 수도 없게 웃고 있었어. 커크의 손이 스팍의 허리에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서서히 올라왔지. 한 손은 그의 상의를 들추려 하고 있었어. 스팍은 그의 손길에 거의 전율을 느끼고 그를 밀어냈지. 커크는 순순히 밀려났어. 두 손을 든 채로 항복한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
그런 전술을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그래요?
커크는 능글맞게 웃었어. 그 끈적한 웃음에 스팍은 대화의 주도권을 그에게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지. 차라리 반항하거나 도망다닐 때가 나았어. 스팍은 커크의 이 변화가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또 무엇을 위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 자신이 커크의 공략 상대로 찍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스팍이었어.
날이 갈수록 커크의 노골적인 태도가 분명해졌지. 스팍을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오게 하려는, 커크의 장난 아닌 장난이 가속화됐어. 누가 봐도 커크가 스팍에게 작업을 걸고 있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지. 이에는 전혀 감정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스팍을 곯려주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당사자인 스팍은 영문을 모르고 당황스러울 뿐이었어.
커크는 과제를 제출하거나 그에게 지시를 받을 때도 굳이 스팍의 가까이에 와서는 접촉을 했지. 말 그대로 몸을 부대꼈어. 대련할 때는 더했고. 스팍의 귀를 쓸거나 허벅지를 만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지. 스팍이 잔소리를 해도 그때뿐이었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살살 웃으면 끝이었지. 게다가 모두가 꺼려하는 스팍 곁에 딱 붙어서는 '교관님!'하면서 살갑게 구는 게 여우같은 소녀들 못지 않아서, 스타플릿의 생도들 입을 떡 벌어지게 했어. 물론 커크를 알만큼 아는 생도들은 저것도 일련의 장난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스팍은, 커크가 그렇게 구니까 상당히 놀랐어. 저도 모르게 커크와의 접촉을 즐기긴 했어도 커크가 먼저 다가오니까 그것을 전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야. 혹시 자신의 감정을 들킨건가 싶기도 했지. 결국 스팍은 마음을 정했어. 스팍은 커크에게 그 이상 감정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어.
오늘로 격투술 훈련은 끝이다.
커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 스팍이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왜요?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만큼 진전이 있었으니까.
스팍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그대로 몸을 돌렸지. 커크는 당황했어. 이게 뭐지?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패턴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커크가 눈살을 찌푸렸어. 이대로 스팍에 대한 장난을 끝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정말 나에게 마음이 있기는 했던 건가? 커크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지.
교관님!
커크는 스팍에게 쪼르르 달려갔어. 스팍은 마지못해 돌아섰지. 그는 커크와의 접촉을 갈구하게 될까봐 두려웠어. 그리고 그동안 커크가 살갑게 굴었던 것에 자신도 모르게 적응한 상태였지. 그래서 스팍은 커크에게 더 마음을 두지 않으려 했어. 감정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벌칸에게 가장 큰 독이 되니까.
무슨 일이지?
커크는 스팍을 불러놓고도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긁적였어. 일단 그를 멈춰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막상 그를 세워놓고 보니 딱히 할 말이 없는 거야. 뭐라도 말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어. 빌어먹을, 커크는 답답했어.
용건이 없으면 가보지.
냉정하게 몸을 돌리는 스팍이었어. 커크는 그 모습에 더 상처를 받았지. 망할, 자신을 끈덕지게 쳐다볼 땐 언제고 훈련이 끝나니까 그대로 내빼? 커크의 복수심이 불타올랐어. 우선 스팍이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어야 했어. 그리고 신나게 뻥뻥 차는 거지. 커크는 그렇게 스팍을 꼬실 계획을 세웠어.
