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프라이즈는 칸과 함께했던 몇 개월간의 일을 애써 잊었고, 스팍은 되살아난 커크가 힘들세라 업무의 양을 줄였다. 전체 업무는 고정되어 있었으나 자신이 그의 업무까지 분담한 것이었다. 덕분에 커크는 자신의 쿼터에서 여유롭게 뒹굴거릴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도 좀이 쑤셔서 결국은 튀어나갈 테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커크는 그 휴식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날로그형 책을 읽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끈한 화면보다 책장을 넘기는 그 느낌이 좋았다. 지구 역사서의 21세기 파트를 읽던 그는 책을 배 위에 올려둔 채 소파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커크는 잠든 와중에도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지난 몇 개월간의 영향으로 (물론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얕게 자는 경향이 있었다. 커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스팍?
부름에 되돌아온 것은 피식, 하는 비웃음이었다.
누구야?
찬물을 맞은 듯 싸한 느낌이 들었다. 커크는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감히 자신을 비웃다니? 커크가 아는 한 이 엔터프라이즈 내에서 저런 식으로 함장을 비웃을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맥코이나 스콧 정도면 모를까. 하지만 그들도 이토록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반응은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칸?
그게 신호라는 듯 칸이 다리를 들어 커크의 복부를 찼다. 갑작스런 충격에 커크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발을 붙잡았지만, 그는 더 세게 그를 짓밟았다.
커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 별의 동굴 안에, 흙더미에 파묻혀 죽었든지 평생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이, 이건 꿈이야. 하얗게 질린 커크가 중얼거렸다.
맞아. 꿈이야. 칸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너와 나의 꿈이지.
칸이 발을 거두었다. 그 틈에 커크는 급히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칸이 빨랐다. 그는 커크의 얼굴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커크가 쿼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바닥에 엎어진 커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아. 제임스. 그 멍청한 얼굴은 여전하군.
칸은 그를 사뭇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석지.
아악!
커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칸이 커크의 다리를 짓밟고 있었다. 여러 차례 강하게 걷어차기도 했다.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다정한 태도도 더는 없었다.
커크는 틀어진 다리를 부여잡고 버르작댔다. 지독한 고통에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이게 정말 꿈일까? 현실일까? 그동안 시달려왔던 악몽과 같은 종류일까? 이게 꿈이라면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안 돼. 칸. 안 돼....
커크는 칸의 다리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칸은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그를 다시 걷어찼다. 그리고 넘어진 커크의 얼굴을 밟았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제임스. 말해봐.
엔터프라이즈를-
볼을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칸이 조롱했다.
다시 말해봐.
엔터프.... 욱.
칸이 커크의 머리채를 잡고 속삭였다.
나를 외딴 별에 생매장시키고 나니 잠은 잘 오던가? 그 벌칸 잡종과 섹스는 많이 했고? 오. 제임스. 어디 말해봐. 고고하신 캡틴 나리.
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커크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크는 신음을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뼈가 어긋난 다리 때문에 일어설 수는 없었지만, 커크는 비척비척 기어 다시 칸의 발밑으로 향했다.
칸.... 나는, 나도 죽으려고 했어. 네 곁에서.
그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비웃음과 함께 칸이 커크의 손을 밟았다. 커크는 다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통보다도 심리적인 절망이 더 크게 자신을 잠식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칸을 막을 수 없었다. 공포에 몸이 떨렸다.
정말이야. 믿어줘, 제발.
하지만, 칸이 운을 뗐다. 그는 발로 커크를 밀어 몸을 돌렸다. 바닥에 누운 자세가 된 커크는 몸을 움츠리며 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넌 죽지 않았지. 아, 제임스. 내가 원한 건 하나뿐이었는데. 넌 끝끝내 '가족'을 배신했어.
칸의 발이 커크의 다리를 바깥쪽으로 밀었다. 서서히 다리가 벌어졌지만, 커크는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차게 고개만 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가 마음 속에서 극명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냐, 넌 내 가족이 아냐. 내 진짜 가족은 이 엔터프라이즈야. 젠장. 칸!! 내 몸에 네 피가 흐른다고 해서 네가 내 가족일 수는 없어...!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군. 칸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 같이 죽으려고 했었어!! 커크가 팔로 눈을 가린 채 소리질렀다. 너만 남겨둘 수도 없었고, 이런 나도 살려둘 수 없었어!
젖어가는 소매를 가리려고 애쓰며, 커크가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했어. 죽고 싶었어.
무엇을 위해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칸의 목소리에 커크는 뒤늦게 반문했다.
뭐... 뭐?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같이 죽으려 했냔 말이다.
그 순간 칸이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커크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커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 칸이 무정하게 말을 이었다.
에, 엔터프라이즈를 위해서.
거짓말 마.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흐윽!
커크가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덜덜 떨며 그의 다리를 잡자, 칸이 으르렁거렸다.
놔.
커크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에 따랐다. 하지만 두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바닥만 긁었다.
다시 대답해.
.......
대답하라고 말했지. '캡틴'.
칸이 발끝에 힘을 주었다. 짓누르듯 다리 사이를 비벼대자 결국 커크의 입에서 비명처럼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스팍, 스팍을 위해서였어!
커크가 몸을 비틀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스팍이 힘들지 않게.... 너를 죽이려고 했어. 칸. 그리고 너를 위해서 나도-
칸이 말을 받았다.
나를 위해 같이 죽으려 했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에서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칸의 말이 맞았다. 스팍을 위해서 칸을 없애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와 같이 죽고자 했던 건 다른 이유였다.
제임스.
어느새 칸이 몸을 굽히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나를 봐. 커크가 그 말에 따르지 않자 칸은 그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향하게 했다. 벌써 울긋불긋 피멍이 올라오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칸은 그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크 또한 증강인간의 능력을 가졌기에, 그 상처도 천천히 낫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칸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또는,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까 두려워서.
죽지 말고 살아서 내가 이 우주에 있었다는 증거가 돼.
싫어....
너는 내 유산(legacy)이야. 나는 네 몸에서, 혈관에서,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지. 그러니 제임스. 언젠가는 '우리'의 가족을 깨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커크가 강하게 도리질쳤다. 칸은 그런 커크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커크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막막함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지금의 '가족'이 모두 죽고, 시간이 흘러서 우주에 너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될 때. 넌 제발로 나를 찾아올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때까지 기다리지.
칸이 커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커크는 그를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흐느꼈다. 칸이 몸을 일으키고 멀어질 때까지도, 커크는 눈을 거칠게 비비며 울고 있었다.
...함장님?
커크가 번쩍 눈을 떴다. 스팍이 그 무표정한 얼굴에 적지않게 우려의 빛을 띄운 채 앞에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본딩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인지되어 급히 방문했습니다.
커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공포로 벌렁거리던 심장과 두려움,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온통 머릿속을 휘저어놓고 나간 칸 때문에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스팍이 손을 뻗어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자, 커크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응. 커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짐.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스팍이 팔을 뻗어 커크를 안았다. 여느 때보다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과 미약한 떨림, 그것들이 스팍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스팍은 커크를 꽉 안아주었다: 커크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의 단단한 품 덕분에 커크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스팍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커크가 중얼거렸다.
계속 함께 있어줘. 스팍.
물론입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당신의 옆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마워.
