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크의 장난스런 말에 스팍이 어이 없다는 듯 커크를 돌아봤어. 커크는 히죽 웃으며 혀를 내밀었지.
농담이야. 숨 쉬어도 돼.
스팍이 한숨을 쉬자 커크는 그제서야 스팍의 목을 놔주었어. 스팍은 흐트러진 책을 다시 정리해 들었지.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짐, 당신은 적절한 사고과정 없이 말을 내뱉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주의를 해야 해?
당신의 그런 행동 양식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당신을 오해할지도 모릅니다.
오해받으면 어때서? 난 상관없는데.
짐.
스팍이 또 생각없이 말을 내뱉고 있는 커크에게 주의를 주었지. 커크는 다시 혀를 베- 하고 보이면서 주머니에 쑥 손을 집어넣었어. 영락없는 동네 개구쟁이 꼬마로 보였지. 스팍이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하자 커크는 그 옆에서 스팍을 맴돌면서 함께 걸어갔어.
스팍. 너는 왜 그렇게 어른처럼 굴어?
교육받은 대로 행동하는 것뿐입니다.
그럼 나는 교육을 못 받았으니까, 어른이 될 수 없는 거야?
어른이라는 단어는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가 성장하기 때문에, 짐 당신도 물리적 의미에서는 결국 어른이 됩니다.
그럼 다른 의미에서는?
커크의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자 스팍이 눈썹을 꿈틀였지. 정말이지 인간의 일곱살 꼬마들은 호기심이 많았어. 질문이 봄날 개울물처럼 콸콸, 도통 멈추지를 않았지.
미래의 일은 변수가 많아 제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한 번 해봐. 스팍. 나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여느 때처럼 스팍이 졌어. 스팍은 푹 한숨을 내쉬고는 그 자리에 멈춰섰지. 아직은 계산에 숙달되어 있지 않아서, 걸어가면서 동시에 계산까지 하는 건 무리였어. 그래서 스팍은 제자리에 선 채로 눈썹을 모으고 고심했지. 커크도 사뭇 진지하게 그런 스팍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어.
곧 계산이 끝났지.
당신이 어른이 될 확률은 50%입니다. 짐.
에잉? 그게 뭐야. 이상해. 어른이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커크가 인상을 썼어. 스팍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책을 안아들고 걸음을 옮겼지. 커크가 소리를 지르며 기를 쓰고 쫓아왔어. 명백히 불만인 표정이었지.
스팍! 뭐야, 설명해줘!
설명해줘도 지금의 당신으로선 이해할 수 없으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치사해!!!
사실 계산은 간단했지. 스팍은 옆에서 쨍알대는 커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어.
당신은 분명 어른이 될 겁니다.제가 곁에 있는 한.
어른 스팍이 자고 있는 어른 커크의 눈가를 쓸어줬어. 커크는 살짝 움찔거리고 말았지. 잘 때는 정말이지 세상 모르고 자는 커크였어. 어릴 때와 똑같았지.
커크는 스팍의 강의에 드나들기 시작했어. 몇 개 없기도 했고, 순수과학 쪽이었지만, 커크는 일단 마음을 정하면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그래서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아는 여자들과 인사를 주고받기도 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쪽 일원인 것처럼 있었지. 정각에 스팍이 들어오자, 커크는 아주 환한 웃음을 지었어. 스팍은 잠깐 놀랐지.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손을 흔드는 커크를 보고 스팍은 결국 할말을 잃고 말았어.
커크 생도는 무슨 이유로 여기 있지?
청강인데요.
지휘부가 과학부 강의를? 스팍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강의 시간에 맞춰 수업을 해야 했기에 그를 그냥 내버려 두었지. 물론 커크는 강의 내내 신나게 졸았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거든. 그래도 강의가 끝날 때쯤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반짝반짝하게 떴지. 하나도 안 졸았다는 듯. 스팍은 기가 찼어. 도대체 뭐하러 왔는지 알 수 없었지.
점심 시간에도 교관 식당까지 따라온 커크는 스팍의 맞은편에 앉았어. 교관 식당에서 받을 수는 없으니까 생도 식당에서 음식을 받아서 여기까지 쫓아들어온 거야. 검은색 교관복만 가득한 교관 식당에서 붉은 생도복은 더없이 눈에 띄었지만,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스팍도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았지. 그 둘을 바라보는 교관들만이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어. 스팍은 혼자 앉아 있었는데, 원래 벌칸은 신체적 특징상 식사를 자주 할 필요가 없어서 함께 먹는 사람도 없었지. 야채와 스프밖에 없는 스팍의 식판을 보고 커크가 한 마디 했어.
교관님. 다이어트 하십니까?
부정한다.
제 거 드릴까요?
거절한다.
외계생물학 공부나 더 하도록. 스팍은 벌칸의 특징(채식주의, 적은 양을 섭취하고도 충분히 생활 가능)에 대해 거의 모르는 커크에게 면박을 주었지. 그래도 커크는 꿋꿋이 스팍의 앞에서 밥을 다 먹었어. 아주 제멋대로였지. 예전과 다를 게 없었어. 그런데 스팍은 그게 귀찮긴 했어도 싫지는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느낀 자기 자신에게 새삼 놀라했지. 그들은 그렇게 종종 함께(?) 식사를 했어.
