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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해보라니까.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위대한 영웅, 엔터프라이즈의 전 함장님. 못 말하겠어? 갑자기 부끄럼이라도 타? 


맥코이는 오기로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가 꿋꿋이 커크 행세를 하자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싶은 심정도 꽤 컸다. 맥코이는 커크가 반응하지 않자 더더욱 말의 강도를 높였다. 

그건 알아? 네가 처음으로 여학생을 방에 끌어들인 날 나랑 약속을 하나 했거든.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 그래. 기억할 리가 없지. 다른 사람 얘기인데. 미안. 괜한 말을 했다. 
....... 

커크는 입술을 짓씹고 입모양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울듯 말듯 묘한 표정이었다. 맥코이는 그런 그를 못본 체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도대체 왜 여기 있지? 내가 찾는 사람은 여기 없는데.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맥코이가 문 앞에 섰다. 그대로 나갈 셈이었다. 커크가 그를 붙잡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커크 흉내를 내는 그와는 볼일이 없었다. 원래대로의 그라면 또 모르지만. 맥코이는 문고리를 잡고 세게 돌렸다. 

잘 있어. 

맥코이는 그대로 그곳을 나갈 셈이었지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달칵 하고 어딘가의 걸쇠에 걸린 듯 열리지 않는 문 때문에 맥코이는 짐짓 당황했다. 이게 왜 이래, 당기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밖에서만 열 수 있어. 

담담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귀에 들어왔다. 맥코이는 어금니를 악물고 돌아섰다.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아. 그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다. 

맥코이는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팔짱을 낀 방어적인 자세는 풀지 않은 채였다. 커크는 가만히 서서 맥코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맥코이는 잠깐의 침묵과 커크의 눈길을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입을 열어 2차 공격을 시작했다. 적당히 진실과 거짓말도 보탰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가야. 제임스 커크 새끼와 나는 질기고 지독한 악연으로 연결되어 있단다. 
...거짓말 마. 커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뭘 알아? 맥코이가 비웃었다. 그 새끼랑 나는 서로 토사물을 주고받은 사이거든. 토사물뿐이겠어. 밤에 뜨거운 우정도 나누는 사이였지. 그 멍청한 벌컨이 뭘 가르칠 수 있었겠어.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집요하게 커크가 아파할 부분만 파고들었다. 그게 그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리라는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본즈....... 
날 그렇게 부르지 마. 그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어. 
....... 

냉담한 맥코이의 말에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눈을 비볐다. 얼굴을 반쯤 가린 팔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커크는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입을 앙다물고,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도저히 그런 커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다면 흉내를 내지 않으면 될 텐데. 스팍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될 텐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집스럽게 저러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 후에 커크가 젖은 소매를 내렸다. 그는 그것을 등뒤로 가리려 애쓰며 짧게 말했다. 

싫다면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을게. 내일 아침까지 편히 있다가 가. 침대에서 자도 돼. 잘 자. 

커크는 몇 걸음 물러서서 의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가지런히 두었던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가 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맥코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를 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에 물기가 가득 어린 것이 보였다. 맥코이는 팔걸이를 잡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무 의지도 감정도 없던 네게 사명감 따위가 갑자기 생길 리 없잖아. 스팍이 주인이랍시고 명령했어? 그래서 그렇게 죽어라고 따르고 있냐? 
무- 무슨 얘기 하는지 잘 모르겠어.... 
왜 몰라! 맥코이가 윽박질렀다. 커크는 어깨를 움칠거리며 눈을 찡그렸다. 맥코이가 커크의 턱을 쥐고 치켜올렸다. 커크는 반항하지 못했다. 
모르긴 뭘 몰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 제임스 커크를 연기한다는 가증스러운 짓 말야.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제임스- 읍. 

맥코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아니라고. 너는 그가 아니야. 대체 어떻게 내 앞에서조차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어? 네가 떠난 뒤로 난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어. 널 찾느라 방방곡곡을 뒤졌어. 스팍이 이런 곳에 꽁꽁 숨겨뒀을 줄은 몰랐지만. 알았어? 적어도 나한테는 원래대로 대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이 멍청한 자식아. 

맥코이가 길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동정심이라면 동정심이리라. 맥코이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커크는 하나뿐인 눈동자를 굴리며 한없이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택한 것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이 손 놓아줘.... 

