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그리고 스팍과 커크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위: R(15세)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의: 다크니스 스포주의, 스릴 주의, 앵슷 주의
한마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쿼터까지 달려갈 여유가 없던 커크는 현재 플로어의 화장실로 향했다. 자신을 붙잡던 스팍이 생각나 자꾸 뒷덜미가 켕겼다. 그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날 경멸했을까? 내가 한심했을까? 끝나지 않았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속으로 무수한 질문을 던져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커크는 아쉬움 짙은 한숨을 뱉으며 찬물로 세수를 했다.
사실은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싶었다. 자신과 본즈처럼, 스팍과도 더 친해지고 싶었다. 함교에서 다른 크루와 낄낄대듯이 스팍도 그 자리에서 소외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다하는 그를 이끌고 모니터실로 갔었다. 뭐,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걸 보면서 친해지곤 하니까.
고맙고 미안했다. 스팍은, 스팍에게는. 예전의 커크였다면 그가 뭐든 간에 원나잇을 즐기고 나서 미련 없이 보냈을 터였다. 하지만 스팍은 달랐다. 그를 그렇게 쉽게 대할 수는 없었다. 왜? 왜일까? 그가 나의 일등 항해사이기 때문에? 몇 번이나 생사고락을 함께했기 때문에? 나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아냐. 그는 본즈와는 달라. 무언가 달라.
커크는 입술을 씹으며 거울을 보았다. 입가에 붉은 피가 맺혔다가, 금방 사라졌다.
스팍은 커크가 달려나간 이유를 나름대로 추리하고 있었다. 모니터에서 칸을 보았기 때문일까? 그 확률은 50%였다.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그 사실과 관계없이 그가 흥분한 것은 명백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성인 남성은 자위를 하거나 성관계를 통해 욕구를 해결하지 않는가? 그것이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면, 일등 항해사가 함장을 돕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제임스 커크의 본래 성미대로 거칠게 처리했다가는 어떤 피해가 날지 몰랐다. 스팍은 그런 위험부담보다는 경험이 있는 자신이 그를 돕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사랑'을 배제하고서도 충분히 가능한 결론이었다.
커크는 화장실에 있었다. 세면대를 붙잡고 서 있는 그의 등을 보며 스팍이 화장실의 문을 닫았다. 그 소리에 커크가 고개를 돌렸다.
"스팍?!"
그는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뭐야? 쫓아왔어?? 속으로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경험하며, 커크는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노력했다.
"어- 화, 화장실 쓰러 온 거지?"
난 다 썼어, 어, 나갈게. 황급히 그를 지나쳐 가려는 커크를 스팍이 막아섰다. 커크는 심장이 덜컥 멈추는 것 같았다.
"왜?"
스팍의 시선을 피하는 자신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멍청했다. 이유를 묻는 목소리마저 형편없이 떨렸다. 커크는 자연스럽게 스팍의 오른쪽 가슴에 시선을 두었다. 과학 장교의 뱃지만 뚫어져라 바라볼 참이었다. 아마 계속 보면 정말 뚫릴지도 몰라. 내 눈에서 초강력 빔이 나갈거야. 아마도. 커크는 스팍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함장님. 왜 절 피하십니까?"
"피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왜 절 똑바로 보지 않으십니까?"
그건, 쪽팔리니까.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런 말은 절대 뱉지 못하는 커크였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스팍의 입을 노려보았다.
"보고 있는데."
"함장님."
자신을 타박하듯 간결한 부름에 커크는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조금 더 올렸다. 그리고 스팍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깊고 어두운 흑갈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정확히는, 3주 전에, 자신의 위에서 부드럽게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스팍을.
내가 미쳤구나!!!
커크는 다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찬물로 세수를 하고 가라앉았던 흥분에 다시금 불이 지펴지는 기분이었다. 안돼, 안돼, 안돼, 안된다고, 제임스 커크.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스팍은 그의 표정 변화를 온전히 눈에 담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현재 욕구를 충족하고 싶지만, 어떠한 이유에선가 그것을 스스로 제어하고 있었다. 스팍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어 커크의 턱을 가볍게 밀어올렸다. 다시금 둘의 시선이 부딪혔다.
"...스팍."
그러지 마. 커크는 애원하다시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미약한 부름이 스팍의 마음을 더욱 부채질했다.