커크는 스팍을 더욱 꽉 껴안았다. 그의 느린 심박과 서늘한 체온, 안정적인 말투가 감사했다. 또다시 칸의 악몽을 꾸더라도- 스팍이 함께 있는 한 버틸 수 있겠지. 커크는 결국 자신의 불안을 스팍에게 말하지 못했다. 이게 언젠가 또 그들 사이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있자. 커크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본즈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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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이란 무엇일까. 상실이란 또 무엇일까. 스팍은 침묵을 씹으며 골똘히 사고했다. 몇 번이나 입 안에서 굴리고 핥아 차츰 원형이 되어가는 작은 사탕처럼, 그런 감각에 무뎌질 수 있을까. 그는 잃은 것이 너무도 많았다. 고향, 어머니, 완전한 벌칸으로서의 삶- 혹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삶, 있었을지도 모르는 친구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되찾은 것. 제임스 커크.
스팍은 떠올렸다. 그가 자신을 거절했을 때 얼마나 상실감에 시달렸던가를. 그리고 얼마나 큰 절망감이 자신을 잡아먹었는지를. 그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도 몇 번, 벌칸에게 있어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는 감정 표출도 여러 번.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스팍은 끊임없이 내면의 자신에게 자문을 구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한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사랑한다. 그렇다면 만약-.
그가 본인을 더이상 사랑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의사에 따라 그를 사랑하는 것을 중지해야 하는가. 혹은, 나의 의사에 따라 계속 그를 사랑해야 하는가.
스팍은 점차 복잡해지는 질문에 짧게 숨을 토하고 입을 다물었다. 스팍은 과학자였지 독심술사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토대로 예상되는 부차적 사실을 예측할 뿐, 그의 심리와 생각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종족적 특징 (이자 장점) 중 하나인 본드였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무능력한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때마침 터보 리프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만 가득찬 발걸음 소리가 브릿지를 울리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왜 부르셨습니까, 잘나신 부함장님?"
"개별적으로 얘기하지."
스팍과 맥코이는 자리를 이동했다. 여전히 한쪽 눈썹을 심하게 찡그리고 틱틱대는 맥코이는 일전 커크와 칸의 일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맥코이 또한 커크의 친우이니만큼, 칸의 일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스팍은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타개하는데 도움을 요청해도 되겠지.
"칸이 현재 함장님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니, 칸을 제압하기 위해 전략을 짤 것을 제안한다."
"그럼 왜 장교급 회의를 소집하지 않고?" 맥코이가 팔짱을 낀 채 되물었다.
"그가 의심할 가능성이 높아. 함장님을 배제하고 최소의 인원으로 진행한다. 먼저 가능한 플랜에는 3가지가-."
맥코이가 스팍의 말을 끊었다.
"잠깐! 짐 없이 진행하겠다고? 그거 월권 행위인 건 알지? 걸어다니는 규정집 양반아?"
"그 호칭에 대해서는 넘어가도록 하지. 현재 함장님께서는 1순위 위협인 칸에 의해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야. 부함장인 내게 권한이 있어."
"이 머저리 같은-."
맥코이는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 또한 복잡하게 생각하는 듯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내려가서 짐이랑 무슨 얘기 했어? 아니, 애초에 왜 너같은 고블린이 실종되었던 건데?"
"함장님과 칸이 내려오도록 의도적으로 행동했어. 저곳에 칸을 두고 이 별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함장님께서는 내 계획에 동의하지 않으셨고-, 결국 마인드멜드를 통해 그가 협박당한 사실과 칸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음을 일부 알아냈지. 이것으로 의문점이 충분히 해소되었다면 플랜에 대해 다시 설명하겠어."
맥코이가 입을 떡 벌렸다. 스팍은 그 반응에 다소의 의아함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만. 동의하지 않았다고?"
"칸을 두고 간다는 내 계획에 찬동하지 않으셨다. 또한 마인드멜드도 거부하셨지."
"그런데, 너, 방금 그 마인드멜드인지 뭔지 했다고 말했잖아."
스팍이 긍정했다. 전혀 아무런 문제점을 찾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그가 자의로 내게 허락할 일은 확률적으로 일어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강제로 해야만 했어. 닥터 맥코이. 이해하지 못하나? 칸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함장님을 차지하고 있어. 당신이 좋아하는 문학적 비유를 예로 들자면 그를 '잠식'하고 있지. 함장님은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된다."
맥코이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었다. 스팍은 그제야 그의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파악하고 멈칫했다.
"스팍!! 이 생각없는 자식아!"
"그 호칭은 부적절해. 나는 충분히 사고하고 거듭 고려하여-."
"아. 그래? 그럼 이 병신아!!!"
스팍이 이에 대한 항변을 할 새도 없이 맥코이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네가 한 짓이랑 칸이 한 거랑 뭐가 달라?? 마인드멜드라고 했어? 어? 그 정신융합인지 뭔지, 그걸로 머리를 들쑤셔 대면 짐이 좋아라~ 하면서 받아줄 것 같아? 아무리 본인이 지금 위태로운 상황에 있다 해도, 그걸 네가 나서서 해결해 준다고 하면, 짐 커크 그 자존심만 센 자식이 감사해 할 것 같냐고!"
내심 찔리면서도 스팍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나중에는 감사하겠지. 일단 나는 그의 연인이니, 그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
"의무 좋아하시네. 네가 주장하는 건 권리야. 네 마음대로 할 권리."
결국은 스팍이 인상을 썼다. 맥코이 또한 스팍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모두 그를 위해서야."
"그런 말로 포장하지 마." 맥코이가 거진 으르렁거렸다.
"1차적으로 엔터프라이즈를 위해서고, 2차적으로 그를 위해서야."
"그만하라고. 너 진짜 짐 커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한숨을 내쉬며 맥코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 반응에 스팍 또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이에 못지 않은 질투가 치솟았다. 맥코이가 커크의 오랜 친우이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주먹은 이해하지 못했다.
쾅, 하고 스팍이 컨퍼런스실의 책상을 내리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실금이 뻗어나갔다.
"모른다.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 그를 만나기 전의 일들은 알지 못해. 그가 어떤 삶을 영위했는지,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해. 하지만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아. 그가 나를 사랑한- 사랑했다는 것도."
스팍의 감정 표출에 맥코이가 놀랐는지 팔짱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상은 풀지 않은 채였다. 스팍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놀라웠으나 그가 그렇게까지 감정에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맥코이 또한 스팍이 진심으로 커크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말았다. 방법이 너무도 틀렸을 뿐.
"하지만 그가 나를 거절한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아. 나의 어떤 행동이 그를 화나게 했는지 말해주지도 않아. 닥터 맥코이. 나는 이런 방식 밖에는 알지 못해."
"그를 존중해(Respect him)."
맥코이가 툭, 던졌다. 짧은 두 단어가 순간 제대로 맞물리지 않았다. 스팍이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를 존중해. 닥터 맥코이. 함장으로써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아니, 그냥! 그냥 그의 의사를 존중하라고. 솔직히 말할게. 내가 봐도 그놈이 멍청하고, 답이 없고, 무리하게 일을 진행하긴 해. 규칙도 밥먹듯이 어기고."
옳은 말이군, 스팍이 긍정했다. 맥코이는 그런 스팍에게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 녀석도 그것밖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너랑 똑같다고. 쌍으로 멍충한 자식들아. 그 녀석이 뭔가 제대로 못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제임스 커크야. 바보같이 탐사에 내려가서 심심하면 다쳐오는 게 이해가 안 가? 그게 제임스 커크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 스팍이 입을 다물었다.
"젠장, 내가 대체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빌어먹을. 짐이 생각이 없어 보여도, 생각하고 고로 존재하는[각주:1] 하나의 인간이야. 아무리 그를 위해서라고 해도 기분 나쁜 일은 기분 나쁜 거야. 알아들어?"
스팍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입을 열지 못하는 건지도 몰랐다. 스팍은 미간을 모으고 곰곰히 생각했다. 맥코이의 말이 일부 맞다는 판단이 들었다. 분명 자신의 잘못도 존재했으며, 커크의 잘못도 있었다. 그것은 둘이 차근차근 이야기하며 풀어나가야 할 일이리라.
