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코이가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커크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중이었다. 스팍은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너...! 

커크는 책을 덮고 그것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맥코이는 찬찬히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를 떠올리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스팍 그 망할 자식이! 

맥코이의 욕설이 이어지자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맥코이는 스팍의 외모와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대해 긴 불평을 늘어놓았고 커크는 묵묵히 앉아 그것을 들어주었다. 난 정말 그놈이 싫다, 라는 그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래. 

맥아리없는 반응에 맥코이 또한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맥코이는 다시 안대를 착용한 커크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있었던 일로 미루어 볼 때, 안대를 억지로 벗기는 것조차 그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나? 맥코이는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다시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커크가 아닌, '그'와. 

하지만 맥코이는 자신을 대하는 커크의 태도에서 미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강요한다면 커크는 더더욱 자신과 멀어질 것임을, 맥코이는 일종의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저 안대 뒤에 가려진 진실은 영원히 묻어두어야만 하는 걸까. 스팍의 말대로. 절반쯤 체념한 맥코이가 푸념조로 말을 건넸다. 

짐. 
왜, 본즈? 
그는 이제 어디에 있어? 

'그'가 스팍을 지칭하는지, 이전의 커크를 지칭하는지, 혹은 지금의 커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일종의 레너드 맥코이식 비꼬기였다. 커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스팍은 내일 아침에 올 거야. 

스팍이라고? 맥코이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표시했다. 

나를 그렇게 내쫓고 싶어하더니, 어째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커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스팍이 그를 여기 두고 간 것도 이상했다. 맥코이를 위험 요인으로 여겨 병원 밖으로 던져버린다면 또 몰라도, 단둘이 남겨두었다고? 맥코이는 스팍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팔짱을 꼈다. 

스타플릿에서 급한 호출이 오기라도 했나. 
아니. 내가 부탁했어. 
뭐? 맥코이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동기와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을 달라고 했어. 물어볼 것도 있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스팍을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맥코이는 이제 숫제 입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커크가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예전의 백지와 같았던 커크를 기억하는 맥코이로서는, 그가 사실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전의 제임스 커크도 커크를 닮은 사람도 아닌 또다른 누군가. 덕분에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분노는 뒤늦게 찾아왔다. 


그 자식을 욕하고 말고는 내 맘이야. 꼬맹이. 

하지만-

물어볼 건 또 뭔데? 맥코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게, 커크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옛날 기억이 잘 안 나서. 혹시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다면 말해줘. 부탁할게. 

맥코이는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겹겹이 쌓인 표정으로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커크의 말투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커크를 연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달라'는 것이었다. 거짓말도 연기력도 참 빠르게 느는구나. 누구처럼. 맥코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커크에게, 그리고 스팍에게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맥코이가 커크에게 순순히 입을 열 리 만무했다.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지? 
본즈. 우린 친구잖아. 

맥코이는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우스웠다. 그의 연기도 우스웠고,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자신도 우스웠다. 그냥 이 허접하고 어처구니없고 쓰레기 같은 현실의 모든 게 우스웠다. 맥코이는 비웃음 조로 반문했다. 


친구라고? 오. '제임스 커크.' 우린 친구였던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커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맥코이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는 침대를 짚고 항변했다. 

우리는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 기숙사도 같이 썼고, 수업도 같이 듣고, 식사도 같이 했잖아. 엔터프라이즈에서의 첫 항해에도 함께 올랐고 5년 임무도 함께 떠났어. 우리가 친구가 아니면 뭐야? 


악연이겠지, 맥코이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보고서만 훑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스팍이 아무리 저가 가진 지식들을 전달했어도, 맥코이와 커크가 함께했던 그 몇 년 간의 시간들을 모두 재현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맥코이는 완연히 비꼬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우리가 한 일 기억해? 처음으로 외박한 날은? 페더레이션 데이에 우리가 어딜 갔는지는 알아? 
나- 나는 기억이 안 나서.... 
웃기지 마. 당연히 기억도 없겠지. 

맥코이가 커크를 노려보았다. 그 강렬한 눈빛에 이제는 되려 커크가 시선을 피했다. 맥코이는 반쯤 통쾌한 기분을 맛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왜냐하면 넌 제임스 커크가 아니니까. 

입을 벌리고 무언가 대답하려던 커크는 그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꺼질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르쳐 줘. 
싫어. 
가르쳐 줘. 
귀가 잘 안 들려? '싫어'. 

커크는 침대 시트를 세게 쥐었다. 맥코이는 배를 째라는 심정으로 뻗대고 있었다. 커크의 반응을 보건대 이건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커크는 자신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강제로 취할 수도 없었다. 칼자루를 쥔 것은 자신이었다. 맥코이는 빈정거렸다. 


네가 정말 커크라면, 여기 처박혀 있을 시간에 의사나 간호사 한 명이라도 더 꼬셨어야지. 아. 벌써 침대로 끌어들인지 오래야? 몇 명쯤? 아니면 스팍이랑 '또' 잤어? 그래서 감싸주는 건가? 대답해봐.

맥코이의 눈이 경멸의 빛을 띠었다. 

어서.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




정말로 그때 뭘 했니 너네들은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