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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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일주일째 커크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커크의 행동에는 변화가 있었다. 맥코이가 여느 때처럼 가져다준 식사를 마치고 그를 따라 거실로 나온 것이다. 커크는 얌전히 식기를 개수대에 넣고 그동안 쌓여있던 수저며 식기들을 설거지했다. 맥코이가 그것을 말리려 했지만, 결국은 스팍이 했듯이 그저 놔두고 지켜볼 뿐이었다.

맥코이는 커크를 시야 안에 둘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발전한 기술 덕택에 원격 검진이라거나 간단한 진단 정도는 가능했다. 세 사람째의 검진을 마치고 카르텔을 작성할 때 맥코이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느꼈다.

커크였다. 아무런 감정도, 생각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그저 자신을 기웃거리는 모습. 맥코이는 어렴풋이 웃으며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이리 와. 여기 앉아도 돼.

커크는 스스럼없이 다가와 맥코이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맞붙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 약간의 빈 틈을 통해 전해져오는 온기가 그나마 그가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객관적으로 커크가 살아있는 인간임은 분명했으나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맥코이는 며칠 전부터 커크가 자신에게 말을 할 것이라는 기대를 접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것이 전화거나, 이웃집에서 틀어둔 드라마 소리겠거니 하고 가볍게 넘겨버릴 뻔 했다.

이제 당신이 내 주인이에요?

눈을 깜빡이던 맥코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사람. 안 보이니까.

커크가 중얼거렸다. 맥코이는 그것이 스팍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미처 다 가라앉지 않은 분노를 다시 일으키는 대신, 맥코이는 패드를 내려놓고 커크의 손을 잡았다.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의 커크가 자신을 위로했듯이 자신도 그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다신 볼 일 없을 거야. 걱정 마. 많이 놀랐지?

그를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정도로 다정한 어투였다. 그런 맥코이의 따스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커크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듯.

괜찮아요. 익숙해요. 모든 사람들이 날 사용하고 버리죠. 일회용 콘돔 같은 거에요. 두 번이나 쓸 필요는 없어요. 나 같은 걸.

맥코이는 그의 손을 쥔 채로 입을 닫지 못했다. 스팍이 어째서 화를 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커크가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도 커크와 닮아 있었다.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차이가 마음 속을 날카롭게 후벼팠다.

맥코이는 그의 손을 다잡고 미간을 모았다가, 행여 커크가 놀랄까 싶어 다시 표정을 풀었다. 반면 커크는 제 감정을 얼굴에 띄우는 법이 없었다. 감정이 있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만... 그만하자. 짐. 그 얘기는 그만해도 돼.
당신도 내가 짐이 되길 바라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와 검은 눈자위. 맥코이는 그것을 도저히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거짓말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마음까지 꿰뚫어보는 듯한 투명하고 직설적인 시선.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커크의 눈을 피했고 커크는 이해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모두가 똑같아요. 내게서 다른 사람을 보죠. 하지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이 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버려졌어요. 계속. 처음부터, 8번.
제발... 버리지 않을게. 응? 꼬맹아. 버리지 않을 테니까 제발 그만해.

결국 맥코이는 그를 끌어안고 반쯤 울다시피 하며 빌었다. 커크는 그의 말대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맥코이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맥코이의 품에 안겨서 그의 어깨에 반쯤 입을 묻고, 눈동자만 굴렸다.

그날 맥코이는 스팍의 행동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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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현존하는 모든 기술력을 집결해 커크의 신체를 검사했다. 의료 기술과 과학 기술을 모두 동원했지만, 당사자가 제임스 커크라는 것은 숨겼다. 스타플릿에, 제임스 커크는 탐사중 사고로 기억 장애를 얻어 의가사제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맥코이는 커크에게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본인의 명예까지 걸어가며 커크 문제를 숨긴 것이었고, 당연하게도 스타플릿으로부터 제대 권고를 받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쫓겨난 후였다. 근근이 연락하던 인맥과 연줄로 비밀스럽게 검사하다 보니 결과도 금방 나올 리 만무했다. 하루 이상은 걸릴 터였다.

이제 일어나도 돼.

맥코이의 말이 떨어지자 커크는 진찰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명령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그 모습에 맥코이는 심장 한 구석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옷 갈아입자. 꼬맹아.

커크는 진찰용 의복을 벗고 다시 자신의 검은색 티셔츠를 걸쳤다. 그리고 낡은 면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그런 것은 또 곧잘 스스로 했다. 마치 착한 아이처럼.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맥코이는 금세 커크가 단벌신사임을 알아차렸고 기회를 놓치는 대신 가볍게 제안했다.

우리 쇼핑할까?
Posted by 카레우유 :

맥코이의 말이 맞았다. 스팍은 커크를 돌보기는커녕 그에게 상처만 주었다. 그는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스팍은 벌컨이었다. 벌컨은 종족적 특징상 장수하는 존재였고 때문에 상대적으로 수명이 짧은 타 종족을 늘 먼저 보내곤 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별이 점층적으로 쌓여 감정이 무디어지게 되는,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벌컨이 벌컨답게 형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팍은 젊다기보다, 어렸다. (벌컨 기준으로) 그리고 한 이별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다른 이별을 해야만 했고, 그것은 그렇잖아도 감정에 서툰 스팍이 더 감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맥코이는 스팍의 연락을 받고 몇 시간 후에 달려왔다. 급한 수술이 있었다고 했다. 스팍은 그 사이에 자신을 추스리고, 방을 치우고, 커크의 몸을 정돈했다. 그는 스팍의 손이 닿자 몇 번 움찔거렸으나 깨어나진 않았다.