맥코이는 씩씩대며 모든 속을 풀어내고는 쳇, 하며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땀이 났다. 자신도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유지하지 못한 주제에 잔소리라니, 그럴 자격이 되나 싶었지만 커크나 스팍이 이런 식으로 어긋나는 건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다. 파멜라는, 나는 파멜라에게 잘 했던가. 이런 것을 진작에야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텐데.
긴 한숨을 내쉰 맥코이가 스팍을 돌아보았다. 스팍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 있었고 여느 때보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에 걱정이 된 맥코이가 짐짓 투덜거리며 물었다.
"알고 나니까 무섭냐?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 분명 금방 화해할 수-."
"맥코이."
"응?"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스팍이 양 주먹을 세게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맥코이가 의사의 직감으로 급히 다가가 스팍을 살폈다. 저체온인 벌칸의 특징상 땀은 흘리지 않았지만, 땀구멍이 있었다면 땀을 줄줄 흘릴 것 같은 모양으로 스팍이 이상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본드가 다시 연결됐어……." 스팍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본드? 뭐?"
"현재 칸이 함장님과 관계하고 있고, 나는 정신적 연결로 그걸 느낄 수 있어. 맥코이. 말해봐.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참아야 하나? 이 상황을 존중해야 해? 조언을 요구한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아직까진 1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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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을 올려보낸 뒤, 커크는 회의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든 스팍이 읽어낼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국 커크는 될 수 있는 한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
커크는 가만히 앉아 테이블을 두드렸다. 사실 스팍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칸을 제압하고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든지 어떻게 하든지 간에, 해결할 방법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걸로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칸의 혈청에 의해 그와 같은 증강 인간이 된 커크는 수만 가지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이 가능했다. 시한 폭탄, 생체 인식 기술, 더티 밤, 칸이 마음만 먹으면 엔터프라이즈는 그 순간 우주의 먼지로 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칸이 자신이 죽는 즉시 엔터프라이즈가 폭발하도록 설정했다면? 혹은 일정 시간마다 패스코드를 입력하지 않으면 폭발하는 폭탄이라면? 자신의 생체 정보로만 해제할 수 있는 자폭 알고리즘을 해킹해 넣었다면? 커크는 칸이 생각할 수 있는 만큼 명민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그가 했던 말 그대로 '그만큼 똑똑했다'.
때문에 스팍과 같이 간단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커크는 여전히 칸이 무엇을 위해 자신을 치료했고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단번에 엔터프라이즈를 인질로 잡아 모두를 죽이지 않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커크가 아는 칸은 어떤 것에도 연연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게임에 불과했고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은 무언가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어떠한 한 가지 이유. 그것 때문에 그는 엔터프라이즈에 남아 있기 원했다. 동시에 그게 바로 커크가 알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삐빅, 소리를 내며 회의실 문이 열렸다. 커크는 고개를 돌려 인물을 확인했다.
"끝났다."
뚜벅뚜벅 걸어들어온 것은 칸 혼자였다. 아레비크 대표는커녕 평화유지군조차 따라붙지 않았다. 흉흉한 바람소리만 통로를 채우다 무정하게 닫히는 문에 의해 복도로 쫓겨났다. 칸의 손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고, 얼굴은 표정 없는 유령처럼 희었다. 단지, 묵직하게 젖은 듯 보이는 스타플릿 공용 셔츠만 지독히도 검었다. 커크는 그런 칸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모든 정황을 알아차렸다. 커크가 한숨을 쉬며 다시 엔터프라이즈에 연락을 넣었다.
"남은 보안 요원들과 나, 칸을 빔업시켜줘. 협상은 결렬됐어."
아예, 캡틴. 그에게 대답하는 술루의 목소리를 들으며 칸이 입술 끝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버릇없는 강아지는 챙겼나 보군."
"네가 알 바 아냐. 협상 결렬에 대한 변명이나 해보시지." 커크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금색 빛이 두 사람의 몸을 휘감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그 빛무리 사이에서, 칸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정당방위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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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비크 대표와 그들의 일행은 카다시안의 도망자들이었다. 그들은 카다시안에서 훔쳐온 듀테륨 운반 셔틀을 이용해 행성 연방을 속이려 했고, 일단 행성 연방과의 협상 하에 연방 소속이 되면 카다시안의 추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추적을 피하지 못한다 해도 일단 협상이 체결되는 순간 동맹으로서의 효과가 발휘된다. 그럼 행성 연방은 꼼짝없이 카다시안과 전면전을 펼치게 되는 것이었다. 협상은 결렬되어야 마땅했다.
-라고, 스팍이 보고했다. 커크는 별 이견 없이 그대로 상부에 보고하라 지시했다. 그 외의 대화는 없었다.
"제 시프트에 작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터보 리프트로 향하던 스팍을 커크가 불러세웠다. 스팍은 희미한 희망을 갖고 그를 돌아보았다. 한바탕 하고 헤어졌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커크는 마치 실드를 내린 듯 견고하게 자신의 생각을 방어하고 있었다. 본드에 대한 개념조차 없던 커크가 어떻게 자신의 정신을 차단하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동시에, 화가 나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이것 또한 칸의 영향이 틀림없었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시프트 변경됐어. 확인해."
커크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스팍은 씁쓸한 감정을 갈무리하며 PADD를 들어 교대 시간표를 확인했다. 캐롤의 부서 이동과 칸의 전입으로 인한 브릿지 멤버들의 시프트 변경이 있었다. 가장 먼저 자신과 커크, 칸의 시프트를 훑어본 스팍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기존에 동일한 시간대였던 커크와 스팍의 시프트가 변경되고 칸과 커크가 완전히 동일한 시간대로 붙어 있었다. 칸은 (심지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어도)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였다. 커크는 그런 칸을 제어할 수 있는 게 자신뿐이라 여겼다. 그래서 커크는 칸을 감시하는 동시에 브릿지 멤버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서라도 시프트를 변경한 것이었지만, 스팍은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커크가 어떤 의도로 변경했는가를 알았기에 더 격렬하게 분개했다.
"함장님."
"이의는 받지 않아."
스팍이 어떤 말을 할지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커크가 딱 잘라 말했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느껴지지 않는 커크의 얼굴을 보는 것은 말 그대로 고통이었다. 스팍은 조용히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정신적으로도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고 그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내면의 벌칸은 그 어떤 해답도 제시해주지 못했다.
"의자 지켜."
설상가상으로 바뀐 시프트대로라면 곧 칸과 커크가 자리를 비울 차례였다. 커크가 일어섰고 스팍은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커크와 칸이 돌아올 때까지, 아니, 두 사람이 어디로 갈지, 혹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무슨 일을 할지, 자신이 아무것도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답답했다. 게다가 본드가 먹히지 않으니 직접 표현해야 했다. 스팍은 자신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커크는 의외라는 듯 스팍을 돌아보았다. 스팍은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며 아무렇지 않게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상관 말라거나 왜 그런 걸 묻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것에 스팍은 안도했다. 그 사이에 커크와 칸은 터보 리프트에 몸을 실었다. 마치 바람이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건조한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그를 보내야만 한다는 사실에 스팍은 진한 무력감을 느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스팍."
"예?"
터보 리프트가 닫히기 전, 커크가 그를 불렀다. 스팍은 두근거리며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커크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이전에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무슨 일-."
"내 명령 잊지 마."
문이 닫혔다. 잠깐 살아났던 심장도 그만, 죽어 버렸다.