"짐."
스팍의 손가락이 커크의 입술을 쓸었다. 아, 놀란 커크가 움찔하며 입을 벌렸다. 인간의 성감대 중 하나는 입술이었고, 벌칸의 성감대 중 하나는 손끝이었다. 다른 벌칸이 이를 보았다면 왜설적인 행동이라고 입을 떡 벌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스팍은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자신의 함장이자, 친구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돕는 일이었다.
커크는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태에서 스팍의 손이 입술을 어루만지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다리 사이에서 금방 신호가 왔다. 그는 이를 악물고 뒤로 물러섰다. 스팍이 무슨 의도로 쫓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도망쳐야 했다. 그런데 그 좋은 머리로 아무런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커크가 한 걸음 물러나자, 스팍이 한 걸음 다가섰다. 커크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오지 마! 제발!!
그의 비명을 우주가 들었는지 때마침 화장실 문에 누군가 노크를 했다. 스팍이 뒤를 돌아보았고, 커크는 이제 살았다, 라는 심정으로 달려나갈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커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뭐, 어-??"
스팍이 커크를 붙잡아 칸 안에 밀어넣었다. 딸깍, 하고 걸쇠를 걸자마자 밖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커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팍을 보았다. 너무 가까워서 숨이 막혔다. 커크는 다리를 딱 붙이고 자기가 흥분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애썼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용없겠지만. 커크는 당황 속에서 눈을 깜빡였다.
얘가 미쳤나? 발정났나? 폰 파 왔니?
스팍은 커크를 벽에 밀어붙인 채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 소변을 보면서 트림을 하는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 두 남자는 자연스레 숨을 죽였다. 스팍이 밖에 신경을 쓰는 사이 커크는 몰래 손을 뻗어 걸쇠를 풀어내려 했지만, 스팍의 손이 그를 제지했다.
커크는 이제 진짜 울고 싶었다. 나한테 왜 이래? 난 죽어라 참고 있는데!
왜?? 라는 의문이 가득 담긴 얼굴로 커크가 스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스팍은 화장실에 들어왔던 크루가 나갈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커크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아서, 커크는 속으로 울분을 삭혀야 했다.
그가 손을 씻고 나간 후에야 대화가 이어질 수 있었다.
"무슨 짓이야 이게?"
커크의 비난에 스팍이 고개를 갸웃하며 외려 반문했다.
"조용히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젠장, 대체 뭘 해결해??"
"생리적인 욕구 말입니다."
스팍의 시선이 자신의 바지에 가 있는 것을 본 커크는 그대로 스팍의 면상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있거든...!"
"예전에는 절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까.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필요 없어...!!"
스팍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커크는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졌다. 죽자. 죽어버리자!
"제가 나가면 칸에게 가겠다고 협박하지 않으셨습니까."
"...끙."
기억력 존나 좋네!!! 침음성을 뱉은 커크는 더이상 할말을 찾을 수 없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했던 걸까. 그래. 그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은 제정신이다. 제정신이라고....... 아마도.
커크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걸 지켜보던 스팍이 입을 다물었다. 커크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스팍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날의 일을 통해 (비록 비정상적인 계기를 통해 발생한 일이지만) 스팍은 자신이 커크에 대해 가진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언젠가 커크에게 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커크가 자신을 피한다면.......
이 사랑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스팍은 커크의 팔에서 손을 뗐다. 이에 놀란 것은 외려 커크였다. 스팍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았기에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커크는 어깨를 움츠린 채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 개인적인 판단에 의거해서 함장님을 함부로 대한 점에 용서를 구합니다."
어? 커크가 입을 벙긋거렸다. 이게 아닌데.
스팍이 걸쇠를 풀어내고 문을 열었다. 그가 걸어나가려 하자, 이번에는 커크가 불안한 얼굴로 스팍을 붙잡았다.
"스팍? 화난 거야?"
커크의 말에 스팍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여느 때처럼 평온한 목소리였다.
"아뇨(Negative). 화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시계를 흘깃 본 스팍이 말을 이었다.
"다음 시프트까지 10분 남았습니다. 함장님. 조속히 해결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는 커크의 팔을 떼어내고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커크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건가? 내가 화나게 한 거야? 나는 스팍에게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실수한 거야? 커크는 입을 부여잡고 눈썹을 찌푸렸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지난번처럼 날 도우러 왔다고 했지. 그 도움을 받아들였어야 했던 거야...? 스팍을? 스팍이랑 섹스를?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커크는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스팍 새끼!! 돕긴 개뿔 뭘 도와!!