결국 그 장면을 목격한 교관과 몇 생도들에 의해 급속도로 소문이 퍼져나갔지. 커크가 이제 교관, 그것도 남자, 그것도 벌칸!을 따먹으려 한다는 소문이었지. 스팍은 몰랐지만 커크는 이에 꽤 흡족해했어. 본즈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울 뿐이었지.
미쳤냐? 여학생이 모자라? 하필이면 그 뾰족귀를 노리냐.
본즈. 얘기했잖아. 스팍이 나한테 마음이 있는 거라니까.
내 눈에는 니가 뾰족귀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강아지처럼 보이거든.
아니라고!
슬슬 커크도 뭔가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차였지. 이 정도로 공을 들여 놨는데, 스팍이 자기한테 넘어오지 않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얼마 전에 본 생물학 책에서 벌칸의 신체적 특징을 보고는 입을 떡 벌린 커크거든.
야. 벌칸 성기가 내장형이래. 여자랑 똑같잖아!
그거 1학기 때 배운 거다. 공부를 대체 어디로 했냐.
좇으로 했던가?
임마. 스팍한테 꼬리치다가 혼쭐나지나 마.
걱정도 팔자다.
커크는 히죽 웃었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자랑 자본 경험이 없는 건 아니야. 그는 쾌락주의자였기에, 자신에게 쾌락을 줄 수만 있다면 여자든 남자든 3P든 개의치 않았어. 단 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게 있다면 자신이 탑이라는 거였지. 그는 자신이 바텀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그래서 스팍과 하게 되더라도 무조건 자신이 탑이리라 생각했지. 물론 그 생각은 오산이었지만.
그때도 스팍의 살인적인 과제는 계속되고 있었어. 커크는 그걸 느지막히 끝내고 스팍에게 제출하러 가는 길이었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이었는데, 사실은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간 거야. 스팍은 그걸 지키는 일이 거의 없었고, 맨날 무엇인가를 하느라 연구실에 남들보다 오래 남아있었지만. 그러니까 커크는 노리고 간 거지. 연구실이 줄줄이 가득한 복도에 재실중 표시가 떠 있는 건 스팍의 연구실 하나였어.
교관님.
커크가 들어서자 스팍이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지. 뭔가에 집중하느라 바쁜 모양이었어.
책상 위에 두고 가.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팍에게 다가왔지.
수업 내용 중에서 질문이 있는데요.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그제야 스팍이 눈을 들어 커크를 봤어. 교관이니만큼 생도들의 질문에는 최우선으로 대답해주는 게 원칙이었지. 사실 스팍은 커크가 다가올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커크가 그 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어. 커크가 어느 순간부터 자기에게 의도적으로 접촉해왔다는 점도 있었지. 그래서 그는 일단 물어봤어.
질문이 뭐지?
그게, 잠깐 몸 좀 빌려주셔야겠는데요.
커크가 스팍의 의자 위에 반쯤 올라탔어.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신체 일부가 맞닿자 스팍은 약간의 아찔함을 느꼈지. 그에게서 어렴풋이 전해져오는 감정은 무언가, 뜨거웠어. 배가 살살 간지러웠지. 커크의 눈빛이 푸르고 선명했다는 점도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들었어. 스팍은 그대로 커크를 떼어놓으려 했지.
제가 말입니다. 시키신 대로 생물학 공부를 했죠.
커크 생도. 불필요한 접촉은-.
벌칸은 좇이 내장형이라면서요?
커크의 손가락이 스팍의 다리 사이를 훑었어. 남자라면 거기서 뭔가 잡혀야 하는데, 없었지. 진짜네. 커크가 입맛을 다셨어. 거기서 여자처럼 애무를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 스팍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잡아 책상으로 밀었지. 커크가 뭐라 말할 새도 없었어. 쾅, 하고 책상과 거칠게 부딪힌 허리가 무척이나 아팠지. 커크는 끙끙대며 변명을 덧붙였지.
그러니까, 제 말은, 그걸 실제로 보고 싶어서 말입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요.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어. 커크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지. 그와의 접촉 정도는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는데, 그가 빌어먹게도 먼저 자극해온 거야. 커크가 자신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중임을 몰랐던 스팍은 멍청하고 장난기 넘치는 커크가 실수를 한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니까, 스팍도 그 즈음에는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어. 커크가 자신을 감정적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반쯤 장난으로 대하고 있음을.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그가 즐기고 있음을. 문제는 스팍이 그런 것에 불쾌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거지. 그래서 그저 어린애 장난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곤 했던거야. 딱히 일에 방해가 될 정도도 아니었고.
그러니까 그들의 관계는 그 이상 갈 정도도 아니었고, 가서도 안 되었던 거야. 스팍의 판단으로는. 스팍은 커크가 자신과 섹스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는 커크를 당장 뒤로 돌려 세우고 싶은 마음을 참았지.
