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정너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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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정해진 시간보다 빠르게 퇴근했다. 응급 수술만 급하게 처리하고, 잡혀있던 다른 수술은 동료 의사에게 떠넘기고 나온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맥코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현관문에 들어섰다. 

다녀오셨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커크가 그를 맞이했다. 표정없는 얼굴도 여전했다. 맥코이는 나지막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커크가 시계를 보고는 다시 물었다. 


저녁 준비할까요? 

아니. 됐어. 


건조한 대답에 커크 또한 미심쩍은 기류를 감지한듯 입을 다물었다. 맥코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해석해야 하는지, 또는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통해 스팍과 커크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스팍이 나가는 짧은 광경만을 보았다. 커크가 스팍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스팍 또한 평온하게 자신의 집 안에 들어왔다는 것, 그 모든 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싶은 말은 입 안 가득 차 있음에도 나오는 건 메마른 한숨뿐이었다. 커크는 대화가 끊어지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랜만의 어색한 침묵에 맥코이의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손에 배어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맥코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오늘 별일 없었어? 

직접 말할 수도 있었다. 대놓고 아까 일을 추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팍에 대해 아는 체하며 묻는다면 (감시 카메라는 영상만 비출 뿐 음성 데이터는 녹음하지 않는 종류였다) 자신이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꼴이었고, 맥코이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내심은 커크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하여. 

아무 일 없었어요. 

담담한 대답에 맥코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거짓말. 스팍이 왔었잖아. 둘이 이야기까지 했잖아. 혀끝까지 내달렸던 문장이 도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맥코이는 끝까지 커크를 믿고 싶었다. 맥코이가 마지막으로 한숨쉬듯 내뱉었다. 


정말로 아무런 특별한 일 없었어? 

커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검은 눈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연푸른 눈동자는 잠깐 맥코이의 시선을 피했다. 

...없었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맥코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커크는 제자리에서 손톱을 물어뜯다가 방으로 향하는 맥코이의 옆에 달라붙었다. 

도와드릴게요. 


커크가 맥코이의 겉옷에 손을 댔다. 맥코이는 날카로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커크는 더 안절부절 못하며 맥코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커크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음에도, 맥코이는 신기하다는 생각보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팍에 대해서.

커크는 주인 눈치를 보는 애완견처럼 맥코이의 방문을 서성댔다. 뭔가 켕기는 거라면, 거짓말을 안 하면 되잖아. 맥코이는 도무지 커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커크는 벽을 긁으며 맥코이의 관심을 끌려 노력하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결국 맥코이가 질문을 던져 주었다. 커크의 얼굴이 마치 하고픈 말이 있는데 맥코이가 묻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다는 식의, 그런 묘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맥코이는 자신이 져주는 심정으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오늘 같이 자요. 

낯익은 문장에 맥코이의 인내심이 한계치까지 솟아올랐다. 뭐? 맥코이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커크가 자신을 가리키며 강조했다. 

나랑, 자요. 

맥코이는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스팍과 무슨 대화를 했기에,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커크가 (물론 미묘한 순간들은 몇 번 있었지만 큰 문제랄 것들은 없었다) 갑자기 또 이러는 걸까. 그가 조언이라도 한 걸까? 맥코이는 점차 몸집을 불리는 상상들을 가까스로 중단시켰다. 

커크는 확실히 고장난 상태였다. 솔직히 '자자'라거나 '섹스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그나 예전의 그나 다를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는 둘 모두 개방적인 성생활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제임스 커크는 쾌락 추구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에 반해서 지금의 커크는 이유와 목표도 없이 그저 강박적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커크의 전 주인들이 그것을 당연시 여기도록 커크를 교육했던 것일 터다. 커크는 고장난 신체 못지않게 망가진 정신을 갖고 있었다. 맥코이가 설령 운이 좋아 커크의 몸을 모두 고친다 하더라도 그의 인식체계와 사고방식은 여전할 게 분명했다. 

차츰 자신이 커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맥코이는 자신감을 잃었다. 마음이 약해지자 절로 환하게 빛나던 짐 커크가 보고 싶었다. 이런 백지 상태의 커크가 아닌, 정말 해처럼 자신을 비추던 그가 보고 싶었다. 그라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우울해하는 자신을 놀렸을 텐데. '본즈'라고 불러주었을 텐데.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지난 날의 추억과 그리움이 진득하게 눈가에 감겨들었다.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맥코이에게 커크가 다가갔다. 그의 손이 맥코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울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이를 악문 맥코이가 갑자기 커크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커크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눈만 크게 떴다. 맥코이가 눈물이 엉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뱉는 문장의 음절마다 그간 쌓인 억하심정이 매달려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네가, 항상 잘못했다고 말하는 네가 정말 무엇이 잘못인지는 아냐고. 
저는.... 제가.... 