요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그리고 스팍과 커크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위: R(15세)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의: 다크니스 스포주의, 야동(?) 주의
한마디: 일주일에 한 편 쓴다더니... 나 뭐하니...
-
스팍은 다시 한 번 시계를 보았다. 1100. 디지털 시계의 화면이 무정하게 빛났다. 시프트 시간 동안 잡생각을 떨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스로와 약속한 그 시간이 끝나자마자 스위치를 켠 듯 다시 커크에 대한 생각이 밀려왔다.
그는 왜 정시에 브릿지에 나오지 않는 거지? 긴 탐사로 인해 피로한가? 그의 평소 수면 습관과 시간, 탐사의 고된 정도를 고려했을 때 그가 아직 수면상태일 가능성은 56.3%였다. 임무를 수행하도록 쿼터에 있을 그를 깨워야 한다.
1101. 스팍은 커뮤니케이터를 집어들었다. 동시에 터보 리프트의 문이 열리며 커크가 어슬렁 어슬렁 들어왔다.
"함장님."
스팍이 벌떡 일어서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커크는 눈을 비비며 함장석에 몸을 날렸다. 팔걸이에 반쯤 기댄 채로 커크가 전면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별일 없었지?"
"예. 탐사 보고서는 오전 중에 스타플릿에 제출했습니다."
"좋아, 좋아."
커크가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끄으으하아아암, 하고 무방비하게 입을 벌리는 모습에 스팍은 순간 그 입을 가려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예의없고 품위없는 행동은 여전히 거슬렸다. 함장이라면, 브릿지에 있는 크루를 고려해서 그런 행동은 자제해 주었으면. 스팍은 입을 여는 대신 눈썹을 꿈틀였다.
그런 스팍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크는 자신의 옆에 선 스팍을 장난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계속 나 보고 있을 거야?"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좋아?"
"......."
스팍은 대답없이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그의 진담과 농담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마터면 그의 두 번째 질문에 스스럼없이 '예'라고 대답할 뻔한 자신을 다스리며 그는 자리에 앉았다. 푸른 모니터 화면을 주시하는 그의 귀로 커크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어왔다.
"히카루, 지난번에 채집한 식물들은 어때? 잘 커?"
"물론이죠. 성장이 안정 궤도에 접어들면 영양촉진제를 주입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죠?"
"엔터프라이즈에서 싱싱한 유기농 과일이 태어난단 얘기지! 야호!"
커크는 아이처럼 두 팔을 번쩍 들어 환호했다. 술루는 작게 웃었고, 옆에 있던 체코프가 끼어들었다.
"미숫또 술루, 그고 저도 주시묜 안됨니까?"
술루가 흔쾌히 대답하려는 찰나 커크가 정색했다. 손가락까지 까딱이는 폼이 제법이었다.
"안돼, 안돼. 파벨. 엔터프라이즈 내의 모든 생산물은 함장님에게 귀속된다는 규칙 몰라?"
커크의 말에 체코프와 술루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체코프는 벙찐 채였고 술루는 난처한 얼굴로 커크의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반쯤 미소가 섞여 있었다. 이미 커크의 농담을 알아차린 표정이었다.
"구론 거 처음 듣는데요...!"
"함장님. 저도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방금 내가 만들었으니까."
체코프가 러시아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내뱉었다. '또야! 또 속았어!' 같은 느낌이어서 커크는 킬킬 웃었다. 그러면서도 짐짓 얼굴을 굳혀 겁을 주는 커크였다.
"파벨 체코프. 방금 그거 욕이지? 상관에 대한 모욕은 군령 아무개 호에 의거하여 너를 군법회의에-."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벌칸의 예민한 청력은 수많은 정보를 잡아낼 수 있었다. 스팍은 모니터에 집중하며 브릿지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잔뜩 울상이 되어 키보드를 두들기는 체코프와 난처하게 웃는 술루, 눈가를 휘면서 소리없이 웃는 우후라까지, 자신의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보였다.
평화로웠다.
-
식사를 위해 내려가던 길이었다. 커크와 스팍은 하얀 복도를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탐사지까지 한참 남았는데 진짜 아무 계획 없어?"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명상으로 충분합니다."