-그를 발견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술집이었지. 스팍은 주의깊게 커크를 살폈어. 아무리 외출 중이라 해도 신분이 생도인 이상 문제에 휘말리면 그대로 영창행이야. 스타플릿 아카데미는 사관학교였고 소속 학생들은 군인 겸 학생이기 때문이지. 커크도 그런 사실 정도는 본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조심해도 달려오는 자동차는 피할 수 없듯이, 이상한 놈들이 꼬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 커크가 금발에 이쁘장하게 생긴 탓도 있지만 혼자 있는 이상 쉬운 표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거야. 커크도 그걸 알아서 본즈가 없으면 나오지를 않았어. 그런데 본즈는 실습 때문에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연이어 계속되는 스팍의 압박으로 커크는 매우 술이 고팠어. 그러니까 어쩌면, 커크가 그런 사고를 당하게 된 건 스팍 탓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거야.
혼자 술을 퍼마시던 커크에게 남자 하나가 다가갔지. 스팍은 그게 커크의 동료인지 낯선 사람인지 알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커크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 커크가 꺼지라는 듯 그를 향해 셋째 손가락을 날리는 것을 보고 추측을 할 뿐이었지. 그 남자는 커크에게 욕을 먹고서 그 자리를 떠나려는 제스처를 취했어. 커크도 다시 술에 집중했지.
아니, 하려고 했지. 그 남자가 갑자기 덤벼들어 커크를 때려눕히기 전까지는. 술집에서는 흔하디 흔한 싸움판이 벌어졌지. 단지 커크가 그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그 남자는 커크에게 주먹질을 했지만, 커크는 그저 막거나 피할 뿐이었어. 커크도 알고 있었거든. 생도로써 일반인과 싸움이 벌어지면, 책임은 생도에게 귀속돼. 일반인을 때리면 그대로 영창행이지. 정당방위고 뭐고 없어. 생명을 위협당하는 정도만 아니면 군인은 폭력을 휘두를 수가 없어. 파이크와 본즈가 커크에게 명심하라고 외출할 때마다 말하곤 했기에 그도 기억하고 있었지.
스팍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내심 놀랐어. 완전 멍청이는 아니었군. 하면서. 하지만 한참을 맞기만 하니까 커크 성정에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뭐라 한 마디 하니까 커크가 도끼눈을 뜨고 덤벼들어. 그의 턱에 단 한 번 주먹을 날렸을 뿐인데, 구석에 있던 네 다섯명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다가와. 그의 동료였던 모양이지. 커크도 슬슬 눈치를 살펴. 이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하지만 한 걸음 걷기도 전에 그들이 와서 커크를 붙잡아. 더 큰 싸움판이 벌어져. 스팍은 그 시점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스타플릿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잠깐 시선을 떼고 말아.
커크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잠시 후에 축 늘어진 커크를 끌고 그들이 나가. 그게 목적이었던 모양이야. 통화를 끊은 스팍은 술집 주인에게 물어 그들을 쫓아가지. 길이 음침한 공터로 통하는 걸 보고 스팍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해. 그가 서둘러 갔을 때, 이미 커크는 그들에게 붙잡혀서 바지가 벗겨진 채였어.
스팍은 즉시 그 자리에 끼어들어 그들을 정리하지. 일단 커크는 학생이었고, 교관은 생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을 의무가 있었어.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었지. 그가 벌칸이라는 것은 외형만 보고도 모두가 알았으니까. 스팍이 그들을 논리적인 말로 위협하자 다들 설설 기면서 꽁무니를 빼. 한 대 맞은 남자도 도망치지.
커크는 바닥에서 바르작대다가 몸을 일으켜. 그리고 스팍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지. 스팍 또한 그에게 그 이상 손댈 마음은 없었어. 커크는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일어나서, 한 마디 툭 던져.
과제 때문에 쫓아왔습니까?
긍정하지.
하, 고마워 죽겠네.
커크는 감사인지 욕설인지 모를 것을 투덜거리자 스팍이 덧붙이지.
오늘 내가 목격한 사건을 보고하면 생도는 외출시 규정을 어긴 것으로 처리되어 7일간 영창에 가야 해.
그래서 보고하실 겁니까?