맥코이가 커크의 손을 들어 손가락 끝에서부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마디에도 꼼꼼히, 그리고 손바닥에도, 맥코이는 깊게 키스했다. 그 통에 커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맥코이가 커크의 손에 긴 한숨을 토해낸 후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았다. 갑작스레 안긴 커크는 맥코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폐까지 한달음에 들이닥치는 약품 냄새, 희미한 피 냄새, 진득하고 끈적한 땀과 살내음 따위를 맡을 수 있었다. 맥코이는 그 상태로 커크의 부스스한 정수리에 턱을 비볐다. 


아냐. 미안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 

커크는 조용히, 가만히 있었다. 맥코이는 그런 커크의 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줘. 마지막이야. 낮에....... 

아무 일도 없었어? 


Posted by 카레우유 :



20편에서 완결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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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눈만 깜빡일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질적인 눈동자들을 향해, 스팍이 물러서지 않고 재차 강조했다. 그의 눈빛도 단호하게 빛났다. 


당신을 모시러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커크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시했다. 

열 번째 주인님이에요? 
...아닙니다. 

이전의 그라면 커크의 대답에 가슴 한 구석을 저미는 서글픔을 느꼈겠지만, 지금의 스팍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콜리나르였고 그것이 스팍이 선택한 결과였다. 스팍은 담담하게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여덟 번째입니다. 10913. 

스팍이 스스로를 지칭한 단어와 자신을 호칭한 단어에, 커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번호는 확실히, 커크에게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스팍은 이에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알던, 이 세계의 제임스 T. 커크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타플릿을 비롯하여 지구 전체에는 당신이 그 사람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저는 그런 당신을 보호하고 책임질 의무를 지닙니다. 

스팍은 잠깐 숨을 쉬었다. 해야할 말, 그에게 주지시켜야 할 정보들이 많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이 충분할지는 미지수였다. 스팍은 감시 카메라를 곁눈질하며 뒷짐지었던 팔을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제 불찰으로 발생했던 사고에 대해서는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커크는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파를 세게 쥔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명확했다. 커크의 혼란을 감지한 스팍이 덧붙였다. 

닥터 레너드 맥코이는 당신의 주치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당신을 방문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당신을 임시로 보호하고 있었을 뿐 정식 책임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커크가 희미하게 울상을 지었다. 

인사하고 가게 해주세요. 

이번에는, 스팍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스팍이 커크를 찾아온 그 시각에 공교롭게도 레너드 맥코이는 수술중이었다. 한 수술이 끝나고 쉴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의사가 다루는 것은 환자의 목숨이다. 수술 중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다간 한 인생이 지상과 저승을 오가는 것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있는 맥코이는 아무리 머릿속에 짐 커크 두 단어가 가득 차 있어도 환자를 대할 때면 잠시 그를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곤 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워낙 간사해서, 삶의 이곳저곳에서 뜬금없이 생각이 툭 튀어오르곤 한다. 그리곤 꼬리를 물고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수면에 떨어진 물방울이 다시 옆으로 튀어 동그란 파문을 퍼뜨리듯이. 

맥코이는 환자의 흉부를 열어젖히며 커크의 몸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커크의 유품들을 떠올렸고 환자의 조각난 다리뼈를 맞추며 커크의 하얗고 얇은 종아리를 떠올렸다. 

지금의 커크는 이를테면, 이미 부서진 유리를 투명한 테이프로 이어붙여 놓은 상태였다. 테이프의 접착력이 약해지거나 더한 충격이 가해진다면 산산조각날 운명이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커크를 쉽게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그의 신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되, 그를 낫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가 (의사로서) 매일 하는 일처럼, 맥코이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내었다. 

내가 널 치료해줄게(I will cure you). 

수술을 끝마친 맥코이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왔다. 커크를 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터치 키보드에 암호를 입력하자 집 안의 정경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가 당신에게 숨긴 것이 있습니다. 


스팍이 입을 열었다. 커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스팍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당신의 신체가 붕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그가 말한 적이 있습니까? 추론컨대 말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그 이유로 제가 당신을 데려가는 겁니다. 그는 당신이 알아야만 할 사실을 숨겼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저는 적정하고 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유지할 방법을 강구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제가 당신을 고칠 겁니다(I will fix you). 
제가 또 뭔가를 잘못했나요? 


커크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물었다. 