"재미없긴."
커크는 잠시 입을 삐죽였지만, 다시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스팍은 복도 끝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조용히 걸음을 멈췄다. 커크는 혼자 떠들며 몇 걸음 걸어가더니 나중에야 그를 돌아보았다.
"밥 먹고 온실에 가보려고 하는데-. 어. 왜?"
"거슬리는 게 있군요."
스팍이 청력을 돋우자 거친 호흡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곧 두 사람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탕비실에서 크루 둘이 몰래 사랑이라도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프트 중이 아니라면 그런 그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함내 연애를 금지하는 규정은 존재하지만, 실효성이 없었다. 특히나 5년의 탐사 임무 동안 연애를 일절 금지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할지 불보듯 뻔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팍은 금방 커크의 옆에 다가갔다. 커크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한테 아무것도 아닌 게 어딨어?"
"불분명한 소리를 들었는데, 자세히 들으니 평범한 소리라고 판단되었습니다."
"무슨 평범한 소리?"
커크는 집요하게도 물어왔다. 스팍은 대답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걸었다. 커크는 잠깐 한 곳을 노려보더니 바로 스팍을 따라잡았다. 그는 스팍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너 돌직구가 특기잖아. 갑자기 왜 그래?"
"제 발화 방식이 직설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행위 중인 남녀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예의에 위배되는 행위일 텐데요. 스팍은 눈을 깜빡였다. 이럴 때는 벌칸끼리의 의사소통이 그리워지곤 했다. 인간보다 세 배나 뛰어난 정신 감응 능력은 얼마나 효율적인가.
"애들이 섹스라도 하고 있든?"
커크가 피식 웃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 또한 알아챈 모양이었다. 스팍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가,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있었던, 그 이후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그 일이 연상되었다. 입을 다문 두 남자 사이에서 다소 복잡하고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정리할 필요도 먼지를 털어낼 필요도 느끼지 못했던 탓이다.
스팍은 그것이 예외적인 현상이라 여겼다: 연인 간의 섹스가 아니므로. 하지만 커크가 원한다면 자신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가 무엇을 원하든지 말이다. 자신은 커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가 요구하는 것이 단순히 성관계 뿐이라 해도 따를 의향이 있었다.
커크는 그것이 충동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극도의 트라우마적 상황에 있었던 자신이 스팍을 몰아붙였고, 그에게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성관계를 강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용서했다 해도 자신이 미안한 것은 미안한 거였다. 그러니 그런 일은 다시 발생하면 안 된다. 커크는 다짐했었다.
"구경하러 가야지~."
스팍은 커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붙잡았다. 그에게 어깨를 잡힌 커크가 그를 빤히 보았다.
"무슨 말씀입니까? 구경이라뇨?"
"보러 간다고. 재밌잖아."
스팍은 순간 진심으로 커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재미?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게? 그걸? 어째서? 왜?
"너도 같이 볼래? 가자."
커크가 키들거리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스팍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커크에게 끌려온 스팍은 주변을 살폈다. 엔터프라이즈 내부를 모니터링하는 모니터실이었다. 모니터실을 지키던 크루를 내보낸 커크가 몇 번 컴퓨터를 조작하더니 이내 그들을 찾아냈다. 그는 악동처럼 킬킬대며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의무부의 니나랑 기술부의 브라이언이야. 신흥 커플 탄생이네!"
커크가 박수치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스팍은 커크처럼 웃을 수 없었다.
"크루들의 사생활을 이렇게 몰래 지켜보는 것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닙니다. 함장님."
"좀 봐줘라. 실황 포르노는 아카데미 이후로 오랜만인데."
"함장님. 사생활 보호는 자유 헌장의 두 번째 권리이자 의무로 중요한 것이며......."
