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의 손이 멀어지고 나서도 맥코이는 금방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원형 그대로의 기억도 아니고 한 번 스팍을 거쳤기에 감정이 희석되었음에도 그랬다. 스팍이 거듭 그의 이름을 부른 후에야 맥코이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맥코이는 넋이 나간듯 중얼거렸다. 


우리들이.... 그를 저렇게 만들었어. 

문자적으로는 맞지만, 실체적으로는 달라. 다른 우주의 우리들은 '우리'가 아냐. 


그게 중요해? 맥코이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삿대질을 해가며 항변했다.

 
쟤는 잘못이 없어. 하지만 우리들이, 그리고 또다른 우리들이 쟤를 망가뜨린 거야. 우리 탓이야.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자면, 그는 처음부터 정상이 아니었어. 게다가 그의 신체적 특징은 인간의 범주에 넣기에도 불분명해. 피조물 혹은 발명품에 가깝지. 
젠장, 그가 원해서 저렇게 된 거냐고! 아니잖아! 누가 쟤를 만들었는데? 누가 온 우주에서 제임스 커크의 존재를 지워버렸는데? 대답해봐. 스팍. 똑똑한 네가 어디 말해보라고! 


맥코이의 호통에 단호함을 유지하던 스팍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난처한 표정이었다. 맥코이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스팍의 가슴을 밀쳤다. 


그가 제임스 커크든 아니든 상관 없어. 상관 없으니까.... 나는 그를 다시 보내지 않을 거야. 어떻게 저 녀석을 떠나보내? 저렇게 길잃은 강아지처럼 겁에 질린 놈을.... 아무것도 듣지도 못하고.... 


목소리가 흐느낌으로 변했다. 고개를 숙인 맥코이의 주먹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고, 스팍은 그런 그를 잡아 가볍게 바로 세웠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힘을 주며 강조했다. 


나 또한 그를 보낼 생각이 없어. 그리고 그는 온전히 내 책임이야. 따라서 그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를 보호하고 곁에 있을 거야. 


'내 책임'이라는 말에 맥코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흐려졌다.


...무슨 뜻이지? 
내가 그를 전적으로 돌보겠다는 뜻이지.


즉시 맥코이가 미간을 모아 명백히 불만을 표시했다. 


빌어먹을. 너 진짜, 지금 또 나를 쫓아낼 생각은 아니겠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저 녀석에겐 내가 필요해. 
아예 그와 대면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냐. 하지만 맥코이,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지? 그와 대화할 수도 없고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어. 그런데도 그가 당신을 필요로 할 거라고 생각하나? 


사실이었다. 스팍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적확한 사실을 면도날처럼 들이대며 가슴을 저며냈다. 맥코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방문하는 것은 가능해. 하지만 '짐'을 괴롭히고 또 발작하게 만들 거라면, 그때는 동료로서의 우리의 관계도 재고해야 할 거야. 


그의 협박은 논리적이기에 더 현실적이었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맥코이는 스팍이 자신이 말한 것을 지키리라는 데 의사 자격증을 걸 수도 있었다. 후회와 죄책감을 길게 토해내고, 맥코이가 일어섰다. 몇 주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일들. 그리고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진실들. 스팍이나 맥코이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급속도로 피곤이 몰려왔다. 짓무른 눈을 비비던 맥코이는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하나만 물을게. 너.... 분명 '짐'이라고 불렀지. 저 녀석을 제임스 커크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야? 


스팍은 간결하게 답했다. 


그는 처음부터 '짐'이었어. 


여전히 아리송한 답변이었다. 스팍은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물어버렸다. 맥코이는 그로부터 더 이상의 설명을 듣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커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내일 이 시간에 올게. 


맥코이는 터덜터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스팍은 커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 없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시각을 잃은 상황에서는 어폐가 있는 관용어구였다) 아니, 그가 일어났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을 경우 그가 불안해할 것임을 스팍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스팍이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들을 수 없기에 더욱 마음 놓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이었다. 


짐. 


사실 스팍은 맥코이에게 모든 기억을 보여준 게 아니었다. 아마도 맥코이는 평생 알 수 없겠지만, 스팍이 그를 '짐'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정당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10913. 


그것은 알파벳-숫자 단일치환에 의하면 특정하고 고유한 단어를 의미했다. 그것은 하나의 알파벳에 하나의 숫자를 대응하되, 순차적으로 치환하는 일종의 암호작성법이었다. 예를 들면 A는 1, B는 2, C는 3.... 이런 식이었다. 무척이나 단순해서 20세기 이후로는 잘 쓰지 않는 방식이기도 했다. 스팍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Jim=10913). 


그는 제임스 커크였고, 짐이었다. 그에게 이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스팍도 아는 사람이었다. 커크의 첫 번째 주인. 그를 만들고 그를 버린 자. 그의 눈을 앗아간 자. 모든 사건의 시작점이자 근원.


스팍은 기억 속에서 그와 마주했다. 


그는 미래의 자기 자신이었다. 


스팍은 불의의 사고로 커크를 잃고 난 뒤 평생을 평행 우주 연구에 바쳐, 결국 다른 우주의 커크를 빼앗아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초 예상과 달리 그 계획에는 차질이 있었다. 우주의 간극을 지나는 사이 커크는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고 (미완성된 기술, 과도한 에너지 흐름, 불안정한 연결 통로 등 다양한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신체의 일부만 그의 우주로 넘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커크라는 퍼즐을 '완성'하려는 목적으로 불가피하게 또다른 우주의 커크를 끌어들여야만 했고, 그렇게, 필연적으로 모든 우주에서 커크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스팍은 커크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미약한 온기를 느끼고 안심했다. 그는 살아 있었다. 


-아직까지는. 


미래의, 혹은 다른 우주의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수많은 우주에서 커크가 사라졌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커크는 어쩌면 전 우주를 통틀어 유일하게 남은 제임스 커크인지도 몰랐다. 비록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해도. 


그런 상황에서 그가 제임스 커크의 기억을 갖고 있다든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어주든지 말든지의 문제는 더이상 논의할 가치가 없었다. 온 우주에서 하나뿐인 커크 앞에서 그외 모든 건 불필요했다. 스팍은 약식으로 치른 콜리나르의 제어를 스스로 풀었다. 콜리나르는 언젠가 다시 치를 수 있지만, 커크는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영영 없었다. 


스팍은 커크를 진작 알아보지 못한 것을 사죄했다. 그에게 상처를 준 것에 용서를 구했다. 그를 만들어낸 다른 우주의 스팍을 대신해서 무릎을 꿇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짐. 


스팍은 커크의 손을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들리지 않는, 들을 수 없는 귀에 대고. 


끊임없이, 또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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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