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프라이즈는 칸과 함께했던 몇 개월간의 일을 애써 잊었고, 스팍은 되살아난 커크가 힘들세라 업무의 양을 줄였다. 전체 업무는 고정되어 있었으나 자신이 그의 업무까지 분담한 것이었다. 덕분에 커크는 자신의 쿼터에서 여유롭게 뒹굴거릴 수 있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도 좀이 쑤셔서 결국은 튀어나갈 테지만, 어쨌든. 아직까지 커크는 그 휴식을 즐겼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날로그형 책을 읽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매끈한 화면보다 책장을 넘기는 그 느낌이 좋았다. 지구 역사서의 21세기 파트를 읽던 그는 책을 배 위에 올려둔 채 소파에서 까무룩 잠들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커크는 잠든 와중에도 인기척을 느꼈다. 그는 지난 몇 개월간의 영향으로 (물론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얕게 자는 경향이 있었다. 커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스팍?
부름에 되돌아온 것은 피식, 하는 비웃음이었다.
누구야?
찬물을 맞은 듯 싸한 느낌이 들었다. 커크는 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감히 자신을 비웃다니? 커크가 아는 한 이 엔터프라이즈 내에서 저런 식으로 함장을 비웃을 수 있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맥코이나 스콧 정도면 모를까. 하지만 그들도 이토록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태도를 내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반응은 지금까지 단 한 사람에게서밖에 본 적이 없었다.
-설마.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칸?
그게 신호라는 듯 칸이 다리를 들어 커크의 복부를 찼다. 갑작스런 충격에 커크는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발을 붙잡았지만, 그는 더 세게 그를 짓밟았다.
커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 별의 동굴 안에, 흙더미에 파묻혀 죽었든지 평생 동안 갇혀 있어야 했다. 그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날 수는 없었다!
이, 이건 꿈이야. 하얗게 질린 커크가 중얼거렸다.
맞아. 꿈이야. 칸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너와 나의 꿈이지.
칸이 발을 거두었다. 그 틈에 커크는 급히 그를 제압하려 했지만, 칸이 빨랐다. 그는 커크의 얼굴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커크가 쿼터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눈앞이 새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바닥에 엎어진 커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아. 제임스. 그 멍청한 얼굴은 여전하군.
칸은 그를 사뭇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다리를 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어리석지.
아악!
커크가 비명을 내질렀다. 칸이 커크의 다리를 짓밟고 있었다. 여러 차례 강하게 걷어차기도 했다. 그의 손속에는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다정한 태도도 더는 없었다.
커크는 틀어진 다리를 부여잡고 버르작댔다. 지독한 고통에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이게 정말 꿈일까? 현실일까? 그동안 시달려왔던 악몽과 같은 종류일까? 이게 꿈이라면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안 돼. 칸. 안 돼....
커크는 칸의 다리를 부여잡고 매달렸다. 칸은 귀찮은 벌레를 떼어내듯 그를 다시 걷어찼다. 그리고 넘어진 커크의 얼굴을 밟았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제임스. 말해봐.
엔터프라이즈를-
볼을 짓누르는 힘이 강해졌다. 칸이 조롱했다.
다시 말해봐.
엔터프.... 욱.
칸이 커크의 머리채를 잡고 속삭였다.
나를 외딴 별에 생매장시키고 나니 잠은 잘 오던가? 그 벌칸 잡종과 섹스는 많이 했고? 오. 제임스. 어디 말해봐. 고고하신 캡틴 나리.
칸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커크의 복부를 걷어찼다. 커크는 신음을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뼈가 어긋난 다리 때문에 일어설 수는 없었지만, 커크는 비척비척 기어 다시 칸의 발밑으로 향했다.
칸.... 나는, 나도 죽으려고 했어. 네 곁에서.
그거 참 재미있는 농담이군.
비웃음과 함께 칸이 커크의 손을 밟았다. 커크는 다시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신체적인 고통보다도 심리적인 절망이 더 크게 자신을 잠식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칸을 막을 수 없었다. 공포에 몸이 떨렸다.
정말이야. 믿어줘, 제발.
하지만, 칸이 운을 뗐다. 그는 발로 커크를 밀어 몸을 돌렸다. 바닥에 누운 자세가 된 커크는 몸을 움츠리며 칸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넌 죽지 않았지. 아, 제임스. 내가 원한 건 하나뿐이었는데. 넌 끝끝내 '가족'을 배신했어.