스팍이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커크는 들은 척도 않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았다. 어찌나 집중하는지 스팍마저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을 정도였다. 스팍은 언제고 의무부의 니나라는 크루와 기술부의 브라이언이라는 크루를 만난다면 그들에게 성행위는 개인 쿼터에서 하라는 권고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팍이 모니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커크를 보았다. 그는 손을 꽉 쥔 채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인간들의 관계 장면을 시청하는 것이 그렇게까지 흥분이 되는가- 싶어서 스팍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벌칸에게는 7년마다 돌아오는 폰 파라는 특이한 기간이 있어서 대개 그 시기에 정해진 상대방(보통은 약혼자)과 관계를 하곤 했다. 물론 폰 파, 일명 짝짓기철이 아니어도 관계는 가능했지만, 그 시기가 아니고서는 감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벌칸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스팍은 말없이 커크를 주시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계속해서 모니터의 빛이 일렁였고, 그가 침을 삼킬 때마다 목울대가 느지막히 움직였다. 모니터 화면보다 그런 커크의 부분 부분이 더 신경이 쓰였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스팍은 이것 또한 이전에 경험한 적 없었던 감정의 새로운 효과겠거니 판단했다. 커크가 그들을 보는 것마냥 스팍은 커크를 주시했다. 그의 표정과 신체 하나 하나 시야에 가득 담고 싶었다.
"아......"
이윽고 커크가 진득하게 탄식을 뱉었다. 끝난 모양이었다. 스팍은 시계를 보며 지금이라도 서두른다면 식사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일어서서 커크 또한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먼저 가."
하지만 커크는 그의 기대와 달리 고개를 저었다. 스팍은 다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커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시프트가 늦은 시각까지 있습니다. 식사하지 않는다면 건강에 지장이 있을 겁니다."
"이걸 봤더니 배가 하나도 안 고프네? 너 혼자 가."
"함장님."
커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팍은 인간 남성의 생리적인 현상에 대해 잠시 떠올렸고, 정상적으로 흥분했을 때의 증상과 현재 커크의 반응을 비교했을 때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팍이 재차 입을 열었다.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응."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분명한 거짓을 말하는 커크를 보자,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을 돌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스팍은 힘주어 뒷짐지고 재차 물었다.
"그럼 일어나 보십시오."
"...나 놀리는 거야? 그런 건 언제 배웠냐."
장난스레 말하긴 했지만 커크는 사실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3주 전처럼 그를 유혹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었다. 그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팍은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게 그의 우정의 증표였다. 자신도 멀쩡하다는 증거를 보여줘야 했다. 지금까지 잘 해왔듯이, 이제 와서 그를 걱정시킬 수는 없었다.
"빨리 가라니까."
혼자 해결하게. 빨리 가. 이 고블린 자식아! 평소에는 잘만 가더니!! 커크는 속으로 끓이며 외쳤다.
"짐."
스팍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단어 선택에 커크는 흠칫 떨었다. 그의 목소리를 더 듣는다면 참을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건 곤란했다. 자신이 또 스팍의 손을 갈구하게 될까봐 두려웠다. 그를 힘들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와 당신 사이에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스팍이 성큼 다가섰다.
그 인기척에 놀라 커크가 벌떡 일어났다. 뒤돌아선 채. 급속도로 두려움이 몰려왔다. '마무리하지 못한' 이야기라는 게 무엇일까. 나를 원망하는 걸까? 내 책임을 묻는 걸까? 커크는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이성적으로 스팍에게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 이야기는 묻어두고 없었던 일 셈 치고 싶었다.
"나, 난 다 끝난 것 같은데?"
커크가 스팍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스팍이 그를 붙잡았다.
"3주 전에 있었던 일 말입니다."
스팍의 말이 들리자마자 커크가 그의 팔을 뿌리쳤다. 그 명백한 거절에 스팍은 다시 그를 붙잡지 못했다.
"나중에 얘기해."
커크가 그대로 달려나갔다. 스팍은 내민 손을 거두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커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모니터 한 쪽에 시선이 갔다. 빨간 테두리에 Lab이라 표시된 카메라였다. 다른 채널과 바꿀 수 없게 되어있는 특별 감시 모니터였다.
요약: 엔터프라이즈에 구금된 채로 5년 임무에 함께하는 칸, 그리고 스팍과 커크 사이의 위험한 삼각관계
수위: R(15세)
커플링: 스팍커크, 칸커크, 스팍커크칸(?)
주의: 다크니스 스포주의, 커크텀 주의
한마디: 나쁜 손! 때찌!