오오냐. 끝까지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그 순간 맥코이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네가 정말 제임스 커크라면, 내가 이제 무엇을 할지 알 거야. 

커크가 퍼뜩 눈을 들었다. 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맥코이는 턱을 쥐었던 손을 내려 커크의 셔츠를 밀어올렸다. 커크는 허둥지둥 벗어나려 했지만 의자에 앉아있는 채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맥코이는 그가 어떤 반응을 하건 개의치 않았다. 손을 뻗어 커크의 가슴을 주무르자 커크가 미약하게 버르작대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맥코이는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갈색 눈동자가 혐오 반 비웃음 반으로 빛났다. 


싫어? 짐은 이런 걸 좋아했는데. 

커크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나뿐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맥코이는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그의 눈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유두를 지분거리던 손은 점점 내려가 허리께를 더듬고 있었다. 맥코이의 입술이 속살거렸다. 

자, 이제 짐이라면 어떻게 할까? 




-




수수께끼를 풀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어흥

Posted by 카레우유 :

맥코이가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늦은 오후였다. 커크는 그 옆의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중이었다. 스팍은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너...! 

커크는 책을 덮고 그것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맥코이는 찬찬히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를 떠올리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스팍 그 망할 자식이! 

맥코이의 욕설이 이어지자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맥코이는 스팍의 외모와 행동과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대해 긴 불평을 늘어놓았고 커크는 묵묵히 앉아 그것을 들어주었다. 난 정말 그놈이 싫다, 라는 그의 말이 끝나고 나서야 한 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그래. 

맥아리없는 반응에 맥코이 또한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맥코이는 다시 안대를 착용한 커크를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있었던 일로 미루어 볼 때, 안대를 억지로 벗기는 것조차 그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를 이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나? 맥코이는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다시 그와 대화하고 싶었다. 커크가 아닌, '그'와. 

하지만 맥코이는 자신을 대하는 커크의 태도에서 미묘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강요한다면 커크는 더더욱 자신과 멀어질 것임을, 맥코이는 일종의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저 안대 뒤에 가려진 진실은 영원히 묻어두어야만 하는 걸까. 스팍의 말대로. 절반쯤 체념한 맥코이가 푸념조로 말을 건넸다. 

짐. 
왜, 본즈? 
그는 이제 어디에 있어? 

'그'가 스팍을 지칭하는지, 이전의 커크를 지칭하는지, 혹은 지금의 커크를 지칭하는지, 분명하지 않았다. 일종의 레너드 맥코이식 비꼬기였다. 커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스팍은 내일 아침에 올 거야. 

스팍이라고? 맥코이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표시했다. 

나를 그렇게 내쫓고 싶어하더니, 어째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커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스팍이 그를 여기 두고 간 것도 이상했다. 맥코이를 위험 요인으로 여겨 병원 밖으로 던져버린다면 또 몰라도, 단둘이 남겨두었다고? 맥코이는 스팍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인상을 쓰며 팔짱을 꼈다. 

스타플릿에서 급한 호출이 오기라도 했나. 
아니. 내가 부탁했어. 
뭐? 맥코이가 떡하니 입을 벌렸다. 
동기와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을 달라고 했어. 물어볼 것도 있고. 그리고 한 가지 더. 스팍을 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맥코이는 이제 숫제 입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커크가 이런 말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 더군다나 예전의 백지와 같았던 커크를 기억하는 맥코이로서는, 그가 사실 무척이나 낯설고 어색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전의 제임스 커크도 커크를 닮은 사람도 아닌 또다른 누군가. 덕분에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한 분노는 뒤늦게 찾아왔다. 


그 자식을 욕하고 말고는 내 맘이야. 꼬맹이. 

하지만-

물어볼 건 또 뭔데? 맥코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게, 커크가 망설이며 말문을 열었다. 

옛날 기억이 잘 안 나서. 혹시 내가 알아야 하는 게 있다면 말해줘. 부탁할게. 

맥코이는 팔짱을 낀 채 불만이 겹겹이 쌓인 표정으로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커크의 말투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실상은 '커크를 연기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달라'는 것이었다. 거짓말도 연기력도 참 빠르게 느는구나. 누구처럼. 맥코이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는 커크에게, 그리고 스팍에게 동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 맥코이가 커크에게 순순히 입을 열 리 만무했다.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지? 
본즈. 우린 친구잖아. 