스팍은 대답하지 않아. 대신 딴 소리를 하지.
생도는 격투술에도 소질이 없는 것 같더군.
어쩌라고요.
내가 내주는 과제에 추가로 격투술 훈련을 받는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커크가 멍하니 스팍을 쳐다봐. 스팍은 커크가 함장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점 대신 그를 잘 교육시키면 제대로 된 함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에 집중하기로 하지. 아이돌을 키우는 매니저처럼 말야. 어차피 지휘부에 있는 이상 함장이 되는 게 기정 사실이라면 특별 훈련을 통해 그를 함장답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일 거였어. 스팍은 생각을 끝내고 그에게 선고하듯 지시하지.
매일 1800시, 체육관으로 오도록.
이런 미친? 커크는 울고 싶었어. 그 비인간적인 과제도 계속되는 데다가 저 고블린 새끼랑 하루에 몇 시간씩 부대끼며 훈련까지 해야 돼. 하루의 반 이상을 저 스팍에게 소모하는 꼴이었지. 하지만 훈련을 거절한다면? 영창에 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 영창에 가면 수업도 못 들어서 낙제를 할 거고, 군적에도 남겠지. 그럼 함장이 되기는커녕 브릿지에도 못 가고 지상직에 머무를 거야. 파이크도 실망하겠지. 결국 커크는 울며 겨자먹기로 스팍의 명령을 받아들여.
커크가 본즈에게 스팍에 대한 욕을 늘어놓는 날이 늘어났어. 사실은 매일. 본즈를 볼 때마다 스팍 욕을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거야.
내가 도대체 언제 찍힌 걸까? 생각해봐. 본즈. 그 자식은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야 머저리야. 이 스타플릿의 절반이 네 안티거든.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나 실습있어서 가본다. 내일 봐.
본즈에게 욕을 해도 달라질 건 없었지. 커크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체육관으로 가.
격투술 훈련은, 엄밀히 말하면 정규 수업 과정인 격투술과는 또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었지. 스팍과 일대일로 진행했으니까. 보통은 커크가 덤비면 스팍이 제압하는 식이었어. 그렇게 상대방의 급소나 제압 방법을 가르쳐주곤 했지.
오늘은 내가 적이라고 상정하고 막아봐.
커크는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에게 대들거나 투덜거렸다간 과제가 늘어날지도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 결국 하얀 매트 위에 나란히 서서 훈련을 시작했어. 커크는 스팍이 덤비면 어떤 방법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 그런데 씨발, 힘이 3배나 센 놈을 무슨 수로 제압해. 절로 욕이 나왔지.
준비됐나?
스팍이 그에게 묻자마자, 커크가 입을 열었어.
교관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질문해.
벌칸도 약점이 있기는 있습니까?
스스로 찾아보길 바라지.
스팍의 대답에 커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체육관 문을 가리켜.
어? 파이크 교관님!
스팍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어. 아무도 없었지. 아니, 이런 고전적이고 약은 수를 쓰다니...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커크가 뒤에서 자신에게 덤벼드는 게 느껴졌지. 스팍이 팔을 휘둘렀지만 커크는 날래게 몸을 빼고 그에게 다리를 걸어 그대로 바닥에 눕혔지. 커크는 스팍 위에 엎드린 채 싱글 웃었어.
잘 했죠?
커크 생도.
예?
그 순간 스팍이 그의 팔을 잡고 몸을 세게 밀었어. 그 기세에 몸이 그대로 돌아갔지. 커크는 비명도 못 지르고 뒤집혔지.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지. 있는 힘껏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스팍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에 그것도 안 됐어.
잘못한 점을 짚어주지. 첫 번째. 나는 그런 교란 방식을 가르치지 않았어.
예...?
두 번째.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해.
.......
세 번째....