-
엔터프라이즈에는 약 800여명의 크루를 위한 쿼터가 준비되어 있었다. 게스트용 쿼터도 충분했고, 하다못해 중도 하차한 크루들의 빈 자리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칸이나 커크나 다른 공간을 고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커크가 자신의 쿼터를 열었고 칸이 자연스럽게 뒤따라 들어왔다. 불을 켜고 짧게 한숨을 쉰 커크가 책상으로 걸어가는 도중, 뒤에서 삐빅거리며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커크가 돌아보며 물었다.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뭇 긴장한 커크가 재차 입을 열었다.
"뭐냐니까? 왜 잠궈.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누구." 칸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커크는 그 단어 하나만으로 칸이 불쾌한 상태라는 것을 파악했다. 마치 어린 시절 귀가하는 삼촌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날 헛간에 숨어야할지 소파에 앉아있을지를 결정했던 것처럼, 커크는 본능과도 같은 감각으로 칸의 기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커크는 가까스로 표정을 바꿔 유하게 대답했다.
"아냐.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아무도 안 올 거야."
하지만 상대방이 어떠한 감정 상태인지 안다고 해서 이에 대처할 방법조차 아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공식을 알아도 그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답을 낼 수 없듯이. 외국어를 읽을 줄 알아도 의미를 모르면 해석할 수 없듯이. 커크는 칸이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띄우는 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달았다.
"제임스. 닥터에게 털어놓으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
"기관실장이 뭐라도 찾아내길 기대하면서?"
"!"
다 틀렸다,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칸이 천천히 걸어왔다. 아직 포기하긴 일렀다. 커크는 끝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밀 점검이 필요해서 그랬어. 폐기된 연료봉이 상당하다기에-."
"그런데." 칸이 그의 말을 잘랐다.
칸의 손이 커크의 머리에 닿았다. 커크는 순간적으로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것만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왜 그렇게 떨고 있지?"
칸이 커크의 머리를 느긋하게 쓰다듬었다. 커크는 이 낯익은 분위기를 알았다. 폭풍이 치기 직전의 고요함. 잔잔함. 그리고 일말의 부드러움. 칸이 번개처럼 자신을 몰아붙이기 전에, 아주 잠깐 허용하는 순간의 평화. 미칠 것 같은 공포를 뒤덮어 본모습을 가리우는 여유.
커크는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칸……." 커크가 토해냈다.
칸이 기다렸다는 듯 커크의 머리칼을 잡고 뒤로 세게 잡아당겼다. 그 통에 고스란히 드러난 커크의 목선을 그가 입술로 천천히 쓸었고, 커크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커크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칸은 노골적으로 바라보았다. 커크가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올려 칸의 허리를 안았다.
"믿어줘……."
커크는 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정말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무슨 짓이든. 칸을 껴안은 채 커크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아 다리와 다리가 맞닿자 칸도 그의 머리카락을 잡았던 손을 놓아 주었다. 커크는 칸의 반응에 미약한 기쁨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네 말이 맞아. 우월해지니까 이제야 알겠어. 다른 자들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을."
이에 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커크가 하반신을 더욱 붙이며 칸의 가슴에 볼을 부볐다. 거짓 애정을 가득 담아.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응원 댓글은 제게 큰 힘이 됩니다 전 아마추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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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공기와 호흡과 시간이 멈췄다. 실제로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스팍은 커크가 자신을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스팍이 커크의 얼굴에 손을 붙인 채로 가만히 있자 커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더, 단호하게.
"하지 마."
커크의 차가운 목소리가 스팍의 심장을 한 움큼 베어냈다. 커크는 손을 들어 스팍의 팔을 떼어내려 했지만, 스팍은 버티고 서서 굳은 얼굴로 커크를 내려다보았다. 커크가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야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로 커크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만약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견을 표시할 리가 없었다.
"칸이 당신을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당신과 칸을 이곳으로 불러냈고, 저는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이곳에 남겨두고 갈 생각입니다. 스타플릿에는 그가 임무수행 중 실종되었다고 보고하면 됩니다."
"너 제정신이야?" 커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언제나 정상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스팍을 향해 커크가 눈을 치켜떴다.
"그리고 뭐? 네가 날 불러냈어? 일부러 연락을 끊은 것도, 전부 다 네 계획이었어?"
"그렇습니다(Indeed). 당신이 그렇게 행동하도록 해야 했습니다."
"너, 너또 날 감시한 거야? 본드로?"
올 것이 왔다. 스팍은 감지했다. 하지만 그에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도 스팍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커크의 마음은 변함없을 거라고. 자신이 그를 이해하는 만큼 그도 자신을 이해하리라고. 자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 남자는 알아채 주리라고. 몇 번이고 부딪치고 싸웠지만, 결국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다고. 벌칸으로서 논리와 이성을 신봉하는 만큼, 스팍은 제임스 T. 커크를 믿었다.
"본드 끊어."
아니, 믿었었다. 그 말이 들리기 전까지는.
스팍이 끝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커크의 얼굴은 섬뜩하리만치 희푸르고 평온했다. 그 무신경한 모습에 더 분노라는 감정이 치밀어올랐다. 커크가 이럴 리가 없었다. 이건 자신의 커크가 아니었다. 스팍은 거칠게 항변했다.
"지금 그 의미를 인지하고 발화하는 중입니까? 본드는 그렇게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짐, 저는 벌칸에 대한 당신의 이해력을 의심할 수밖에-."
"그만."
커크가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무 생각도. 스팍은 그 매정한 모습에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던 소름이 온몸에 돋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포와 닮아 있었다. 심장이 조여들었다.
"짐이 아냐. '함장님'이지(Not Jim. 'Captain')."
짧은 단어들이 스팍의 영혼을 잔인하게 할퀴었다. 딛고 선 땅이 그대로 무너져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공허한 느낌이었고, 벌칸에서 소중한 누군가를 잃기 직전처럼 심장이 멎는 위기감이었다. 아니, 사실 그 심장은 이미 블랙홀에 의해 사라졌다. 참을 수 없을만큼의 허전함에 스팍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숨을 토해냈다.
"함장님……."
"네 계획은 불허해. 새로운 명령을 내리겠어. 가장 빠르게 본드를 끊어."
안 됩니다. 스팍은 속으로 강력하게 반발했다. 커크가 마음으로 들어주길 바라면서. 하지만 커크는 마음을 닫은 듯 완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다. 스스로 생각을 내보이려 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 그 막막한 단절감에 손끝이 저릿해져 왔다. 얼굴로 피가 쏠렸다.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스팍은 애써 주먹을 쥐었다 펴면서 그것을 감당했다.
"함장님. 제 계획은 다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과 엔터프라이즈의 안전을 위해, 존재하는 위협을 제거하려는 것뿐입니다. 어째서 그를 두둔하시는 겁니까?"
커크는 답하지 않았다.
"함장님. 대답해주십시오."
스팍이 재차 요구했지만, 커크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스팍은 그의 턱을 잡아 돌리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커크가 이렇듯 멋대로 행동할 때마다 고통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의 몫이었다. 언제나.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왜 참아야 하지?
"스팍…?!"
스팍은 커크의 위에 반쯤 올라탄 채로 커크의 입을 막았다. 의자에 앉아있던 커크가 다급히 발버둥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의자만 달각거리며 비명을 지를 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스팍이 눈을 감고 커크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커크는 눈을 크게 떴다.
마인드 멜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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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스팍은 마인드 멜드를 두 개체의 양자접속, 즉 동기화와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벌칸들은 그것을 정신적 성관계라 여기기도 했으나 스팍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닥터 맥코이라면 맛깔스러운 표현을 던져주었겠지만, 스팍은 그런 묘사를 쓰는데 어려움을 느끼곤 했다. 그는 자신이 아는 것으로만 사물과 사건을 설명해낼 수 있었다. 어쨌든 스팍은 커크의 머릿속에 일명 '접속'했을 때 강한 거부반응을 경험했다.
