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한 문이 소리없이 움직였다. 맥코이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얀 벽과 종이책이 듬성듬성 들어찬 책장, 정갈한 침대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스타플릿의 회색 정복이 모자와 함께 걸려 있었고, 원목 책상 위에는 작은 엔터프라이즈 모형이 새초롬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낯익은 등과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짐- 

맥코이는 차마 입을 열어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탄식만을 내뱉은 그의 입이 뻐금거리다 이내 닫혔다. 의자에 앉아있던 커크는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짧고 삐죽삐죽한 금발에 맑고 진한 하늘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니까, 왼쪽 눈의 안대와 흉터만 제외하고는 여상스러운 커크였다.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였다. 


함댱님!! 

체코프가 가장 먼저 울먹이며 달려들었다. 스콧도 지지 않겠다는 듯 진짜 죽은 줄 알았슈, 짐보! 라 덧붙이며 뒤따랐고 술루 또한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띄운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커크는- 

놀랍게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품에 매달린 체코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코끝이 발개진 채로 투덜대는 스콧에게는 죽긴 누가 죽었냐며 농을 던지기도 했다. 술루와는 진한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있는 맥코이 곁에 스팍이 다가왔다. 그는 잠자코 뒷짐을 지고 서서 커크와 크루들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맥코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를 추궁했다. 스팍은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일말의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그를 고쳤지(I fixed him). 
제정신이야? 

스팍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맥코이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할 수 없었던 일이야. 당신이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맥코이가 한쪽 눈썹을 거의 찌그러뜨린 채 스팍을 돌아보았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서커스의 광대처럼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게? 

크루들이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지만, 스팍에게는 분명하게 들렸다. 스팍은 빠르게 답했다,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는 문제가 아냐. 그는 분명 우리의 '그'가 아니지만 동일한 외모를 가졌고 이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저게 문제가 아니면- 젠장, 빌어먹을 벌컨에게 중요한 게 대체 뭔데? 자기만족? 인형놀이? 

맥코이가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크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주먹쥔 손을 등허리에 걸었다. 그러자 두 남자는 거의 비슷한 포즈를 하고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스팍은 다시 시선을 커크와 크루들에게로 옮겼다. 

저것. 
저게 뭐? 
뭐가 보이지? 

맥코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틀어 그들을 주의깊게 보았다. 그는 체코프가 커크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스콧이 커크의 어깨에 팔을 걸고 거칠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도 보았고, 술루가 안부를 묻고 커크가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것도 보았다. 약 5년간 볼 수 없었던-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했던 광경에 무언가가 울컥 하며 심장을 치고 올라왔다. 


맥코이는 스팍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 저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맥코이가 애써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는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숨길 의무가 있지. 
아니야. 그 두 가지는 달라. 그건 의무가 아니라 네 욕심이라고. 
사사로운 감정은 개입되지 않았어. 이건 모두 저들과 제임스 커크를 위해서야. 닥터 맥코이. 

맥코이는 입을 다물었다. 크루들과, 사라진 제임스 커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저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기에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지? 

우리는 그에게 저걸... 저런 짓을 강요할 권리가 없어. 
그도 동의했어. 

스팍의 즉답에 맥코이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항변했다. 

그는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잖아....... 


스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크루들은 맥코이를 손짓해 불렀고, 문가에 있는 스팍과 맥코이를 본 커크는 활짝 웃었다. 

본즈! 


뭐? 맥코이는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속에서 극렬한 거부감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던 맥코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커크에게 다가갔다. 절대 스팍의 선택을 존중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기쁨과 환희에 젖어있는 크루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맥코이는 짙은 패배감을 씹으며 얼굴 근육을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짐. 
왜 이제 왔어? 

맥코이는 입 안을 깨물며 이 이상한 상황을 견뎌내려 노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났다. 입 안에서는 피맛이 났다. 맥코이는 도저히 커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맥코이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자 크루들이 자연스레 뒤로 비켜서 주었다. 맥코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 본즈. 

전혀 안 괜찮아.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어. 맥코이가 속으로 토해냈다. 구역질의 원인은 이것이었던가. 재삼 솟아오르는 역겨움을 삼킨 맥코이는 곱씹고 또 곱씹었다. '네'가 그 이름을 알아선 안되잖아. '네'가 그 이름을 불러선 안되잖아. 


어. 울어? 
아니. 아니야. 

시선을 피하는 맥코이에게 커크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맥코이의 턱을 잡아 올렸다. 맥코이는 흠칫 떨었지만 그를 뿌리칠 수 없었고, 그때서야 커크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본즈. 

동그란 눈이 잔주름을 만들며 둥글게 휘어졌다. 우주가 그 안에 잠겼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맥코이는 그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이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건 아니었다. 



-



악마는 누굴까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