커크는 스팍의 침묵으로 그가 고민하고 있음을 간파했어. 하지만 그는, 스팍이 자신과 섹스하고 싶은데, 그것을 벌칸으로서 감정을 참는 수준으로만 여겼지. 그런 여자들이 종종 있었거든. 자신과 자고는 싶은데 여러 이유로 빼는 여자들. 그래도 결국은 모두가 넘어왔지. 커크는 알았어. 게다가 그런 것에 자신이 있었고 스스로도 재능이 있다고 여겼지.
커크는 책상 위에 반쯤 누운 채로 손을 뻗었어. 스팍의 볼을 쓰다듬고,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스팍에게 속삭였지.
보여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직접 볼까요?
과한 장난은 삼가도록. 이제 나가.
스팍이 딱딱하게 대답하고 그의 어깨에서 손을 놓았어. 커크가 그를 그렇게 놔둘리가 없었지. 커크는 그대로 스팍의 교관복 멱살을 쥐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겼어. 얼굴이 가까워져 코가 스쳤지. 커크는 그와 이마를 맞댄 채목소리를 깔고 허세를 부렸지.
누가 장난이랍니까? 진심입니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스팍의 앙다문 입술을 핥았어. 뜨거운 숨이 스팍의 얼굴을 어루만졌지. 스팍은 커크를 똑바로 노려보았어. 어렵지도 않았지. 그들의 눈동자와 눈동자 사이의 거리는 5cm도 채 안되었거든. 커크 또한 뇌쇄적인 눈길을 보냈는데, 제딴에는 섹시한 눈빛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팍에게는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 스팍은 이를 악물었지.
더티블러드 1부 퇴고는 다했는데 2부 퇴고가 남아있ㄴㅔ...?^^ 그런데 왜 저는 새 썰을 쓰고 있는 걸까요
그냥 달달하고 설레는 요망 잔망 앙큼한 커크가 보고 싶습니다
스팍커크 live long and prosfuck
그 날의 격투술 훈련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일대일 대련이었어) 이후 스팍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어. 커크가 그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스팍이 그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차츰 늘어났지. 마치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커크는 눈치가 빨랐기에 그런 스팍의 변화를 알아차렸어. 그는 과거를 비롯해서 현재도 애정결핍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기에, 감정의 레이더에 아주 민감했지. 특히 자신을 향한 거라면 더더욱.
오늘도 그랬어. 스팍은 자신을 바닥에 눕힌 뒤에도 그의 잘못을 느리게 지적하며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어. 그를 제압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지. 그리고 사실 그 말이 맞았어. 스팍은 커크와 접촉하는 순간 동안 그로부터 빨아들이듯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에 거의 중독되어 있었지. 벌칸들 간의 접촉에는 그런 게 없었어. 마치 차가운 로봇이나 기계와 대화하는 양, 견고한 유리벽에 세워져 있는 양, 생각의 교류는 오가도 감정은 절대로 드러내지 않았거든. 하지만 커크는 달랐어. 생동감 넘치는 그의 생명력이 느껴졌지.
그것은 어머니와도 비슷했어. 스팍은 자라는 내내 벌칸인 아버지와 인간인 어머니 사이에서 늘 경계선 위를 걸었거든. 결국은 벌칸을 선택하고 말았지만 말야. 그건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어. 사실 그는 늘 자신은 인간인지 벌칸인지 고민했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벌칸이었고, 아버지 또한 벌칸이었지. 그가 누구보다 벌칸처럼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은 필요에 의해서였어. 그는 완벽한 벌칸이 아니었기에 모두가 그를 쉬쉬했거든. 그래서 그는 더 노력했지. 하지만 어머니는 그들과 달랐어. 스팍이 굳이 벌칸과 인간 중에서 고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 주었지. 스팍은 스팍이라고. 벌칸이면서 인간, 둘 다라고. 그게 더 사랑스럽다고.
어쨌든, 스팍은 커크와 접촉하며 자신의 인간적인 부분이 그에게 감화되고 있는 것을 알았어. 반쪽의 벌칸은 자신의 행동이 다소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음을 일찍부터 감지했지. 하지만 그는 이건 모두 커크의 격투 기술을 위한 것이라며 자기 합리화를 했어. 물론 구실이었지. 스팍은 벌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라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자신이 '커크에게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그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커크는 스팍의 눈빛을 통해 그가 자신을 상당히 복잡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그것이 벌칸에게는 일어나기 힘든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지. 커크는 타인이 자신을 보는 선망 혹은 욕망의 시선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거든. 커크는 벌칸으로부터 그런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뻤고, 자신감이 충만해졌지. 이야, 벌칸, 그것도 벌칸 남자를 홀리는 내 매력이란! 이럼서. 결국 그때부터 커크의 장난기가 발동되고 말았어.
커크는 모두가 아다시피 카사노바로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건 바로 그가 치고 빠지는 것을 잘 했기 때문이었지. 밀당이라고 해야 좋을까? 옴므 파탈이라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이 한 번 찍은 상대를 공략하는 것을 즐겼고, 그가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끊임없이 장난을 쳤지. 그와 하룻밤을 자게 되면 그제야 그의 목적이 달성되는 거였어. 물론 한 번 잔 상대와 다시 자는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커크는 모든 여자에게 꽤나 살갑고 다정해서 함께 잤다고 해서 그 관계가 와장창 깨지는 일은 없었지. 여자들은 그의 엉덩이가 가볍다는 것을 알았지만,그와 가깝다는 것이 삶에 해가 되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관계를 유지했어.