스팍은 아랑곳하지 않고 커크의 머릿속을 뒤졌다. 서랍을 뒤지듯 기억들을 끄집어 내고, 책을 펼치듯 하나하나 헤집었다. 그리고 결국은 칸과 대화한 내용부터 그와 잔 부분까지 모조리 읽어냈다. 역시, 라는 마음이 들었다. 본인은 꿈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칸이 탈출했음을, 진작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커크는 칸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를 안타깝게 여기면서도 그를 증오했고, 동정했고, 혐오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물론 커크가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예민한 감수성 탓만은 아니었다. 칸이 커크에게 속삭여댄 말들이 그의 안에 명령어처럼 자리잡았고, 뿌리를 내린 것이리라. 그 결론에 이르자 스팍은 다시금 분노했다.
칸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만해!!"
커크의 외침에 스팍은 순식간에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커크가 온 힘을 다해 스팍을 뿌리쳤고, 강제로 중지된 마인드 멜드 때문에 스팍은 정신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커크도 융합되다 만 기억 때문에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 하나는 명백했다. '실망'이었다. 스팍은 자신의 동의 없이 마인드 멜드를 행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데도 기억을 가져갔다. 자신을 감시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함장님." 스팍이 한 걸음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
이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힘들었다. 커크는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에 대한 실망과 스팍에게서 마지막으로 전해진 감정인 분노, 제 감정도 아닌 것과 실제 자신의 분노가 뒤섞여 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커크는 이를 부딪치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칸이 엔터프라이즈를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했어. 난 그걸 막을 방법을 찾을 때까지 무슨 짓이든 할 거고. 그 이후에 칸을 생명유지장치에 처넣을 거야."
스팍이 이에 뭐라 답을 하기도 전에 커크가 싸늘하게 웃었다.
"아, 마인드 멜드로 다 봤겠지? 괜히 얘기했네."
"함……."
"네 도움은 필요없어. 여기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 올라가."
커크가 즉시 커뮤니케이터를 들었다. 스팍 중령 빔업시켜, 라고 딱딱하게 내뱉는 어투에 스팍은 그저 입을 벌린 채 커크를 바라보았다.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칸을 고문하는 방법도 있었다. 물론 커크는 인도적인 차원에서 반대하겠지만, 그것 또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칸은 커크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힌 남자였고 그렇다면 그가 어떤 고통을 받든지 커크는 개의치 않아야 하는 게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아니면 정말로-.
스팍은 자신의 몸 주변에 나타난 황금색 빛무리를 보면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정말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지막 추론이 떠올랐다. 커크는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몸을 돌린 채였다. 스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은 칸을-."
공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와, 순간의 적막, 눈부신 빛에 감싸여 스팍은 전송실에 내려섰다.
"-좋아하는 겁니까."
텅 빈 회의실 안, 커크가 주먹을 들어 눈가를 거칠게 비볐다. 방향 잃은 대답이 헛되이 허공을 떠돌았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오늘부터 폭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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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휴식 시간이야? 10분, 그 정도밖에 안 지났어! 말이나 돼? 그쪽이 숨기는 게 있겠지!"
복도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가는 커크를 따라 맥코이도 걸음을 빨리했다. 커크는 즉시 리프트에 탑승했고, 우후라는 빠르게 앞서 일어난 일들을 요약해서 보고했다.
"휴식을 요청한 것은 저희 측입니다."
"뭐?" 커크가 눈을 황망하게 떴다.
"스팍 중령님께서 휴식을 요청하셨고, 보안 회선으로 아레비크의 저의를 간파했다고 말씀하신 후 통신이 두절되었습니다. 긴급 보안 프로토콜에 따른 연락이 오지 않는 상태입니다. 함장님."
2차 협상 재개까지 3분 남았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커크의 귀에 직접 들어왔다. 리프트의 문이 열리자마자 술루가 벌떡 일어섰지만, 커크는 손을 저어 술루를 다시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커크는 그 와중에도 흘깃 칸을 살폈다. 그는 변함없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직접 간다. 칸이 나와 동행해. 프로토콜대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그 즉시 중립 행성 전체에 경고 메시지를 발신하고 지원을 보내. 알겠지, 술루? 믿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술루 또한 다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크로노스에서 스팍과 커크가 칸을 찾기 위해 내려갔을 때 대신 함장의 자리에 앉았던 것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분주히 손을 움직였고, 칸은 벌떡 일어서서 커크를 향해 다가왔다. 커크의 뒤에 서 있던 맥코이만이 머리를 저으며 그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
"함장과 부함장이 모두 내려가는 건 규율 위반이라고 스팍이 누누히 말했을텐데?"
"내가 언제나 그 반대에 반대했던 거 알잖아."
커크가 씁쓸하게 웃고 칸과 함께 리프트에 들어섰다. 맥코이는 그런 커크를, 도저히 붙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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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돌아가는군. 규약 3조라고?"
커크는 칸의 말에 내심 찔렸으나 아무렇지 않게 리프트의 문을 노려보았다. 칸이 이렇게 나올 줄 예상한 바였다. 그는 브릿지에서는 함장인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주었으나, 단둘이 있으면자신의 이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만약 그가 마음을 바꿔 브릿지에서조차 자신을 압박하려 든다면-. 아마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엔터프라이즈가 그의 손아귀에 빠졌다는 사실을. 커크는 자신이 칸에게 다시 한 번 이용당하는 그러한 장면을 다시는 크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예민하게 구는 건 네 쪽이지. 난 스타플릿 규약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협상은 나 혼자로도 충분해."
하지만, 칸이 운을 뗐다. 커크는 칸이 내뱉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심장 깊숙한 곳을 여지없이 찔러왔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것을 간파했다. 그가 직접 말했던 대로. 모든 것의 모든 것을.
"넌 그가 걱정되서 달려가는 게 아닌가?"
때마침 리프트의 문이 열렸다. 커크는 칸에게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걸어나가 전송기 위치에 섰다. 스콧이 레버를 잡고 있었다. 칸은 얼굴에 미묘한 표정을 띄운 채 커크의 옆에 나란히 섰다.
"2분 남았슈. 함장 나리."
"말할 시간도 아까워. 전송해."
"몸 조심하는 게 좋을 거요."
목적이 협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라는 스콧의 말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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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의 예상대로였다. 커크는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듯 (둘의 생각이 반쯤 공유되고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칸을 데리고 중립 행성으로 내려왔고, 아레비크 종족들의 앞에 섰다. 스팍 또한 본드를 통해 커크가 어떻게 협상을 진행할지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었다.
"1차 협상자와 다르군."
가벼운 갑옷을 걸친 아레비크 종족 대표가 커크와 칸을 맞이했다. 회의장 안에는 종족 대표를 비롯해 한 명의 보좌관, 그를 호위하는 군인 두 명과 중립 행성 소속의 중개자- 이를테면 평화유지군이 회의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카다시안 계통이라는 아레비크 종족은 일반적인 카다시안과 마찬가지로 휴머노이드 종족이었으며, 안면에 돌기가 솟아있는 게 특징이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죠. 전 행성 연방 스타플릿 소속 엔터프라이즈의 함장 제임스 T. 커크고 이쪽은 부관인 과학자 칸입니다."
"우리의 협상 조건을 듣자마자 휴식을 요청한 뒤 협상자를 바꿔 내보낸다?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군. 커크 함장."
