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잔고도 튼튼햇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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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맥코이를 따라 햇살이 내리쬐는 도시를 걸었다. 5월인데도 벌써 한여름마냥 더웠다. 직장인들은 진작 빌딩에 들어가 업무를 보고,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해서 이 한산한 오전 시간대에 거리에 나와있는 것은 그들과 몇 명의 노숙자가 전부였다.


맥코이는 모자를, 커크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커크의 왼쪽 눈은 맥코이가 며칠 동안 애를 썼지만 변함없는 상태였다. 외관은 차치하고 시력이 약간이라도 남아있다는 게 유일하게 다행인 점이었다. 맥코이는 옷장을 뒤져 선글라스와 모자를 찾아냈고, 사람들이 제임스 커크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할 겸, 그의 눈을 가릴 겸 해서 그것을 씌웠다. 처음에는 걸리적거리는 게 불편했는지 자꾸 선글라스를 고쳐쓰던 커크도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코 위에 그것을 얹고 돌아다녔다.


사실 맥코이는 귀찮은 것을 피하는 남자의 특성상 쇼핑을 즐기지 않았다. 여자들과 나갈 때는 짐꾼 이상의 몫을 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랬던 맥코이가 커크에게는 괜찮은 옷을 입혀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맥코이는 거리에 있는 첫 번째 매장에 커크를 끌고 들어가서 거울 앞에 그를 세웠다.


어떤 게 괜찮아? 맘에 드는 게 뭐야?


커크는 푸른 체크 남방과 하얀 폴로 셔츠를 양손에 든 맥코이를 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는 도저히 괜찮음의 기준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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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맥코이는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샀다. 애초에 홀몸으로 살던 데다가 식비를 제외하고는 돈을 쓸 일이 없었기에 통장 잔고는 여직 튼튼했다. 맥코이는 남의 옷을 입은 양 어색하게 벤치에 앉아있는 커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남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꼬맹아. 뭐 마실래?


커크는 선글라스 너머로 맥코이를 바라보았다. 그 투명한 눈빛이 한 번 걸러지고 나니, 맥코이는 그나마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커크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대답하는 커크의 볼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답답한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여기서 잠깐만... 아냐. 같이 가자.


맥코이는 쇼핑백들을 한 손에 움켜쥐고 커크를 이끌었다. 커크는 맥코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맥코이는 내주지 않으려 했지만 한사코 쇼핑백을 나눠들었다. 오히려 저가 짐을 다 들려는 것을 역으로 맥코이가 말리기까지 했다.


맥코이는 아메리카노와 사과 주스를 주문했다. 커크는 뜻밖이라는 듯 그를 돌아보았다. 맥코이가 일종의 뿌듯함마저 느끼며 주스를 건넸다. 각양각색의 알레르기를 갖고 있던 커크가 마음놓고 먹을 수 있던 게 사과였고, 커크의 엄마 노릇을 하던 맥코이는 3년이 지나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있었다.


반면 커크는 담담하게 의문을 표시했다.


왜 모두들 내가 사과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죠?

왜냐니.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어지려던 대답을 간신히 깨물어 삼켰다. 형편없이 뭉개진 발음으로, 맥코이가 답했다.


뭐... 그냥. 사과 싫어하는 사람 거의 없잖아.


커크는 무언가를 곱씹으며 고민에 잠겼다. 맥코이는 그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할 세라 벌써부터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주스를 커크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그 선득한 차가움에 커크가 움칠거렸다.


그냥 받아. 먹기 싫으면 말고.


커크는 군말않고 얌전히 주스를 받았다. 쪼로록, 그가 빨대로 주스를 마시는 모습을 맥코이는 자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자식이라도 보는 듯 흐뭇한 표정이었다. 맥코이와 커크는 이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했고, 더이상 짐을 들 수가 없게 되어서야 그날의 쇼핑을 끝냈다.


집에 돌아와서 둘은 함께 짐을 풀었다. 한 방을 쓰던 스타플릿 생도 시절이 떠올라 맥코이는 커크 몰래 쓴웃음을 삼켰다. 그때는 별것 아닌 일에도 시시덕거리며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았었는데. 밤에는 술이나 까면서 여자 얘기를 하고. 물론 커크가 여자기숙사로 가서 자는 날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커크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자신의 안에만 묻어둔 기억도 굳이 끄집어내 보이는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둔 채, 먼지가 켜켜이 쌓이도록 놔둔 채, 커크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좋았다. 맥코이는 스팍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스팍, 너는 우주가 다시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해.


거실에 커크를 놔두고 맥코이는 방 안에 들어왔다. 스팍으로부터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맥코이는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떤 이유에선지 그가 받지 않아 부재중 메세지를 남기는 중이었다.


난 신을 믿지 않아. 파멜라는 믿었지만 나는 절대적 창조주 같은 게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커크가 돌아온 지금은, 어쩌면, 신이 정말로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그 신의 이름이 우주든지 우연이든지 관계없어. 네가 저녀석이 커크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저녀석은 내게 두 번째- 아니 세 번째 기회고 기적 그 자체야.


맥코이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자못 냉정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분명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어. 네 번호는 앞으로 받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


통신기를 내려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급히 통신기를 집어던진 맥코이가 문을 열자 커크가 얼굴을 내보이며 물었다.


저녁 준비할까요?


맥코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웃었다. 금방 익숙해질 터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같이 하자. 꼬맹아.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