그러니까 커크의 모든 관계의 목적은 섹스 외에는 별 거 없었다는 얘기야. 그는 감정 따위로 정력을 소비하고 싶지 않았어. 감정은 그에게 애들 장난에 불과했지. 그래서 커크는 스팍이 자신에게 다소 감정이 있음을 확인한 순간 그것을 즐기기로 했어.
교관님.
질문이라도?
이번에는 제가 적이라고 상정하고, 교관님께서 막아보시죠.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훈련이었지. 하지만 커크가 싱글싱글 웃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어. 스팍은 커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 미심쩍었지만 오케이를 했어. 결과는 평소와 같았지. 스팍의 팔을 세 번 정도 막아낸 게 발전이라면 발전이었달까. 커크는 헉헉대며 스팍의 발치에 쓰러졌어. 스팍은 그런 그를 가만히 주시했지. 커크가 투덜거렸어.
좀 일으켜주면 지문이 닳는답니까?
스팍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지. 평소라면 그런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겠지만, 커크였기에 가능했어. 그리고 그랬기에 스팍은 그대로 커크의 수에 넘어가고 말았지. 커크는 스팍의 손을 잡자마자 자기 쪽으로 세게 끌어당겼어. 방심한 스팍은 그대로 커크의 위에 쓰러졌지. 커크는 스팍을 껴안고 킬킬 웃었어.
적에게 손을 뻗으면 안 되죠. 교관님.
자신이 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리듯 말하는 커크였어.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스팍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 하지만 커크가 슬슬 손을 움직여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었어. 스팍의 움직임이 즉시 멈췄지.
지금 뭐하는 거지, 커크 생도?
미인계요.
천연덕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의 커크는 도저히 혼을 낼 수도 없게 웃고 있었어. 커크의 손이 스팍의 허리에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서서히 올라왔지. 한 손은 그의 상의를 들추려 하고 있었어. 스팍은 그의 손길에 거의 전율을 느끼고 그를 밀어냈지. 커크는 순순히 밀려났어. 두 손을 든 채로 항복한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지.
그런 전술을 가르친 기억은 없는데.
그래요?
커크는 능글맞게 웃었어. 그 끈적한 웃음에 스팍은 대화의 주도권을 그에게 뺏긴 듯한 기분이 들었지. 차라리 반항하거나 도망다닐 때가 나았어. 스팍은 커크의 이 변화가 무엇에서 비롯된 건지, 또 무엇을 위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 자신이 커크의 공략 상대로 찍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스팍이었어.
날이 갈수록 커크의 노골적인 태도가 분명해졌지. 스팍을 자신에게 완전히 넘어오게 하려는, 커크의 장난 아닌 장난이 가속화됐어. 누가 봐도 커크가 스팍에게 작업을 걸고 있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은 다 했지. 이에는 전혀 감정적인 부분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스팍을 곯려주려는 의도가 다분했지만, 당사자인 스팍은 영문을 모르고 당황스러울 뿐이었어.
커크는 과제를 제출하거나 그에게 지시를 받을 때도 굳이 스팍의 가까이에 와서는 접촉을 했지. 말 그대로 몸을 부대꼈어. 대련할 때는 더했고. 스팍의 귀를 쓸거나 허벅지를 만지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지. 스팍이 잔소리를 해도 그때뿐이었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살살 웃으면 끝이었지. 게다가 모두가 꺼려하는 스팍 곁에 딱 붙어서는 '교관님!'하면서 살갑게 구는 게 여우같은 소녀들 못지 않아서, 스타플릿의 생도들 입을 떡 벌어지게 했어. 물론 커크를 알만큼 아는 생도들은 저것도 일련의 장난이겠거니 생각했지만.
스팍은, 커크가 그렇게 구니까 상당히 놀랐어. 저도 모르게 커크와의 접촉을 즐기긴 했어도 커크가 먼저 다가오니까 그것을 전부 감당할 수가 없었던 거야. 혹시 자신의 감정을 들킨건가 싶기도 했지. 결국 스팍은 마음을 정했어. 스팍은 커크에게 그 이상 감정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어.
오늘로 격투술 훈련은 끝이다.
커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지. 스팍이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왜요?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만큼 진전이 있었으니까.
스팍은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그대로 몸을 돌렸지. 커크는 당황했어. 이게 뭐지?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보통 여자들과는 다른 패턴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커크가 눈살을 찌푸렸어. 이대로 스팍에 대한 장난을 끝내야 하나? 아니, 그것보다도, 정말 나에게 마음이 있기는 했던 건가? 커크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지.
교관님!
커크는 스팍에게 쪼르르 달려갔어. 스팍은 마지못해 돌아섰지. 그는 커크와의 접촉을 갈구하게 될까봐 두려웠어. 그리고 그동안 커크가 살갑게 굴었던 것에 자신도 모르게 적응한 상태였지. 그래서 스팍은 커크에게 더 마음을 두지 않으려 했어. 감정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벌칸에게 가장 큰 독이 되니까.