맥코이는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우스웠다. 그의 연기도 우스웠고, 그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자신도 우스웠다. 그냥 이 허접하고 어처구니없고 쓰레기 같은 현실의 모든 게 우스웠다. 맥코이는 비웃음 조로 반문했다. 


친구라고? 오. '제임스 커크.' 우린 친구였던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커크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맥코이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는 침대를 짚고 항변했다. 

우리는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 기숙사도 같이 썼고, 수업도 같이 듣고, 식사도 같이 했잖아. 엔터프라이즈에서의 첫 항해에도 함께 올랐고 5년 임무도 함께 떠났어. 우리가 친구가 아니면 뭐야? 


악연이겠지, 맥코이가 이를 갈며 대답했다. 보고서만 훑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들이었다. 스팍이 아무리 저가 가진 지식들을 전달했어도, 맥코이와 커크가 함께했던 그 몇 년 간의 시간들을 모두 재현해낼 수는 없을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한 맥코이는 완연히 비꼬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우리가 한 일 기억해? 처음으로 외박한 날은? 페더레이션 데이에 우리가 어딜 갔는지는 알아? 
나- 나는 기억이 안 나서.... 
웃기지 마. 당연히 기억도 없겠지. 

맥코이가 커크를 노려보았다. 그 강렬한 눈빛에 이제는 되려 커크가 시선을 피했다. 맥코이는 반쯤 통쾌한 기분을 맛보며 말을 마무리했다. 

왜냐하면 넌 제임스 커크가 아니니까. 

입을 벌리고 무언가 대답하려던 커크는 그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꺼질듯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르쳐 줘. 
싫어. 
가르쳐 줘. 
귀가 잘 안 들려? '싫어'. 

커크는 침대 시트를 세게 쥐었다. 맥코이는 배를 째라는 심정으로 뻗대고 있었다. 커크의 반응을 보건대 이건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커크는 자신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있었으나, 그것을 강제로 취할 수도 없었다. 칼자루를 쥔 것은 자신이었다. 맥코이는 빈정거렸다. 


네가 정말 커크라면, 여기 처박혀 있을 시간에 의사나 간호사 한 명이라도 더 꼬셨어야지. 아. 벌써 침대로 끌어들인지 오래야? 몇 명쯤? 아니면 스팍이랑 '또' 잤어? 그래서 감싸주는 건가? 대답해봐.

맥코이의 눈이 경멸의 빛을 띠었다. 

어서.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




정말로 그때 뭘 했니 너네들은

Posted by 카레우유 :

맥코이가 골을 냈다. 


넌 아무 잘못도 없다니까! 문제는 이 재수없는-... 


문장은 완성되지 못했다. 맥코이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의식을 잃은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뗀 스팍이 가볍게 몸을 굽혔다. 그가 맥코이의 손에서 주워든 것은 하얀 안대였다. 


커크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눈썹이 기운잃은 강아지마냥 아래로 쳐져 있었다. 거의 울상이었다. 


제- 제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스팍은 쓰러진 맥코이를 지나 커크의 앞까지 저벅저벅 걸어갔다. 커크가 어깨를 움츠렸다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스팍이 입을 열었다. 


일어나십시오. 


커크는 벌떡 일어났지만, 한 손으로 자신의 다른쪽 팔을 세게 부여잡고 있었다. 아직도 고치지 못한 버릇이었다. 커크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전부 제 잘못이에요. 
팔 놓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그런 말투를 사용하지 말라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스팍의 잔소리를 듣고 커크가 힘들게 침을 삼켰다. 꿀꺽, 하고 목울대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그는 슬그머니 손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내가 잘못...했어. 


다가온 스팍의 차가운 손이 커크의 머리칼을 스쳤다. 커크는 겁먹은 표정으로 눈을 반쯤 내리깔았다. 안대가 다시 검은 눈을 가렸고, 커크는 얌전히 스팍이 매듭을 짓길 기다렸다. 


하지만 스팍은 한참 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커크의 머리 뒤에 손을 댄 채 움직임을 멈춘 것이었다. 조용히 있던 커크가 의아함을 느낄 때쯤, 스팍의 손이 커크의 뒷목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커크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다는 겁니까? 
아까, 의사 선생님에게 말한.... 
아니오. 여기에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닥터 맥코이는 그동안의 과로로 인해 쓰러진 것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 응. 