스팍은 거기서 말을 멈추었지. 커크는 잔뜩 주눅든 채로 스팍을 올려다보았어. 스팍의 표정은 하얗고 무감정했지. 하지만 접촉하고 있는 커크의 피부에서 그의 감정, 혹은 생각이 밀려들어오고 있었어. 스팍은 그것에 중독된 듯, 멈출 수가 없었지. 커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스팍의 눈치를 살폈어. 스팍은 가까스로 말을 마무리했지.
분위기는 스팍이 몰래 커크를 눈여겨보고 있는 스토커적 느낌?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팍은 조지 커크에 대해 그를 바람직한 함장으로서의 모델이라 생각하지. 그래서 과학 장교라서 본인은 테스트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지휘부를 위해 그 테스트를 제작했던 거야. 그리고 그 아들인 제임스 커크가 스타플릿에 들어왔다는 소식도 아마 제일 먼저 알았을 거야.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언제나 실망스러웠지.
청문회 장면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커크는 그때 스팍을 처음 봐. 하지만 스팍은 그가 스타플릿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어. 그가 스타플릿에서 수없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파이크가 두둔해주었지만, 스팍은 점점 커크가 아니꼬와져. 아버지의 명성과는 전혀 달랐던 거야.
사실 커크도 나름대로 고생을 겪었어. 이 부분은 되게 해리포터 같은데, 해리가 아버지의 후광이랄까, 과거랄까,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유명세를 타잖아? 커크도 아마 그랬을 거 같아. 겉으로는 개의치 않은 척 했어도 속으로 신경이 쓰였을 거라고. 그래서 더 삐딱선을 탔을지도 몰라. 난 조지 커크가 아냐. 난 그런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그건 내 아버지고, 난 나야. 난 제임스 커크라고. 심지어 그 인간은 날 한 번 안아준 적도 없어.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함장석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또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 조지 커크에 의해 살아난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은 그를 거의 영웅시해. 행성 연방에서 그날을 페더레이션 데이(연방의 날)로 지정하고 기념일화한 것도 한몫했지. 그날은 거의 축제의 날이야. 동시에 커크에게는 생일이고, 아버지가 죽은 날이야. 그 모든 걸 감당하는 건 본인의 몫이었어. 아무리 사람들이 아버지를 칭송해도 본인에게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이미 결정되어 버린거든. 커크는 솔직히 자신이 그 상황에 있었다면 자식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지만. 그래서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도 해킹한 거고. 불리한 상황 따위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이상 용납할 수 없는 거야. 태어날 때 한 번 겪은 것으로 족해.
더 웃긴 건 커크는 빌어먹게 똑똑해. 이것도 해리랑 비슷한가? 그래서 다른 교관이나 생도들도 커크가 스타플릿을 종횡무진하고 다녀도 뭐라 말을 못 하는 거야. 커크에게는 두 종류의 팬이 생겼지. 자신의 이름만 대도 꺅꺅대면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자 하는 여생도들과, 그의 카사노바적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는 안티팬들. 물론 스팍은 후자였어.
그런데 스팍은 날이 가면 갈수록 커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교관들이 종합 평가를 할 때면 스팍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에서 커크에게 논리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태도 평가에서는 언제나 최하점을 줬어. 커크는 개의치 않았지. 성적 따위에 신경쓰기에는 사는 게 바빴거든. 본즈도 자기 일 때문에 바빴고. 스팍은 커크가 함장이 되기에는 어딘가 결점이 있다고 생각했어. 분명했지. 저 상태로 함교에 들어갔다간 함선을 말아먹고 말거야. 그건 논리적인 판단이었지.
zip zip하고 스팍이 커크를 불러냈어. 그의 연구실에 들어온 커크는 삐딱하게 서 있었지. 붉은 생도복은 스팍의 검은 교관복처럼 각이 잡혀있진 않았지만 단정했어. 본즈의 솜씨였지.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어.
커크 생도. 당신의 태도에 대해서 몇 번이나 지적이 들어왔다. 시정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나?