무슨 일이지?
커크는 스팍을 불러놓고도 그 자리에 서서 머리를 긁적였어. 일단 그를 멈춰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막상 그를 세워놓고 보니 딱히 할 말이 없는 거야. 뭐라도 말을 해야겠는데 마땅한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어. 빌어먹을, 커크는 답답했어.
용건이 없으면 가보지.
냉정하게 몸을 돌리는 스팍이었어. 커크는 그 모습에 더 상처를 받았지. 망할, 자신을 끈덕지게 쳐다볼 땐 언제고 훈련이 끝나니까 그대로 내빼? 커크의 복수심이 불타올랐어. 우선 스팍이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들게 만들어야 했어. 그리고 신나게 뻥뻥 차는 거지. 커크는 그렇게 스팍을 꼬실 계획을 세웠어.
-그를 발견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술집이었지. 스팍은 주의깊게 커크를 살폈어. 아무리 외출 중이라 해도 신분이 생도인 이상 문제에 휘말리면 그대로 영창행이야. 스타플릿 아카데미는 사관학교였고 소속 학생들은 군인 겸 학생이기 때문이지. 커크도 그런 사실 정도는 본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조심해도 달려오는 자동차는 피할 수 없듯이, 이상한 놈들이 꼬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 커크가 금발에 이쁘장하게 생긴 탓도 있지만 혼자 있는 이상 쉬운 표적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거야. 커크도 그걸 알아서 본즈가 없으면 나오지를 않았어. 그런데 본즈는 실습 때문에 바빠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연이어 계속되는 스팍의 압박으로 커크는 매우 술이 고팠어. 그러니까 어쩌면, 커크가 그런 사고를 당하게 된 건 스팍 탓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거야.
혼자 술을 퍼마시던 커크에게 남자 하나가 다가갔지. 스팍은 그게 커크의 동료인지 낯선 사람인지 알 수 없었어. 다만 그가 커크와 몇 마디를 나눈 후에 커크가 꺼지라는 듯 그를 향해 셋째 손가락을 날리는 것을 보고 추측을 할 뿐이었지. 그 남자는 커크에게 욕을 먹고서 그 자리를 떠나려는 제스처를 취했어. 커크도 다시 술에 집중했지.
아니, 하려고 했지. 그 남자가 갑자기 덤벼들어 커크를 때려눕히기 전까지는. 술집에서는 흔하디 흔한 싸움판이 벌어졌지. 단지 커크가 그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그 남자는 커크에게 주먹질을 했지만, 커크는 그저 막거나 피할 뿐이었어. 커크도 알고 있었거든. 생도로써 일반인과 싸움이 벌어지면, 책임은 생도에게 귀속돼. 일반인을 때리면 그대로 영창행이지. 정당방위고 뭐고 없어. 생명을 위협당하는 정도만 아니면 군인은 폭력을 휘두를 수가 없어. 파이크와 본즈가 커크에게 명심하라고 외출할 때마다 말하곤 했기에 그도 기억하고 있었지.
스팍은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내심 놀랐어. 완전 멍청이는 아니었군. 하면서. 하지만 한참을 맞기만 하니까 커크 성정에 그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뭐라 한 마디 하니까 커크가 도끼눈을 뜨고 덤벼들어. 그의 턱에 단 한 번 주먹을 날렸을 뿐인데, 구석에 있던 네 다섯명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서 다가와. 그의 동료였던 모양이지. 커크도 슬슬 눈치를 살펴. 이거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하지만 한 걸음 걷기도 전에 그들이 와서 커크를 붙잡아. 더 큰 싸움판이 벌어져. 스팍은 그 시점에 끼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스타플릿으로부터 연락이 와서 잠깐 시선을 떼고 말아.
커크 혼자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지. 결국 잠시 후에 축 늘어진 커크를 끌고 그들이 나가. 그게 목적이었던 모양이야. 통화를 끊은 스팍은 술집 주인에게 물어 그들을 쫓아가지. 길이 음침한 공터로 통하는 걸 보고 스팍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해. 그가 서둘러 갔을 때, 이미 커크는 그들에게 붙잡혀서 바지가 벗겨진 채였어.
스팍은 즉시 그 자리에 끼어들어 그들을 정리하지. 일단 커크는 학생이었고, 교관은 생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막을 의무가 있었어. 일반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필요도 없었지. 그가 벌칸이라는 것은 외형만 보고도 모두가 알았으니까. 스팍이 그들을 논리적인 말로 위협하자 다들 설설 기면서 꽁무니를 빼. 한 대 맞은 남자도 도망치지.
커크는 바닥에서 바르작대다가 몸을 일으켜. 그리고 스팍과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지. 스팍 또한 그에게 그 이상 손댈 마음은 없었어. 커크는 옷을 제대로 갖춰입고 일어나서, 한 마디 툭 던져.
과제 때문에 쫓아왔습니까?
긍정하지.
하, 고마워 죽겠네.
커크는 감사인지 욕설인지 모를 것을 투덜거리자 스팍이 덧붙이지.
