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길었다. 맥코이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Nothing). 

귀로 떨어지는 절망적인 답변에 맥코이는 커크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아무렴. 그랬겠지. 다시 한 번 커크를 꽉 안아준 맥코이는 천천히 그를 밀어냈다. 커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럼 이제 가서 자. 
같이....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 그 얘기는 내일 하자. 

맥코이가 몸을 돌려 옷을 벗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피곤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다 차분한 상태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명한 결론에 이른 맥코이는 커크를 무심하게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자 더 명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커크가 아니라 스팍을 추궁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맥코이는 세면대를 짚고 진작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거울 속의 레너드 맥코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듯해서, 맥코이는 시선을 내려버렸다. 차디찬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렀다. 

물론 커크가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또다른 문제였지만, 그것 또한 스팍 탓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 아닌가. 맥코이는 마음을 편히 먹고 내일 오전에 병원에 출근하며 스팍에게 연락하리라고 다짐했다. 그에게 어떤 욕설을 쏟아부을지 고민하자 차츰 기분이 나아졌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맥코이는 커크가 침대 옆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쓰러움도 잠시, 그를 이렇게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코이는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자던 그를 흔들어 깨웠다. 커크는 눈을 반쯤 뜨고 마지못해 웅얼거렸다. 

여기서라도 자게 해 주세요. 


맥코이는 여느 때처럼, 최초의 그를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제임스 커크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와서 자. 

맥코이는 침대 위를 두드렸다. 그리고 대충 바지만 걸치고 반대편에 누웠다. 커크는 잠깐의 휴지pause 후에 (맥코이는 커크의 반응 속도가 느린 것이 마치 버퍼링이 느린 기계 따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매트리스에 손을 얹었다. 맥코이는 등을 돌린 채였지만 매트리스의 흔들림으로 커크가 침대 위에 눕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무게와 맥코이의 무게로 양분된 매트리스가 버거운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맥코이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간밤에 커크는 뒤에서 맥코이의 등을 껴안은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맥코이 또한 살풋 잠에 들락 말락 하는 시점에, 타인의 팔이 허리를 감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맥코이는 그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아침까지 등을 돌린 채 자다가 일어난 것이었다. 


맥코이가 눈을 떴을 때 커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시트에 남은 미미한 온기로 맥코이는 그가 자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으리라 짐작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커크는 평소보다 공을 들여 아침을 차렸다. 하지만 어제 급히 퇴근한 덕에 병원에서 질책 아닌 질책을 받았던 맥코이는 아침을 반쯤 먹고 일어섰다. 출근하며 스팍에게 연락도 해야 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맥코이는 마지막으로 물 한 잔을 비우고 현관으로 향했다. 


다녀올게. 
안녕히 가세요. 


배웅하는 인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급히 나가던 맥코이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맥코이의 바람과 달리 스팍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출근하는 중에도, 수술과 수술 사이 잠깐 짬이 날 때도 연결을 시도했지만 단조로운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맥코이는 스팍에게 이것을 확인하는 즉시 회신하라고 반 협박으로 메세지를 남겼다. 


오후에는 커크의 치료에 대해 문의했던 의사에게 (미시시피 주립 의대 동창이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장기 이식 쪽으로 경험이 많은 친구였다. 맥코이는 커크의 신체가 위험한 이유는 첫 번째로 그의 장기가 언제 기능이 멈출 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라 보았다. 때문에 커크를 치료하려면 내부 기관 먼저 손을 보아야 했다. 그는 친우인 맥코이의 개인적인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일사천리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커크의 혈액 샘플을 통해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장기를 찾아낸 것이었다. 


맥코이는 친구와 대학 시절 무용담을 주고 받으며 들떴고 스타플릿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는 약간 우울해했다. 수술과 연구, 친구와의 대화로 그날은 모니터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퇴근한 맥코이는 사과를 대여섯 알 샀다. 스팍에겐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어제의 일에 대해 화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같이 자고 싶다면 수술이 끝난 뒤에, 건강한 상태에서 고려해보자고 말할 참이었다. 남자와 잔다는 것에 대해 한 줌의 거부감도 없다면 거짓말일 터다. 맥코이는 한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키웠고 남자와 남자 간의 교류는 자신과는 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평범한 23세기의 남자였다.


물론 맥코이는 커크가 스타플릿 생도일 무렵에도 남자와 자는 것을 많이 보아왔고 그 행위가 올곧게 쾌락만을 향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였고 마음을 주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커크는, 아니, 지금의 커크 또한 어떻게 보면 그와 같았다. 그는 몸과 몸을 부대끼는 행위 즉 스킨십을 통해 안정감을 찾았다.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걸 맥코이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맥코이는 '그런' 커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소한 성적 취향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알람처럼 들려야 할 커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조차, 맥코이는 커크가 먼저 자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냥 그런 줄 알았다. 묘한 이 기시감을, 맥코이는 애써 무시했다. 적막한 집 안, 그가 싫어하는 우주처럼 고요한 침묵을 그는 깨뜨리려 노력했다. 맥코이는 소파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부엌에서 부러 큰 소리를 내며 사과를 씻었다. 커크가 일어나는 기미는 없었다. 맥코이는 사과를 손에 든 채 커크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방은 깨끗했다. 커크가 매일 청소해서 티끌 하나 앉지 않은 깔끔한 방이었다. 여느 때와 같았고, 모든 게 그가 나가기 전과 동일한 상태였다. 


하지만 커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



사과를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몬하니! 응? 왜 먹지를 몬해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