"그쪽이 신경쓸 필요는 없는 문제입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건 행성 연방 가입이죠. 심지어 듀테륨을 제공하겠다고. 그렇다면 우리로부터 정말 원하는 게 뭡니까?"
커크의 예리한 질문에 칸이 눈썹을 움직였다. 듀테륨이라면 원자로, 특히 워프 코어에 필수적인 물질이었다. 워낙 희소하여 대량으로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은 고가치의 물질이기도 했다. 때문에 그것을 행성 연방에 제공하겠다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동시에, 믿기 힘든 제안이었다.
"말했다시피 평화와-."
"평화와 동맹으로서의 안전 보장. 그것뿐이라면 정말 좋겠지만, 대표님. 행성 연방은 연방 전체의 안전을 위해 가입 당사 종족을 검증할 의무가 있습니다. 듀테륨 저장고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의심한다는 뜻이었다. 다소 무례한 커크의 말에 아레비크 종족 대표가 불쾌한 듯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커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좋다."
대표가 몸을 일으키자 커크와 칸 또한 일어섰다. 커크는 칸의 어깨를 짚었다.
"칸이 직접 확인할 겁니다."
그들이 동의하고 앞장섰다. 칸은 뒤에서 커크의 멱살을 끌어당기고 속삭였다.
"날 사지로 몰아넣는군. 제임스."
"알아서 살아남아."
커크의 대꾸에 칸이 피식 웃었다. 그들의 제안 자체가 거짓이라면, 지금 안내하는 것 또한 함정일 가능성이 높았다. 원하는 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협상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한다면 협상하러 내려온 자들 일부를 죽이고 카다시안으로 돌아가면 끝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한 큰 문제는 없을 터였다.
"부디 살아있는 그를 찾길 바라지."
"네 시체 정도는 수거해줄게."
칸이 비꼬자 커크가 맞받아쳤다. 곧 칸은 그들을 따라 어딘가로 향했고, 대표와 보좌관을 비롯하여 평화유지군도 모두 자리를 비웠다. 그들은 회의장 밖에서 통로를 지킬 터였다. 홀로 남은 커크는 즉시 커뮤니케이터를 열었다.
"스카티. 혹시 점검 다시 할 수 있어?"
"뭐라굽쇼?"
"중요한 일이야. 칸이 엔터프라이즈에 무슨 짓을 해뒀는지 모르는데, 잘못하면 폭발할지도 몰라."
커뮤니케이터 너머로 스콧이 길게 욕설을 쏟아붓는 소리가 들렸다. 커크는 잠시 커뮤니케이터를 멀찍이 들고 있다가 다시 가까이했다.
"어, 스카티?"
"니미럴 칸이 그 짓을 할 때꺼정 뭘 한거요! 대체!!"
"...풀점검 다시 하고, 알아낼 때까진 아무것도 건드리지 마. 엔진인지 워프 코어인지 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닫고 한숨을 쉬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스팍 또한 어딘가에서 멀쩡히 있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마도 본드 때문이겠지. 칸도 내보냈고 스콧에게 명령도 내렸으니 이제 스팍을 찾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 걸까. 그것도 안전 요원들도 모두 데리고. 그가 알아냈다는 아레비크의 저의는 무엇일까. 그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커크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마음속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이 들려왔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스팍의 목소리였다. 커크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어느새 회의실 안에 들어왔는지, 스팍이 자신의 옆에 꼿꼿이 선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에 걱정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커크는 활짝 웃었다.
"스팍!!"
커크가 벌떡 일어나자 스팍이 그의 어깨를 눌러 강제로 다시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팔걸이를 짚은 채 몸을 기울였다. 졸지에 스팍의 팔 안에 갇힌 커크는 의아한듯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상태로 점점 스팍의 얼굴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커크는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스팍의 손이 마인드 멜드를 하려는 것처럼 자신에게 다가왔다.
스팍은 커크와 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칸이 없는 지금이 기회였고 이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기실 본드로는 완전한 것을 볼 수 없었다.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불완전한 퍼즐을 맞추기 위해서는 마인드 멜드가 필수였다. 스팍에게는 지금 당장, 그것이 필요했다. 그것 외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한마디: 꼬로로로로로로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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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평소였다면 마땅히 이견이 튀어나올 차례였다. 그가 협상보다 탐사를 선호하긴 해도 중요한 임무에는 무조건 자신이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곤 했기에 (원체 나서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브릿지 멤버들은 커크가 응당 자신도 간다며 반박을 하리라 예상했다.
"그럼 그렇게 해."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스팍은 이를 예상한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장교들의 놀란 눈을 뒤로 한 채 터보 리프트로 향했다. 입술을 깨물던 커크는 그런 스팍의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규정에 따라 보안 요원 두 명과 함께 가."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규정을 잘 따르셨습니까, 라고 반박하고 싶은 것을 애써 참은 스팍이 고개를 돌렸다. 커크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져왔다. 스팍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커크가 자신을 따라 협상 자리에 나가지 않는 이유는 칸을 브릿지에 남겨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칸을 이 엔터프라이즈에 둘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칸에 대한 확실한 안전 장치가 보장되지 않는 한, 커크는 칸을 자신의 시야 안에 가둬둘 속셈이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체제였다. 커크는 칸과 같은 공간에 있는 한 그가 엔터프라이즈를 위협하는 것을 본인이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칸 또한 회심한 죄인의 연기를 한다 해도 커크가 있는 상황에서는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에 총을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든 두 사람은 죽을 터였고, 그 말인즉슨 서로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한 적어도 양측 모두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스팍은 리프트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 둘의 관계를 떼어놓을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짐!!"
리프트의 문이 열리자마자 맥코이가 튀어나왔다. 그는 바로 앞에 서 있는 스팍과 어깨를 세게 부딪혔지만, 사과할 생각조차 못하고 잠깐 스팍을 본 후 다시 몸을 돌려 커크에게로 달려왔다. 스팍은 그를 무시하고 터보 리프트에 탔다. 평소라면 스팍 또한 맥코이에게 함장에 대한 예우를 지키라고 잔소리를 했을 터였다. (스팍은 맥코이가 커크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를 편하게 대하는 것을 탐탁찮아 했다) 하지만 왜인지- 정말 왜인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소와 너무 달랐다.
칸의 존재라는 명백한 사실이 그만큼 이 엔터프라이즈의 대기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리라. 그리고 스팍은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쾌'했다. '정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엔터프라이즈를 제자리에 돌려놓기 위해서,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스팍은 터보 리프트에서 내리자마자 보안 요원 두 명을 대동하고 트랜스 포터에 올라섰다. 일단은 임무가 먼저였다.
"얘기 좀 하지?"
한편, 브릿지에는 화를 꾹 참고 내뱉은 맥코이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크루들은 함장과 수석 의료 장교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폈고, 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그런 칸을 곁눈질하며 재차 그를 독촉했다.
"짐. 너 검진이 필요해. 지금 당장."
"닥터 맥코이. 지금 임무중인 거 안 보여? 그리고 분명 며칠-."
며칠 전에 검진 받았는데, 라는 커크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맥코이는 칸이 보지 않는 사이에 빠르게 커크의 목에 하이포를 놓았고 커크는 짧은 외침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본즈!!"
"시야는? 발열 증상은? 내 말은 들려? 함내에 안도리안 감기가 도는 거 알지? 너, 알레르기, 있잖아."
"너 진짜……."
얼굴을 잔뜩 찡그린 커크가 목덜미를 부여잡았다. 벌써부터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커크는 필사적으로 칸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칸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의심이라도 할까 싶어 덜컥 겁이 났다. 커크는 부러 멀쩡한 척 하며 맥코이를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까, 술루가 의자를 맡아.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내게 연락하고."