-
제임스 커크의 쿼터는 어두웠다. 빛이 없는 우주에서 시간은 추상적인 흐름에 불과했지만, 인간은 생명 유지를 위해 충분한 수면을 취해야 했고 그것은 공간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규칙이었다. 더욱이 엔터프라이즈는 하루 전에 긴 탐사를 마친 참이었다. 함장이라면 굳이 모든 탐사에 꼬박꼬박 얼굴을 내밀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커크는 늘 자신이 내려가기를 고집했다. 탐사의 2할은 무사히 끝나곤 했지만, 나머지 8할은 언제나 크고 작은 사건이 터졌고, 그걸 수습하는 것 또한 제임스 커크의 몫이었다. 그는 그런 요란스런 일을 즐기곤 했다.
어쨌든, 그런 연유로 그는 현재 지쳐서 곯아떨어진 채였다. 하얀 이불이 그의 고른 숨소리에 맞춰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얼굴은 이불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끌어당기듯이, 이불이 천천히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크는 잠깐 몸을 움츠렸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너무도 달콤하고 편안한 잠인 탓이었다. 곧 이불이 바닥에 떨어질 때쯤에는 검은색 하의만 걸친 커크의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상체는 하얬다. 그 하얀 우주 위로, 검은 형체가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우주를 부드럽게 쓸어올렸다.
커크는 답답한 기분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 숨이 막히고 무거웠다. 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커크의 입을 그의 손이 거칠게 덮었다. 낯익었다. 낯이 익다는 그 느낌에 다시 소스라치게 놀라 커크는 몸을 떨었다. 자신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짙은 어둠 사이로도 그의 얼굴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커크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칸!!
칸의 손가락이 커크의 입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의 다른 손 또한 자신의 몸을 불친절하게 누비고 있었다. 커크는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그의 몸을 밀어내고 저항할 수 있었다. 커크 또한 칸과 비슷한 능력을 가졌고, 그 힘을 조절하는 방법도 훈련한 뒤였다. 충분히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할 수 없었다.
무력감과 자책감이 솟구쳐 올랐다. 커크는 사실 알고 있었다. 이건 악몽이었다: 그것도 아주 질이 나쁜. 자신의 오만함으로 파이크를 잃었던 일과, 엔터프라이즈를 사지로 몰아넣었던 일과, 칸의 혈액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일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 처벌이었다. 커크는 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는 평범하게 우는 법을 알지 못했다.
-
함장석에 앉아있던 스팍은 미세하게 눈썹을 움직였다. 이따금 오른쪽 가슴 아래 부근에서 느껴지는 원인 모를 통증이었다. 그것은 유독 커크가 자리에 없을 때 발생하곤 했다. 스팍은 이것이 커크와 관계를 가진 이후 시작된 것으로 보아 그 부작용이거나, 그 외의 병원균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었다. 그것이 특별 검사를 실시한 이유였다.
함장석에 부착된 통신 부저가 울렸다.
"스팍. 네 검진 결과 나왔어."
"내 PADD로-."
"이미 보냈어."
맥코이가 매몰차게 통신을 끊었다. 평소보다 싸늘했다. 스팍은 고개를 기울였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커크의 사건을 언급한 적은 없지만, 커크와 맥코이의 오랜 친우 관계를 고려했을 때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사실 그는 평소에도 매몰차긴 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날 발생한 사건은 100% 사적인 일이었다. 그 사실을 굳이 알릴 필요는 없었고, 그가 알든지 모르든지 수석 군의관으로써의 직위에 걸맞게 행동하고 임무를 충실히 수행한다면 상관도 없었다.
그 일ㅡ 정확히는, 커크와 성관계를 가진 지 3주의 시간이 흘렀다. 커크는 브릿지는 물론이고 사적으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그는 함장이 막 되었을 때처럼 밝게 웃었고 그 얼굴에서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아버지를 잃었다는 동질감 때문인지 캐롤 마커스도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니요타, 파벨, 히카루, 본즈 등 자신을 포함한 모든 크루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기도 했다. 개구쟁이처럼 장난치던 청년은 제법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스팍은 평했다. 그는 멋진 함장이었다.
그 이후 커크는 한 번도 스팍을 개인적으로 불러 관계를 맺자고 강요하지 않았다. 이 또한 개선점이라고, 스팍은 생각했다. 이제 칸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엔터프라이즈의 앞날에 더 이상의 걸림돌은 없으리라.