오늘 내가 목격한 사건을 보고하면 생도는 외출시 규정을 어긴 것으로 처리되어 7일간 영창에 가야 해.
그래서 보고하실 겁니까?
스팍은 대답하지 않아. 대신 딴 소리를 하지.
생도는 격투술에도 소질이 없는 것 같더군.
어쩌라고요.
내가 내주는 과제에 추가로 격투술 훈련을 받는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커크가 멍하니 스팍을 쳐다봐. 스팍은 커크가 함장으로서 자격 미달이라는 점 대신 그를 잘 교육시키면 제대로 된 함장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에 집중하기로 하지. 아이돌을 키우는 매니저처럼 말야. 어차피 지휘부에 있는 이상 함장이 되는 게 기정 사실이라면 특별 훈련을 통해 그를 함장답게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일 거였어. 스팍은 생각을 끝내고 그에게 선고하듯 지시하지.
매일 1800시, 체육관으로 오도록.
이런 미친? 커크는 울고 싶었어. 그 비인간적인 과제도 계속되는 데다가 저 고블린 새끼랑 하루에 몇 시간씩 부대끼며 훈련까지 해야 돼. 하루의 반 이상을 저 스팍에게 소모하는 꼴이었지. 하지만 훈련을 거절한다면? 영창에 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 영창에 가면 수업도 못 들어서 낙제를 할 거고, 군적에도 남겠지. 그럼 함장이 되기는커녕 브릿지에도 못 가고 지상직에 머무를 거야. 파이크도 실망하겠지. 결국 커크는 울며 겨자먹기로 스팍의 명령을 받아들여.
커크가 본즈에게 스팍에 대한 욕을 늘어놓는 날이 늘어났어. 사실은 매일. 본즈를 볼 때마다 스팍 욕을 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거야.
내가 도대체 언제 찍힌 걸까? 생각해봐. 본즈. 그 자식은 나를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야 머저리야. 이 스타플릿의 절반이 네 안티거든.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네가 네 죄를 알렸다. 나 실습있어서 가본다. 내일 봐.
본즈에게 욕을 해도 달라질 건 없었지. 커크는 한숨을 푹푹 쉬면서 체육관으로 가.
격투술 훈련은, 엄밀히 말하면 정규 수업 과정인 격투술과는 또 별개로 진행되는 것이었지. 스팍과 일대일로 진행했으니까. 보통은 커크가 덤비면 스팍이 제압하는 식이었어. 그렇게 상대방의 급소나 제압 방법을 가르쳐주곤 했지.
오늘은 내가 적이라고 상정하고 막아봐.
커크는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에게 대들거나 투덜거렸다간 과제가 늘어날지도 몰라서 가만히 있었지. 결국 하얀 매트 위에 나란히 서서 훈련을 시작했어. 커크는 스팍이 덤비면 어떤 방법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을지 고민했지. 그런데 씨발, 힘이 3배나 센 놈을 무슨 수로 제압해. 절로 욕이 나왔지.
준비됐나?
스팍이 그에게 묻자마자, 커크가 입을 열었어.
교관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질문해.
벌칸도 약점이 있기는 있습니까?
스스로 찾아보길 바라지.
스팍의 대답에 커크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체육관 문을 가리켜.
어? 파이크 교관님!
스팍이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어. 아무도 없었지. 아니, 이런 고전적이고 약은 수를 쓰다니...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커크가 뒤에서 자신에게 덤벼드는 게 느껴졌지. 스팍이 팔을 휘둘렀지만 커크는 날래게 몸을 빼고 그에게 다리를 걸어 그대로 바닥에 눕혔지. 커크는 스팍 위에 엎드린 채 싱글 웃었어.
잘 했죠?
커크 생도.
예?
그 순간 스팍이 그의 팔을 잡고 몸을 세게 밀었어. 그 기세에 몸이 그대로 돌아갔지. 커크는 비명도 못 지르고 뒤집혔지. 말 그대로 세상이 뒤집히는 기분이었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위치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지. 있는 힘껏 팔을 움직이려 했지만, 스팍이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에 그것도 안 됐어.
잘못한 점을 짚어주지. 첫 번째. 나는 그런 교란 방식을 가르치지 않았어.
예...?
두 번째. 끝까지 방심하지 말았어야 해.
.......
세 번째....
스팍은 거기서 말을 멈추었지. 커크는 잔뜩 주눅든 채로 스팍을 올려다보았어. 스팍의 표정은 하얗고 무감정했지. 하지만 접촉하고 있는 커크의 피부에서 그의 감정, 혹은 생각이 밀려들어오고 있었어. 스팍은 그것에 중독된 듯, 멈출 수가 없었지. 커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스팍의 눈치를 살폈어. 스팍은 가까스로 말을 마무리했지.
분위기는 스팍이 몰래 커크를 눈여겨보고 있는 스토커적 느낌?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팍은 조지 커크에 대해 그를 바람직한 함장으로서의 모델이라 생각하지. 그래서 과학 장교라서 본인은 테스트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지휘부를 위해 그 테스트를 제작했던 거야. 그리고 그 아들인 제임스 커크가 스타플릿에 들어왔다는 소식도 아마 제일 먼저 알았을 거야.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언제나 실망스러웠지.