"아예, 함장님."
술루가 벌떡 일어나 커크의 자리에 앉았다. 술루는 커크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칸을 시야에서 떼어놓지 않았고, 칸은 터보 리프트로 이동하는 커크와 맥코이를 끝까지 주시했다. 맥코이는 그런 칸을 애써 무시하며 커크의 어깨를 부축했다.
-
"연기 참 더럽게 못한다. '너, 알레르기, 있잖아'? 제정신이야??"
커크의 목소리가 고조되자 맥코이가 이에 맞서 목소리를 높였다. 메디컬 베이까지 갈 겨를이 없어 근처의 컨퍼런스 룸으로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맥코이는 가져온 약물을 하이포에 집어넣었다.
"너야말로 제정신이야?? 칸을 뭐 어쩌고 어째?? 미쳤어??"
맥코이가 다시금 커크의 목에 하이포를 박다시피 꽂았고, 커크는 책상에 앉은 채 비명을 질렀다.
"아, 좀 살살 해!"
"이 하이포로 널 죽일 수 있었으면 진작 죽였을 거다. 어떻게 저 새끼를 꺼내놓을 수가 있어? 아니, 도대체 어떻게 저놈이 감히 네 옆에서, 멀쩡하게 이 엔터프라이즈를 돌아다닐 수 있냐고!!"
"내가- 내가 허락했으니까."
커크가 마지못해 답했다. 맥코이가 허탈한 표정으로 커크를 바라보자 그는 그 눈길을 피해버렸다.
"규약 3조……."
"규약 3조?"
맥코이가 반문하자 커크는 입술을 깨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본즈. 제발. 조금만 참아. 내가 다 해결할게."
"이게 참으란다고 될 일이야? 이 빌어먹을 꼬마야!? 함선 전체가 캐롤이 도망치듯 떠나는 걸 보고 들었다고! 그리고 그거 알아? 우리 메디컬 베이에는 칸 때문에 가족을 잃은 사람도 있어!!"
"젠장, 나도 알아!! 안다고!!"
결국 커크가 소리를 질렀다. 자신 또한 칸에 의해 아버지와 같던 파이크를 잃었다. 게다가 그런 칸의 혈청에 의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기까지 했다. 또 칸에게 성폭행 비슷한 것을 당했으며, 이후에는 칸에게 자의로 몸을 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런 칸은 자신을 '가족'이라 칭하며 한껏 우애를 과시했다…….
커크는 이 칸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5년 임무가 끝나기 전에 칸이 엔터프라이즈에 만들어둔 위험을 제거하고 그를 냉동 튜브에 처넣는 것만이 길이었는데, 그 길조차 어느 방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알긴 뭘 알아. 그리고 규약 3조에 의한 우선명령권? 그게 말이 돼? '임박한 몰살 위기 상황에서-'."
"'-스타플릿의 함장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크루들을 보호할 권한을 가진다'."
맥코이가 스타플릿 일반 규약의 열두 번째 문장을 읊자, 커크가 그 끝을 마무리했다. 소리내어 말하는 중에 커크가 어떤 의도로 그 명령을 내렸는지 알아차린 맥코이는 결국 이를 악물었다. 기실 커크는 중대 발표를 하는 중에 넌지시 암호를 보낸 것이었다. 모든 크루에게, 이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크루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오냐. 이제야 알아먹었다. 스타플릿에서 제대로 공부한 놈이라면 이게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건 이해하겠지. 그런데 그게 뭐? 해결할 방법은 있어? 칸이 대체 어떤 식으로 너를 협박했는데?"
"내 목숨 하나라면 당연히 걸 수 있지만, 855명이나 되는 목숨을 걸고 그 게임을 하라고? 못 해."
칸과 커크는 상대방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자동차였다. 치킨 게임이란 20세기, 미국의 갱들이 주도권을 다투며 벌였던 '사망유희'였다. 끝까지 방향을 틀지 않는 자가 게임의 승리자였고 결국 방향을 틀어 목숨을 모면한 자는 겁쟁이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양측 모두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결과는 둘 모두의 죽음이었다. 때문에 커크는 크루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처하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겁쟁이가 되든 칸에 의해 놀아나든 상관 없었다. 그렇다고 또 마커스가 했던 것과 같이, 칸이 지금 자신에게 하는 것과 같이, 72명의 목숨을 걸고 칸을 협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겠지. 그것은 싫었다. 그것만이 커크가 지키고 싶은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짐. 대체 칸이 어떻게 널 협박한 거야. 말해."
맥코이가 커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커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결국 맥코이가 반 협박조로 입을 열었다. 벼룩 예방용 백신 기억하지? 그 또한 스팍과 마찬가지로 커크를 칸과 갈라놓기 위해 어떤 방법이든 쓸 심산이었다. 진정제나 백신이나 뭐든 주사해 커크를 혼수상태로 만들어 두면 그 사이에 스팍이 칸을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커크보다도 맥코이가 스팍을 더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한테 한 번만 더 그 빌어먹을 걸 주사했다간-." 커크가 인상을 팍 썼다.
그 순간 커크의 커뮤니케이터가 울렸다. 잠시 서로를 주시한 끝에,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열었다.
"커크다. 협상은?"
"함장님, 긴급 상황입니다! 중립 행성에 내려간 협상팀과 통신이 되지 않습니다!"
깜짝 놀란 커크가 책상에서 뛰어내렸다. 커뮤니케이터로 전해지는 우후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보안 프로토콜은? 협상 진행중에? 스팍은?"
"협상 휴식 시간 중에 아레비크의 저의를 간파했다는 연락을 마지막으로……. 보안 요원뿐 아니라, 스팍 중령님으로부터도…….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2차, 2차 협상 재개까지는 앞으로 5분 남았습니다……."
커뮤니케이터를 들고 있던 커크의 손뿐 아니라, 커크의 얼굴마저도 하얗게 질렸다.
치킨 게임. 국제정치학에서 사용하는 게임 이론 중 하나로, 어느 한쪽이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이 모두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극단적인 게임. [본문으로]
요 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커크 그리고 스팍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 위: 19금 (NC-17)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 의: 스타트렉 리부트 기반, 다크니스 스포주의, 설정덕후 주의
한마디: 너무 오랜만에 써서 문체가 바뀐 느낌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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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두려움, 공포, 체념, 자괴감.
이 모든 것들이 커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들이었다. 스팍은 함장석에 앉은 채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스팍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전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허공을 응시하듯 어딘가 흐려져 있었다.
스팍은 본드를 통해 전해지는 모든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였다. 커크의 쿼터에서 쫓겨난 즉시 스팍이 행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으니 정신적 연결인 본드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빈 그릇이라도 된 것처럼 커크의 감정을 마음 안에 가득 받아들였다. 그가 느끼는 것을, 그가 경험하는 것을 자신도 경험하고 싶었다. 그게 커크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자 칸을 감시하는 방법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벌칸이란 사실에 이렇게 감사한 적이 없었다.
그 결과, 스팍은 몇 가지 사실을 추가로 알아낼 수 있었다.
첫 번째. 현재 커크는 불안정한 수면 상태에 들어갔다는 것.
두 번째. 아직까지는 칸이 커크와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것.
세 번째. 커크에게 계획이-.
"부함장님. 스타플릿 본부로부터의 연락입니다."
우후라의 보고에 스팍의 생각이 끊어진 실처럼 뚝 멎었다. 스팍은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우후라를 바라보았다. 비록 비논리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지언정, 임무에까지 소홀할 수는 없었다.
"메시지 내용은?"
"행성 연방에 가입을 원하는 아레비크 종족과 협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아레비크 대표의 위치는 베타 우르세 섹터. 정확한 좌표는 수신중입니다."