칸의 발이 커크의 다리를 바깥쪽으로 밀었다. 서서히 다리가 벌어졌지만, 커크는 이에 저항하지 못하고 세차게 고개만 저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 하나가 마음 속에서 극명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아냐, 넌 내 가족이 아냐. 내 진짜 가족은 이 엔터프라이즈야. 젠장. 칸!! 내 몸에 네 피가 흐른다고 해서 네가 내 가족일 수는 없어...!
이제야 본심이 나오는군. 칸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하지만 정말 같이 죽으려고 했었어!! 커크가 팔로 눈을 가린 채 소리질렀다. 너만 남겨둘 수도 없었고, 이런 나도 살려둘 수 없었어!
젖어가는 소매를 가리려고 애쓰며, 커크가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했어. 죽고 싶었어.
무엇을 위해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칸의 목소리에 커크는 뒤늦게 반문했다.
뭐... 뭐?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같이 죽으려 했냔 말이다.
그 순간 칸이 다리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커크의 몸이 파드득 튀었다. 커크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해. 칸이 무정하게 말을 이었다.
에, 엔터프라이즈를 위해서.
거짓말 마.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흐윽!
커크가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켰다. 덜덜 떨며 그의 다리를 잡자, 칸이 으르렁거렸다.
놔.
커크는 본능적으로 그의 말에 따랐다. 하지만 두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바닥만 긁었다.
다시 대답해.
.......
대답하라고 말했지. '캡틴'.
칸이 발끝에 힘을 주었다. 짓누르듯 다리 사이를 비벼대자 결국 커크의 입에서 비명처럼 한 사람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스팍, 스팍을 위해서였어!
커크가 몸을 비틀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스팍이 힘들지 않게.... 너를 죽이려고 했어. 칸. 그리고 너를 위해서 나도-
칸이 말을 받았다.
나를 위해 같이 죽으려 했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동자에서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칸의 말이 맞았다. 스팍을 위해서 칸을 없애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와 같이 죽고자 했던 건 다른 이유였다.
제임스.
어느새 칸이 몸을 굽히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고 있었다. 나를 봐. 커크가 그 말에 따르지 않자 칸은 그의 턱을 잡아 강제로 자신을 향하게 했다. 벌써 울긋불긋 피멍이 올라오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칸은 그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커크 또한 증강인간의 능력을 가졌기에, 그 상처도 천천히 낫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칸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서. 또는, 그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릴까 두려워서.
죽지 말고 살아서 내가 이 우주에 있었다는 증거가 돼.
싫어....
너는 내 유산(legacy)이야. 나는 네 몸에서, 혈관에서, 머릿속에서 살아 숨쉬지. 그러니 제임스. 언젠가는 '우리'의 가족을 깨워.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커크가 강하게 도리질쳤다. 칸은 그런 커크의 머리를 품에 안았다. 커크는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었다. 막막함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지금의 '가족'이 모두 죽고, 시간이 흘러서 우주에 너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될 때. 넌 제발로 나를 찾아올거야.
아니야.... 아니야.
그때까지 기다리지.
칸이 커크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커크는 그를 밀어낼 생각도 못하고 그저 흐느꼈다. 칸이 몸을 일으키고 멀어질 때까지도, 커크는 눈을 거칠게 비비며 울고 있었다.
...함장님?
커크가 번쩍 눈을 떴다. 스팍이 그 무표정한 얼굴에 적지않게 우려의 빛을 띄운 채 앞에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본딩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인지되어 급히 방문했습니다.
커크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공포로 벌렁거리던 심장과 두려움, 고통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온통 머릿속을 휘저어놓고 나간 칸 때문에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 스팍이 손을 뻗어 볼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자, 커크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악몽이라도 꾸신 겁니까.
...응. 커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짐.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스팍이 팔을 뻗어 커크를 안았다. 여느 때보다 거세게 박동하는 심장과 미약한 떨림, 그것들이 스팍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스팍은 커크를 꽉 안아주었다: 커크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의 단단한 품 덕분에 커크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스팍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커크가 중얼거렸다.
계속 함께 있어줘. 스팍.
물론입니다. 제 목숨이 다할 때까지 당신의 옆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고마워.
커크는 스팍을 더욱 꽉 껴안았다. 그의 느린 심박과 서늘한 체온, 안정적인 말투가 감사했다. 또다시 칸의 악몽을 꾸더라도- 스팍이 함께 있는 한 버틸 수 있겠지. 커크는 결국 자신의 불안을 스팍에게 말하지 못했다. 이게 언젠가 또 그들 사이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있자. 커크는 생각했다. 그렇게,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