커크는 귀를 후비적거렸지. 스팍은 그 불성실한 태도에 신경이 쓰였어. 도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입밖에 내는 말 또한 그랬지. 커크의 반항기가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말투는 스팍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어. 스팍은 커크를 제대로 교육시키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미 파이크의 허락을 맡은 뒤였지. 스팍이 뒷짐을 진 채 위압적으로 노려봤지만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보통 스팍이 그렇게 나오면 꼬리를 말곤 하는데, 커크는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를 일이었지. 스팍은 그에게 산더미의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어.
이후 '뾰족귀 개새끼'는 커크의 말버릇이 되었지. 그가 내준 과제를 하느라 여자들과 놀러나갈 시간도 없었어. 스팍은 네가 그렇게 잘났다면 어디 3일만에 이걸 다 해봐라, 라는 식으로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커크는 그걸 이틀만에 해갔지. 그러면 스팍은 그것보다 더 많은 과제를 내줬어. 커크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만약 그 과제를 해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사고쳤던 모든 것을 통틀어 처벌당할 게 뻔했어. 낙제를 하거나 정학을 먹을 게 뻔했지. 하지만 스팍이 세번째로 과제를 내주었을 때, 커크는 그것을 받으면서 이미 때려치겠다고 결심을 한 뒤였지. 처벌할 테면 처벌해봐라, 라는 심정이었어.
이틀 뒤에도 사흘 뒤에도 소식이 없자 스팍이 커크를 호출했어. 커크는 내심 찔렸지만 호기롭게 스팍의 연구실에 들어갔지. 스팍 또한 커크가 결국은 자신의 과제를 포기할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건 구실에 불과했지. 그가 자신에게 책잡힐 구실. 담당 교수가 아님에도 논리적으로 그를 처벌할 수 있는 이유.
과제는?
안 했습니다.
커크의 그런 당당함에는 사실 스팍도 약간 놀랐어. 하지만 지지 않고 맞받아쳤지.
사유는?
없습니다.
결국 스팍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어. 이거 뭐 어쩌자는 거야. 잘못해놓고 뭐 저리 당당해.
제임스 T. 커크. 생도는 과제를 수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완수하지 않았다. 한 번 경고를 주지. 이틀 뒤까지 과제를 제출하도록.
커크가 발끈하며 대들었어. 왜 자신만 이렇게 괴롭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
왜입니까? 이딴 과제가 뭐가 도움이 된다고!
'이딴'? 그 사고방식을 고쳐주려는 거다. 제임스 커크. 생도는 함장으로서 매우 적합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태도를 소유하고 있어. 지휘 체계에 혼란을 줄 가능성이 높지.
스팍의 말에 커크도 지지 않고 소리쳤어.
거짓말 마시죠. 그냥 제가 싫은 거 아닙니까?
난 생도에게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아.
웃기지 마.
커크의 대답이 짧아졌지. 스팍 또한 눈썹을 세웠어. 커크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멱살을 쥐려했지. 스팍은 그대로 그의 팔을 돌려 제압했어. 스팍이 그렇게 힘이 세리라고 생각치 못했던 커크는 깜짝 놀랐지.
빠져나가봐.
스팍의 도발에 커크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 없었어. 그제서야 외계생물학 시간에 배운 벌칸의 종족 특징이 기억났지. 인간보다 힘이 세 배는 세다고 했던가. 커크는 포기하지 않았어. 그래서 스팍은 그가 더 미련하다고 생각했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는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행동을 했어야 해. 힘이 아닌 지능, 대화, 타협 등으로.
놔...!
커크가 이를 갈자 스팍이 뒤로 꺾은 팔을 더 세게 잡아당겼지. 어깨가 빠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어. 스팍은 비명을 참고 있는 커크에게 대고 분명하게 말해주었지.
네가 함장이고, 내가 적이라고 간주해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거지?
아예 이런 상황이 오지 않게 만들거야...
그건 정답이 아냐. 커크 생도. 전술 평가에서 어떻게 만점을 받은 건지 의문이군.