스팍은 검진 결과를 훑었다. '이상 없음'. 모든 결과에 이상 없음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통증은 트라이코더와 각종 과학 기술로는 진단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즉, 심리적 증상이다. 그때 깨달았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틀림없다고, 스팍은 추론했다. 자신의 마음은 확실했지만 커크의 마음 또한 자신과 같을지는 불확실했다.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커크의 부재'라는 단순한 사실에 집중이 흐트러지는 것은.
그는 시계를 보았다. 커크가 돌아올 때까지는 아직 3시간이 남아 있었다. 업무 중에 다른 생각으로 정신을 어지럽힌다면 분명 사건이 발생했을 때 즉각 대응하지 못할 터. 그것은 본인, 커크를 포함해서 이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좋지않은 결과일 게 뻔했다. 스팍은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에서 커크를 완전히 몰아냈다.
-
커뮤니케이터를 닫은 닥터 맥코이가 몸을 돌렸다. 푸른 셔츠를 입은 칸이 실험대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양 손목에는 구속구가 단단히 채워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려움 없이 스포이드를 들어 얇은 샬레에 용액을 떨어뜨렸다. 옆에 누가 있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겠다는 투였다.
약 7평 정도 되는 작은 실험실이 그의 일터였고, 감옥이었고, 집이었다. 그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24시간 감시카메라가 그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실험을 할 때는 맥코이가 그의 곁에 있었다. 엔터프라이즈에 유전공학자가 타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칸 곁에 있기를 꺼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몇 번은 과학과 의료 부서, 보안 요원들이 돌아가면서 그를 지켰다. 하지만 다들 겁을 냈고 결국은 맥코이에게 그 차례가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결국은 계속.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칸은 필요한 것을 요청했고 맥코이는 그것을 가져다 주었다. 커크에게 피가 필요할 때면 맥코이가 하이포를 가져왔고 칸은 팔을 내밀었다: 음식을 주문하는 행위를 대화라고 하지는 않는다.
맥코이는 생각했다. 칸은 암적인 존재였다.그가 엔터프라이즈 전체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진심으로 칸을 어디 외딴 행성에라도 처박아두고 그대로 떠나고 싶었다. 외과의사가 감염 방지를 위해 상처난 부분을 도려내듯이. 정말이지 커크만 아니었다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그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눈앞에 존재하는 위협이었고 그의 손아귀가 언제든 조여들 기세로 숨통을 쥐고 있었다. 제임스 커크뿐 아니라 그들 모두를.
"임상 실험이 필요해."
칸이 입을 열었다. 생각의 바다를 유영하던 맥코이가 현실로 튕겨져 나와 고개를 돌렸다. 칸이 여상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하얀 얼굴은 마치 유령 같았다. 맥코이는 그 유령을 쫓아내듯 단호하게 못박았다.
"케이스는 짐 하나야. 그를 데려오라는 뜻이라면, 꿈도 꾸지 말라고 말해주지."
"그를 치료하지 않을 건가?"
"......."
젠장, 맥코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떻게 커크를 다시 네 앞에 데려와. 어떻게? 네놈이?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는 걸 그 자신도 알고있을 테지. 그게 커크를 얼마나 힘들게 할지, 그것도 알 테지. 하지만 칸은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었다. 칸이 그런 인간이라는 걸 맥코이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그리고 잘 안다는 것은 그토록 지리멸렬한 싸움 끝에 남은 서로의 상처 또한 고스란히 안다는 뜻이었다.
칸은 그들의 상처를 후벼 파내는 것을 즐겼다. 어떻게 해야 가장 잔인하고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또한 알았다.
"임상 실험은 메디컬 베이에서 할거야. 관찰은 내가 할 거고, 결과값만 전해주겠어."
"닥터. 전문가는 나야. 세포의 움직임을 당신이 읽을 수 있나? 상황이 잘못되면 대처는 누가 하지?"
항상 그랬다. 상황은 칸을 중심으로 흘러갔고 주도권은 늘 그에게 있었다. 아무도 그의 머릿속에 든 계획을 알 수 없었다. 그의 말을 거절할 방법 또한 없었다. 주먹을 쥔 맥코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잘못되면 넌 죽어. 다른 생각 품지 마."
칸은 말없이 구속구를 들어 보였다. 이게 있는데 자신이 어쩌겠냐는 듯. 그리고 의자에 앉았다. 맥코이는 고개를 젓고 연구실을 나가 문에 보안을 걸었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