청문회 장면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커크는 그때 스팍을 처음 봐. 하지만 스팍은 그가 스타플릿에 들어왔을 때부터 자세히 주시하고 있었어. 그가 스타플릿에서 수없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파이크가 두둔해주었지만, 스팍은 점점 커크가 아니꼬와져. 아버지의 명성과는 전혀 달랐던 거야.
사실 커크도 나름대로 고생을 겪었어. 이 부분은 되게 해리포터 같은데, 해리가 아버지의 후광이랄까, 과거랄까, 그런 것 때문에 굉장히 유명세를 타잖아? 커크도 아마 그랬을 거 같아. 겉으로는 개의치 않은 척 했어도 속으로 신경이 쓰였을 거라고. 그래서 더 삐딱선을 탔을지도 몰라. 난 조지 커크가 아냐. 난 그런 유명한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라고. 그건 내 아버지고, 난 나야. 난 제임스 커크라고. 심지어 그 인간은 날 한 번 안아준 적도 없어.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함장석에 앉아 있었으니까.
그런데 또 그걸 어떻게 말하겠어. 조지 커크에 의해 살아난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은 그를 거의 영웅시해. 행성 연방에서 그날을 페더레이션 데이(연방의 날)로 지정하고 기념일화한 것도 한몫했지. 그날은 거의 축제의 날이야. 동시에 커크에게는 생일이고, 아버지가 죽은 날이야. 그 모든 걸 감당하는 건 본인의 몫이었어. 아무리 사람들이 아버지를 칭송해도 본인에게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이미 결정되어 버린거든. 커크는 솔직히 자신이 그 상황에 있었다면 자식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생각도 없지만. 그래서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도 해킹한 거고. 불리한 상황 따위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이상 용납할 수 없는 거야. 태어날 때 한 번 겪은 것으로 족해.
더 웃긴 건 커크는 빌어먹게 똑똑해. 이것도 해리랑 비슷한가? 그래서 다른 교관이나 생도들도 커크가 스타플릿을 종횡무진하고 다녀도 뭐라 말을 못 하는 거야. 커크에게는 두 종류의 팬이 생겼지. 자신의 이름만 대도 꺅꺅대면서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자 하는 여생도들과, 그의 카사노바적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는 안티팬들. 물론 스팍은 후자였어.
그런데 스팍은 날이 가면 갈수록 커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교관들이 종합 평가를 할 때면 스팍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에서 커크에게 논리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태도 평가에서는 언제나 최하점을 줬어. 커크는 개의치 않았지. 성적 따위에 신경쓰기에는 사는 게 바빴거든. 본즈도 자기 일 때문에 바빴고. 스팍은 커크가 함장이 되기에는 어딘가 결점이 있다고 생각했어. 분명했지. 저 상태로 함교에 들어갔다간 함선을 말아먹고 말거야. 그건 논리적인 판단이었지.
zip zip하고 스팍이 커크를 불러냈어. 그의 연구실에 들어온 커크는 삐딱하게 서 있었지. 붉은 생도복은 스팍의 검은 교관복처럼 각이 잡혀있진 않았지만 단정했어. 본즈의 솜씨였지. 스팍이 다시 입을 열었어.
커크 생도. 당신의 태도에 대해서 몇 번이나 지적이 들어왔다. 시정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나?
커크는 귀를 후비적거렸지. 스팍은 그 불성실한 태도에 신경이 쓰였어. 도대체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게 없었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입밖에 내는 말 또한 그랬지. 커크의 반항기가 묻어나다 못해 뚝뚝 떨어지는 말투는 스팍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어. 스팍은 커크를 제대로 교육시키야 한다고 생각했어. 이미 파이크의 허락을 맡은 뒤였지. 스팍이 뒷짐을 진 채 위압적으로 노려봤지만 커크는 아랑곳하지 않았어. 보통 스팍이 그렇게 나오면 꼬리를 말곤 하는데, 커크는 겁이 없는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를 일이었지. 스팍은 그에게 산더미의 과제를 내주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어.
이후 '뾰족귀 개새끼'는 커크의 말버릇이 되었지. 그가 내준 과제를 하느라 여자들과 놀러나갈 시간도 없었어. 스팍은 네가 그렇게 잘났다면 어디 3일만에 이걸 다 해봐라, 라는 식으로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커크는 그걸 이틀만에 해갔지. 그러면 스팍은 그것보다 더 많은 과제를 내줬어. 커크는 분통을 터뜨렸지만 만약 그 과제를 해오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사고쳤던 모든 것을 통틀어 처벌당할 게 뻔했어. 낙제를 하거나 정학을 먹을 게 뻔했지. 하지만 스팍이 세번째로 과제를 내주었을 때, 커크는 그것을 받으면서 이미 때려치겠다고 결심을 한 뒤였지. 처벌할 테면 처벌해봐라, 라는 심정이었어.