스팍의 시선이 카메라와 시계를 차례로 오갔다. 끝나지 않을 선문답이다. 스팍은 판단했다. 이미 인식 체계가 고정된 그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스팍은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닥터 맥코이가 잘못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장소에 온 것이며, 원한다면 그와 함께할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루요? 
예. 단, 맥코이에게 저에 대한 것이나, 떠나는 것에 대한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저와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십시오. 그는 분명 막으려 할 겁니다. 당신과 맥코이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를 더 오랫동안 보기 원한다면, 제 말을 따르십시오. 
네.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팍은 그것으로 일단 물러났다. 예상보다 커크가 순순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스팍이 알고 있던 예전의 커크와는 또 미묘하게 달랐다는 뜻이었다. 맥코이와 한동안 지낸 탓이겠지. 스팍은 문을 나서며 목례했다. 

내일 이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스팍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커크는 인사도 잊은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Posted by 카레우유 :

변명의 천재 레너드 호레이쇼 맥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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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가자. 어디로든 떠나자. 

어느새 맥코이는 커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커크는 저항 없이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맥코이의 손이 커크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 가슴을 훑어올렸고, 그의 입술은 커크가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커크는 맥코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떠나요? 
그래. 둘이서. 
당신이랑 나랑? 
그래. 너랑 나랑 단둘이서. 
그럼, 먼저 나랑 자요. 

맥코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우울하게 거절을 뱉어냈다. 

안 돼. 
왜요? 
맥코이는 커크의 눈에 다시 키스했다. 커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물었다. 
왜요? 


맥코이는 커크의 눈에 촉, 촉 거듭 입을 맞추었다. 커크는 눈을 뜨지 못하는 대신 입을 벌렸다. 왜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번만은 맥코이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너를 안은 사람들이 모두 너를 떠났다고 말했지. 
네. 
나는 너와 자지 않을 거야. 
네? 
너를 떠나지도 않을 거야.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커크의 몸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자신의 신념과 의지였다. 그는 커크와 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커크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커크는 불안정했고, 그의 신체에 특정 자극을 가한다는 것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특히나 잠자리는 명실공히 큰 자극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니 정말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맥코이는 이 대화로 인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유혹-그것은 정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하던 커크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때는 거의 넘어갈 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고한 결심이 선 상태였다. 


맥코이는 다시 키스하려다 벌어진 커크의 눈을 보고 섬짓함에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눈 감아도 돼. 커크는 하얀 얼굴과 검은 눈동자로 답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냐. 짐.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럼 왜 나를 안지 않아요? 


짐, 짐.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맥코이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맥코이는 두 손으로 커크의 얼굴을 감싸쥐고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나는 너를 지켜주고 싶어. 늘 네 곁에 있고 싶어. 같이 자는 것만이 사랑한다는 증거는 아니야. 


맥코이의 심정과는 다르게 커크의 목소리는 점점 단조로워졌다. 표정은 여전히 백지처럼 비어 있었고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한텐 그래요. 


짧은 대꾸에서 맥코이는 서글픔을 느껴야만 했다. 커크가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면서, 맥코이는 재차 강조했다. 


사랑해. 정말로. 자는 것 외엔 뭐든지 해줄게. 말만 해. 원하는 거라도 있어? 같이 우주로 나갈까? 보고 싶은 게 있어? 가고 싶은 곳은? 아니면-. 
괜찮아요. 


괜찮기는. 맥코이는 목구멍에 턱 걸리는 무언가를 애써 삼켰다. 한참 그를 달래보기도 하고 명령조로 말해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커크는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저 이대로 삶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걸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거라고.

 
덕분에 맥코이는 전전긍긍하며 그날부터 커크의 시중 아닌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커크는 불평하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맥코이가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퇴근하며 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온다거나 함께 외식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게 전부였다. 


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스팍이 그 집에 찾아온 날까지. 


맥코이는 병원에 출근한 뒤였고 커크는 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은 구하기도 힘든 종이책이었다. 맥코이의 배려였지만, 커크는 짤막한 감사를 표할 뿐 크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실 커크는 드러내어 감정 표현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른 오후였고 맥코이의 퇴근 시간과는 거리가 있었다. 베란다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커크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들어선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녀오셨어요. 


입버릇과도 같은 인사를 끝까지 말하고 난 뒤에야, 커크는 그가 맥코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스타플릿 정복을 갖춰입은 스팍은 현관에 서서 집 안을 구석구석 주시하다가 (그가 찾는 것은 감시카메라였다) 커크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스팍은 짧게 목례했다. 


데리러 왔습니다.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