커크는 교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욕설을 내뱉었어. 스팍이 그대로 그를 넘겨 바닥에 눕혔지. 벌칸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인 touch-telepathy 때문에 커크의 분노와 억하심정 등등이 자신에게도 그대로 느껴졌어. 스팍은 거기서 자제해야한다고 생각했지. 스팍은 그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과제를 주었는데, 여느 때보다도 많은 과제였어. 인간이 이틀내에 하기에는 무리인 과제였지. 스팍은 커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리부터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았어.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지.
다 했다고?
해오라고 하셨으니까.
이틀 뒤 다시 그의 연구실에서, 커크는 다시 그 앞에 섰어. 스팍은 적어도 커크가 노력하다 정 안되면 하던 것만이라도 들고 올 줄 알았지.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도 그렇고, 그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보려던 거지 정말 그 과제를 해내오길 기대하는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커크는 진짜 해온거야. 스팍은 믿을 수 없었지. 커크가 나가고 과제를 검사하던 중에 스팍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
이 과제가 그가 혼자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지. 역시 커크, 그럼 그렇지, 주변 친구들을 동원해서 과제를 한 거야. 밥을 사줬든지 돈을 줬든지 어떻게든지 해온거야. 스팍은 커크가 홀로 이 과제를 하며 성장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이 결과는 또 자신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지.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빈손으로 왔어도 화가 났긴 했겠지만.
커크는 또다시 호출당했어. 그도 짜증이 났어. 왜 자신만 그런 불합리한 과제를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또 그 빌어먹을 자식과 대화해야 하는지. 커크는 호출을 무시하고 외출해버렸어. 나중에 그것에 대해 추궁받으면 몸이 안 좋았다느니 못 들었다느니 변명할 생각이었지. 안 들키면 되잖아. 안 들키면. 커크는 여전히 그놈의 사고방식을 못 버린 거였지.
그렇게 24시간 이상 커크의 행방이 묘연해졌어. 마치 그대로 도망친 것 같았지. 스팍은 그렇게 생각했어. 자신이 추궁하려는 것을 알고 미리 몸을 피한 것이라고. 하지만 무조건 위험을 회피하는 태도 또한 함장으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냐. 스팍은 결국 그를 찾아나섰어. 그를 발견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술집이었지.
겁에 질린 커크가 몇 번이고 빌었지만,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커크의 마음속이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젠 정말로 되돌릴 수 없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다 잘못했어, 커크는 소용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애원했다. 답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칸은 커크의 등을 짓누르며 그의 간청을 무시했다.
이미 늦었어. 내가 엔터프라이즈를 폭파시키기 전에 날 막을 방법을 찾아.
난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칸, 제발. 그러지 마…….
아아. 제임스. 생각해.
칸이 커크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커크의 숨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ㅡ넌 나만큼 똑똑하잖아.
(You are as clever as I am.)
함장님, 위험합니다. 물러서십시오.
아냐. 스팍.
커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스팍은 페이저를 세게 쥐었다. 커크 때문에 칸을 조준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물러서야 할 건 너야.
스팍은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함장님. 왜 제게 페이저를 겨누시는 겁니까?
(Captain. Why are you taking aim at me with a phaser?)
스팍. 너 또 날 감시했어? 본드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때까지도 스팍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커크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고. 자신이 그를 이해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이해하리라고. 몇 번이고 부딪치고 싸웠지만, 결국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벌칸으로서 논리와 이성을 신봉하는 만큼, 스팍은 제임스 T. 커크를 믿었다.
본드 끊어.
아니, 믿었었다. 그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스팍이 끝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커크의 얼굴은 여전히 섬뜩하리만치 희푸르고 평온했다. 그 무신경한 모습에 더 분노라는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커크가 이럴 리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커크가 아니었다. 스팍은 거칠게 항변했다.
지금 그 의미를 인지하고 발화하는 중입니까? 본드는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짐, 저는 벌칸에 대한 당신의 이해력을 의심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