이틀 뒤에도 사흘 뒤에도 소식이 없자 스팍이 커크를 호출했어. 커크는 내심 찔렸지만 호기롭게 스팍의 연구실에 들어갔지. 스팍 또한 커크가 결국은 자신의 과제를 포기할 거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어. 그러니까 이건 구실에 불과했지. 그가 자신에게 책잡힐 구실. 담당 교수가 아님에도 논리적으로 그를 처벌할 수 있는 이유.
과제는?
안 했습니다.
커크의 그런 당당함에는 사실 스팍도 약간 놀랐어. 하지만 지지 않고 맞받아쳤지.
사유는?
없습니다.
결국 스팍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어. 이거 뭐 어쩌자는 거야. 잘못해놓고 뭐 저리 당당해.
제임스 T. 커크. 생도는 과제를 수행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완수하지 않았다. 한 번 경고를 주지. 이틀 뒤까지 과제를 제출하도록.
커크가 발끈하며 대들었어. 왜 자신만 이렇게 괴롭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
왜입니까? 이딴 과제가 뭐가 도움이 된다고!
'이딴'? 그 사고방식을 고쳐주려는 거다. 제임스 커크. 생도는 함장으로서 매우 적합하지 않은 사고방식과 태도를 소유하고 있어. 지휘 체계에 혼란을 줄 가능성이 높지.
스팍의 말에 커크도 지지 않고 소리쳤어.
거짓말 마시죠. 그냥 제가 싫은 거 아닙니까?
난 생도에게 아무런 사적인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아.
웃기지 마.
커크의 대답이 짧아졌지. 스팍 또한 눈썹을 세웠어. 커크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멱살을 쥐려했지. 스팍은 그대로 그의 팔을 돌려 제압했어. 스팍이 그렇게 힘이 세리라고 생각치 못했던 커크는 깜짝 놀랐지.
빠져나가봐.
스팍의 도발에 커크는 이를 악물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소용 없었어. 그제서야 외계생물학 시간에 배운 벌칸의 종족 특징이 기억났지. 인간보다 힘이 세 배는 세다고 했던가. 커크는 포기하지 않았어. 그래서 스팍은 그가 더 미련하다고 생각했지.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는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행동을 했어야 해. 힘이 아닌 지능, 대화, 타협 등으로.
놔...!
커크가 이를 갈자 스팍이 뒤로 꺾은 팔을 더 세게 잡아당겼지. 어깨가 빠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어. 스팍은 비명을 참고 있는 커크에게 대고 분명하게 말해주었지.
네가 함장이고, 내가 적이라고 간주해봐.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거지?
아예 이런 상황이 오지 않게 만들거야...
그건 정답이 아냐. 커크 생도. 전술 평가에서 어떻게 만점을 받은 건지 의문이군.
커크는 교관 앞이라는 것도 잊고 욕설을 내뱉었어. 스팍이 그대로 그를 넘겨 바닥에 눕혔지. 벌칸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인 touch-telepathy 때문에 커크의 분노와 억하심정 등등이 자신에게도 그대로 느껴졌어. 스팍은 거기서 자제해야한다고 생각했지. 스팍은 그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과제를 주었는데, 여느 때보다도 많은 과제였어. 인간이 이틀내에 하기에는 무리인 과제였지. 스팍은 커크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리부터 포기하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았어.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지.
다 했다고?
해오라고 하셨으니까.
이틀 뒤 다시 그의 연구실에서, 커크는 다시 그 앞에 섰어. 스팍은 적어도 커크가 노력하다 정 안되면 하던 것만이라도 들고 올 줄 알았지. 코바야시 마루 테스트도 그렇고, 그 상황에서 대처하는 모습을 보려던 거지 정말 그 과제를 해내오길 기대하는 건 아니었거든. 그런데 커크는 진짜 해온거야. 스팍은 믿을 수 없었지. 커크가 나가고 과제를 검사하던 중에 스팍은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어.
이 과제가 그가 혼자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지. 역시 커크, 그럼 그렇지, 주변 친구들을 동원해서 과제를 한 거야. 밥을 사줬든지 돈을 줬든지 어떻게든지 해온거야. 스팍은 커크가 홀로 이 과제를 하며 성장하기를 바랬기 때문에, 이 결과는 또 자신이 원한 결과가 아니었지. 그가 아무것도 안 하고 빈손으로 왔어도 화가 났긴 했겠지만.
커크는 또다시 호출당했어. 그도 짜증이 났어. 왜 자신만 그런 불합리한 과제를 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또 그 빌어먹을 자식과 대화해야 하는지. 커크는 호출을 무시하고 외출해버렸어. 나중에 그것에 대해 추궁받으면 몸이 안 좋았다느니 못 들었다느니 변명할 생각이었지. 안 들키면 되잖아. 안 들키면. 커크는 여전히 그놈의 사고방식을 못 버린 거였지.
그렇게 24시간 이상 커크의 행방이 묘연해졌어. 마치 그대로 도망친 것 같았지. 스팍은 그렇게 생각했어. 자신이 추궁하려는 것을 알고 미리 몸을 피한 것이라고. 하지만 무조건 위험을 회피하는 태도 또한 함장으로서 바람직한 태도가 아냐. 스팍은 결국 그를 찾아나섰어. 그를 발견한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술집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