맥코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소파에 앉아있던 스팍은 손짓으로 커크의 방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스팍은 커크에게 옮은 것처럼 아무 대답도 않았다. 답답해하던 맥코이는 품에서 트라이코더를 꺼내며 방으로 구르듯 달려들어갔다. 스팍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마냥 가만히 앉아 다가올 결말을 기다렸다.

몇 분 후, 맥코이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뛰쳐나왔다.

누구야. 어떤 새끼야.

스팍은 침묵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수년간 스팍과 함께한 맥코이는 그 의미를 잘 알았다. 맥코이는 그것을 긍정- 이를테면 자백이라 받아들였다.

너야? 대답해. 너냐고!

스팍은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또는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맥코이가 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울 때까지도 반응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커크와 스팍이 전부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몸도 마음도 망가져버린 사람들처럼.

맥코이가 스팍의 뺨을 세게 때렸다. 강렬한 충격 덕분인지 스팍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맥코이는 그것으로 부족하다 여겼는지 다시 손을 들어올렸다.

스팍이 그의 손을 잡아 제지했다. 스팍과 맥코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맥코이는 스팍의 눈에서 참을 수 없는 죄책감과 자괴감을 보았다. 그답지 않았다. 벌컨답지 않았다. 하지만 맥코이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말을 모두 쏘아댔다.

이 개자식아. 네가 어떻게 짐한테 그럴 수 있어. 스팍. 네가 어떻게-.
그는 제임스 커크가 아니야.

스팍은 속으로 거듭 되내이던 것을 입밖에 내었다. 그리고 고장난 테이프처럼, 앵무새처럼, 그 말만을 반복했다. 그는 제임스 커크가 아니야. 그는 제임스 커크가 아니야. 그는 제임스 커크가 아니야. 맥코이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그래서 저렇게 죽도록 괴롭혔어?

스팍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쥐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피부에 닿았던 커크의 목줄기가, 박동하던 그의 동맥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죽도록 괴롭힌 게 아니야. 죽이려 했어. 내 손으로 죽이려 했었어. 없애려 했었어.
너. 제정신이 아냐. 너한테 더이상 못 맡겨.

맥코이가 학을 뗐다. 그는 미친 사람 보듯 스팍을 보고 있었다. 스팍은 그것이 자신을 정의하는 옳은 단어라 여겼고 맥코이가 자신의 얼굴을 갈겼을 때는 진심으로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든다는 것 자체가 이미 미쳤다는 의미가 아닐까. 스팍이 말을 이었다.

데려가. 내가 완전히 부수기 전에. 제발 데려가줘. 닥터 맥코이. 치워줘. 구해줘.

누구에게서 누구를 구해달라는 건지 불명확했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혼란에 빠진 스팍이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울고 싶다는 게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파도처럼 자신을 덮쳐왔다. 마치 악마가 인형을 갖고 논 것처럼, 자신의 몸에 들어왔다 나간 것처럼, 정신을 차리자 모든 일이 일어나 있었고 결과는 처참했다. 맥코이가 그에게 선고를 내렸다.

지금 이 시점 이후로 나나 짐을 볼 생각, 하지도 마. 접근 금지야.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면 그때는 나도 용서하지 않겠어.

맥코이가 방에 들어가 커크를 안아들고 나왔다. 스팍은 맥코이가 현관문을 열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맥코이가 바깥으로 한 발짝 나서자, 그제야 스팍이 반쯤 쉰 목소리를 냈다.

맥코이.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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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맥코이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피부의 상처는 모두 치료된 모양이었지만, 속은 여전히 욱신거리는 게 어지간히도 당한 듯싶었다.

꼬마, 더 누워 있어.

몸을 일으키려는 커크를 맥코이가 잡아 눌렀다. 이마를 눌린 커크는 어쩔 수 없이 뒤통수를 베개에 파묻고 눈동자만 굴렸다. 푸른 눈과 검은 눈. 왼쪽 눈은 그 이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맥코이가 갖은 수를 써도 모두 헛수고였다.

커크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매번 불안한듯 문과 창문을 흘끔거리기만 했다. 맥코이는 그런 그를 돌보기 위해 일하던 병원에도 휴가를 냈다. 자신이 없을 때 커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스러웠고, 또 커크가 갑자기 사라져버릴까, 혹은 스팍이 찾아올까 무섭기도 했다.

널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여기는 내 집이고, 안전해. 그러니까 안심해. 응? 안심하고 좀 더 자라.

맥코이가 커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놀란 듯 움칫했으나 이내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검은 눈도 푸른 눈도 모두 눈꺼풀에 덮여 사라졌다. 동시에 긴장했던 맥코이의 몸도 풀어졌다.

맥코이는 서서히 몸을 숙여 커크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이젠 내가 지켜줄게. 짐.
Posted by 카레우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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