뒤늦은 대답이 이어졌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커크는 가만히 바지를 쥐었다가 놓았다. 짧은 혼란이 끝을 고했다. 


스팍은 긴 손가락으로 커크의 이마와, 눈가의 흉터와, 안대를 차례로 쓸었다. 사실 손은 벌컨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피부 접촉으로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그들에게 섬세하기 그지없는 손은 애정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였던 것이다. 엄지손가락이 커크의 턱에 닿았고 그의 검지와 중지는 커크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안착했다. 마인드 멜드를 위한 준비였다. 커크는 스팍에게 몸을 맡기듯 눈을 감았다. 스팍은 예전에도 커크에게 마인드 멜드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시도했다는 말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뜻과 동일했다. 스팍은 지금의 커크에게 자신이 갖고있는 예전의 커크에 대한 지식을 주기 위해서 마인드 멜드를 고려했고, 시작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하지는 못했다. 지금처럼. 스팍은 손을 내려 커크의 어깨를 잡았다. 커크가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만약 마인드 멜드를 한다면 커크는 그 생생한 정보(마인드 멜드를 통해 두 사람은 과거의 기억과 생각, 마음을 공유할 수 있었다)를 바탕으로 보다 완벽히 커크를 재현해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스팍은 차마 그것을 행하지 못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사소했다. 스팍은 마인드 멜드를 함으로써 지금의 커크가 살아온 삶을, 그리고 그의 마음과 생각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스팍에게 지금의 커크란 그저 원래의 커크를 대리하는 존재였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스팍은 그와 그 이상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를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스팍은 커크에게서 물러섰다. 그리고 기절한 맥코이를 손쉽게 들어올렸다. 맥코이는 스팍의 어깨 위에서 맥없이 흔들렸다. 그가 문을 나서기 직전, 커크가 그를 불렀다. 


잠깐만. 


말라붙은 목이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커크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미안. 스팍. 스팍이 그의 말을 기다리며 그대로 서 있자 커크가 말을 이었다. 


데리고 나가지 않아도 돼. 
...무슨 의미입니까? 
일어나면 물어볼 게 있어. 
제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꼭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별로 중요한 건 아냐. 나 믿지? 


커크가 밝은 얼굴로 물었다. 스팍은 입을 닫았다. 단조롭던 그의 얼굴에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스팍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그조차 커크의 의도를 유추할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예전 동료일 뿐이잖아. 그치? 


그러니까, 응? 커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재차 졸랐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커크의 흉내를 내는 그가 놀라울 정도였다. 이어진 재촉에 스팍은 마지못해 수긍했다. 자리를 비워달라는 부탁에도 동의해야 했다. 


어째선지 스팍은 그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었다. 마치 예전에 제임스 커크를 이길 수 없었던 것처럼. 머리로는 분명 그가 진짜 커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게다가 자신의 계획에 의해 그가 커크가 된 것이었지만, 스팍은 자가당착적인 모순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고마워. 스팍. 


커크는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마냥 해사하게 웃었다. 



-



스팍이(가) 치트키를 사용했다!

Posted by 카레우유 :

체코프와 술루, 스콧은 커크가 말을 길게 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었다. 전해들었던 대로 부상이나 수술의 후유증이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기실 그들에겐 커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레너드 맥코이에게는 아니었다. 


맥코이는 크루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스팍마저 자리를 비우면, 커크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작정이었다. 지켜본 결과 커크는 크루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콧에게는 그의 별명을 불러가며 친근하게 굴었고 술루에게는 그의 여동생 안부를 물었다. 즉, 그는 크루들의 기본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다. 


본즈. 안 가? 

그래. 저걸 포함해서. 맥코이는 표정을 굳히고 팔짱을 꼈다. 중앙으로 모인 눈썹이 명백히 그가 불만에 차 있음을 보여주었다. 

응. 안 갈 거야. 

스팍이 그렇게 되도록 놔둘 리 없었다. 

나가십시오. 닥터 맥코이. 
내가 여기서 나가야 하는 이유를 대봐. 이 초록피 고블린아! 

스팍은 여느 때처럼 즉시 답했다. 