"술루 중위. 현재 위치에서 베타 우르세 섹터까지 걸리는 시간은?"
스팍의 질문에 술루가 빠르게 대답했다.
"아광속으로 약 4시간 걸립니다."
"진로를 그쪽으로 돌리도록."
"아예, 부함장님."
때맞춰 모든 메시지를 수신한 우후라가 좌표를 읊어주었고, 술루는 스팍의 명령에 따라 엔터프라이즈의 기수를 틀었다. 함장이 위기에 빠진 이 마당에 임무까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스타플릿에서 엔터프라이즈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스팍은 호흡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돈했다.
아레비크라면 행성 연방 가입을 꾸준히 거절했던 카다시안의 친척뻘 되는 종족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서 연방 가입을, 그것도 먼저 요청하고 나섰다? 스팍은 차근차근 그들의 의도를 추리했다. 숨겨진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행성 연방에 가입함으로써 그들이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현재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칸을 커크에게서 떼어놓는 일-.
스팍이 보이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추리 과정 중에 커크와 칸에 대한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없었던 일이었다. 즉, 비논리적인 일이었다.
스팍은 팔걸이를 힘주어 잡았다. 이렇게 감정에 휘둘리다간 두 가지 모두 그르칠 게 분명했다. 현실적으로 동시에 두 일을 해결할 수 없는 이상, 한 가지를 먼저 끝내고 다른 한 가지를 해결할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먼저 해결할 것인가.
스팍은 커크의 일과 스타플릿의 명령을 저울질했다. 자신을 쌀쌀맞게 내보내던 커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지만, 자신을 대신해 그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할 장교가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게 더 효율적일까. 그 생각에 도달하자 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스팍은 마음 대신 머리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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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댱님께서 함교에……. 에에??"
체코프의 가감없는 놀람에 함교의 전원이 터보 리프트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바라본 모두가 체코프와 같은 심정으로 두 눈을 크게 떴다. 커크와 칸이 나란히 서 있었다. 커크가 입은 지휘부의 노란 셔츠와 칸이 입은 검은색 공용 셔츠는 지나치게 서로를 각인시켰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보색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철천지 원수와 같은 관계를 가진 두 사람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함께 있다는 것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엔터프라이즈의 크루 일부는 이것이 벤젠스 호와 맞설 때의 꿈을 꾸는 것인가 싶어 눈을 비비기도 했다.
차라리 과거였다면.
차라리 이게 꿈이라면 좋았을텐데.
스팍과 커크는 속으로 동시에 읊조렸다. 누구의 생각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스팍은 그것이 과도하게 확장한 본드의 영향인지 본인의 생각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커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후라. 전 채널을 열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우후라가 급히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터치 몇 번에 순식간에 엔터프라이즈 전체의 채널이 열렸고,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임무에 집중하고 있던 크루들이 잠깐 손을 놓고 귀를 기울였다.
"중대 발표가 있다."
커크가 말이 떨어지자마자 스팍이 함장석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기에, 스팍은 그것을 막고자 했다.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임무를 앞둔 상황에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함장님. 규정상 장교들과의 상의 없이는-."
커크가 스팍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스타플릿 규약 3번에 의거하여 함장의 우선명령권을 발동한다. 지금 이 시간부로 칸 누니엔 싱은 엔터프라이즈의 비정규 크루로 등록되며, 임시로 과학부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커크가 말을 흐리는 사이 그 공백을 메우듯 카강,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캐롤 마커스였다. 벌떡 일어난 캐롤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서 자신의 PADD를 주워들었다. 그녀는 PADD를 두 팔로 껴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캐롤의 눈동자는 명백한 혼란과 혐오가 뒤섞인 채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함장님. 부서-, 부서 이동을 요청합니다."
"…승인한다. 캐롤 마커스 중위는 기술부로 부서를 이전한다. 엔지니어실로 이동해 스콧 소령에게 새 임무를 배정받도록."
캐롤은 함장에게 대답하는 것도 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 자리에 한시도 있고싶지않은 듯 빠른 속도였다. 캐롤이 터보 리프트를 향해 다가서자, 커크는 칸 앞을 가리고 서서 그녀와 칸이 마주치지 않도록 배려해주었다. 캐롤은 이에 감사를 표하지도 않고 빠르게 리프트 안에 들어섰다.
리프트의 문이 닫히기 직전, 커크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원망의 빛을 읽었다. 캐롤과 커크는 함께 벤젠스 호에서 칸이 그들을 배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함께 칸이 마커스 제독을 죽이는 것을 봐야만 했다. 마커스 제독은 잘못을 저질렀으나 그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였다. 캐롤 마커스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칸은 캐롤의 원수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듯, 캐롤이 큰 눈 가득히 커크를 비난했다. 문이 닫히자 커크는 그것을 애써 잊으려는 듯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그래도 명령은 끝마쳐야 했다.
"…마침 자리가 하나 비었네."
커크의 말이 함교의 허공을 황망하게 떠돌았다. 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칸마저도.
"칸 누니엔 싱은 함교로 배치된다. 그의 임무는 과학 부서의 전반적인 임무와 동일하며,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은 기각한다. 발표를 종료한다."
커크 아웃,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우후라가 채널을 닫았고 함교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자리했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유일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사람은-
"젠장(Dammit). 저게 뭔 빌어먹을 개소리야!"
메디컬 베이에서 달려나온 맥코이와,
"울 함장님 병이 나았다더니 쌩구라 아녀? 저런 미친 짓을 다 허고."
엔지니어실의 스콧뿐이었다.
양쪽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진 현처럼 함교에 긴장이 가득 찼다. 움직이는 사람조차 없었다. 결국 그 현 위에 손가락을 얹은 사람은, 모든 책임과 위계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함장 제임스 커크였다.
"배정된 자리로 가. 칸."
커크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칸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고개를 돌린 커크는 스팍과 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날카로운 눈빛 교환을 감지했다. 스팍이 이동하지 않는 한 칸은 움직이지 않을 태세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네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한다. 스팍."
커크의 말에 스팍은 생애 처음으로 항명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끊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스팍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임무가 우선이었다.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였다. 칸은 자신이 흔들릴 것을 계산하고 이런 구도를 꾸며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팍은 주먹을 세게 쥐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커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칸 또한 순순히 몸을 돌려 캐롤의 자리로 향했다. 칸이 의자에 앉자 양 옆에 앉은 크루들이 주춤거리며 몸을 사리는 게 보였다.
그렇게 상황이 정돈되고 나서야 커크는 함장석에 앉을 수 있었다. 거친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온몸이 피곤했다. 하지만 함장의 직책은 그가 피곤해질 겨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커크는 부러 눈을 세게 짓눌러 비비면서 입을 열었다.
"우리 항로가 어제와 다른 것 같은데. 술루?"
"…스타플릿 본부로부터 받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베타 우르세 섹터로 향하는 중입니다. 함장님."
잠깐 호흡을 놓친 술루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커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명령 내용은?"
함교가 조용해졌다. 보통 때라면 커크의 명령에 즉시 답했을 스팍이 입을 열지 않자, 마지못해 술루가 말을 이었다.
"…아레비크 종족과의 연방 가입 협상입니다."
"협상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여전히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다. 술루는 이미 포기한 모양인지 커크에게 망설임없이 답했다.
"아레비크 대표가 있는 중립 행성까지 도착하는데 남은 시간은 28분이며, 협상 개시 시각까지는 33분이 남아있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았네. 전략은?"
술루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명백히 스팍을 향하여 한 말이었다. 스팍은 언제나 커크에게 이성과 논리에 기초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문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했으며, 협상 측면에서는 전략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