먼저 당신은 재대하여 스타플릿 소속이 아니므로 메디컬 센터 보안층에 들어올 수 있는 개인적인 권한이 부재하며- 
젠장(Damn it). 누가 그걸 일일히 배경음악으로 깔아달래? 난 짐이랑 개인적으로 할 얘기가 있어. 자리 좀 비켜줘. 

스팍이 고개를 비뚜름히 기울였다. 치켜올라간 그의 눈썹 또한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허가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입회 하에 대화한 후 이곳에서 나가주시면 감사하겠군요. 

정중한 표현이었지만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보면 할 말만 하고 꺼지라는 의미였다. 맥코이는 보답으로 셋째 손가락을 높이 들어올린 뒤 커크를 끌고 개인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잠깐 밖에서 얘기 좀 해. 


그러나 커크는 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맥코이를 말리려 들었다. 


본즈. 이 안에서 얘기하자. 응? 

맥코이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이젠 더 이상 그의 행동을, 이 우습지도 않은 촌극을 보아넘길 생각이 없었다. (그는 스팍이 커크를 데려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겪은 일들로 참을성이 바닥난 상태였다) 맥코이가 커크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본즈'라고? '본즈'라고?? 이런 짓 그만둬. 최소한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 나와 스팍은 네가 누군지 안다고. 스팍이 제임스 커크 흉내를 내라고 시켰지. 응? 그런 거지? 네가 원한 게 아니었지?


맥코이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는 원래의 모습을 보일 거라는 희망을. 

갑자기 왜 그래. 본즈. 나야.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었던 사람. 

커크의 말에 맥코이는 자신이 딛고 선 땅이 무너져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이 한없이 추락했다: 바닥이 없는 현실의 이름은 절망이었다. 커크는 여전히 또렷한 눈동자 하나로 자신을 꿰뚫어보았다. 그것만큼은, 그래, 정말 예전의 커크와 다를 게 없었다. 기쁠 때는 밝고 진한 하늘색, 화가 났을 때는 어둡고 진한 푸른색, 평소에는 연한 청록빛으로 빛나는 그 오묘한 우주. 비록 하나뿐이 남지 않았어도 우주는 우주였다. 자신이 바라보던 우주였다. 하지만 그 우주는 자신이 살아온 우주가 아니었다. 맥코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커크의 옷깃을 쥐었다. 


아니. 넌 제임스 커크가 아니었어. 그만. 그만해. 내 앞에서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난 계속 제임스 T. 커크였어. 넌 계속 본즈였고.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셔틀에 나란히 앉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맥코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맥코이는 정말이지 스스로가 바보가 된 심정이었고, 지금의 커크를 감당할 수가 없었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분명 그가 진짜 커크가 아님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입밖에 내어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동안 얼마나 듣고 싶었던 단어였던지, 모든 게 그토록 사무치게 다가왔다. 본연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이대로, 정말 스팍이 의도한 대로 그를 제임스 커크가 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우리는 친구를 되찾을 수 있을 텐데. 세계는 영웅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만약 눈을 감고 진실을 모른 체 한다면-. 


하지만 맥코이는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옳은 것 사이에서 저울질해야 한다면 그는 옳은 것을 고르는 사람이었다. 간절히 염원하는 자신을 죽이고 맥코이는 커크에게 속삭였다. 


스팍이 네게 강요한 것, 옳지 않은 일이야. 이렇게 두어선 안 돼. 
닥터 맥코이. 당신이야말로 그만하시죠.

 
결국 맥코이와 커크의 대화를 듣고있던 스팍이 나섰다. 맥코이는 커크를 잡아당겨 그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스팍에게 그를 다시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의 계획에 커크가 희생당하도록 둘 수 없었다. 


본즈, 자꾸 왜 그래! 


커크가 되려 인상을 쓰며 맥코이에게서 빠져나오려 했다. 맥코이는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스팍이 맥코이를 떼어내려 다가오는 사이에 커크의 하얀 안대가 맥코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 그래. 그 뒤에 커크가 커크가 아님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가 있었다. 


맥코이는 그렇게 생각한 즉시 손을 뻗어 커크의 안대를 벗겨냈다. 커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허겁지겁 두 손으로 한쪽 눈을 가리려 노력했다. 


안 돼요...! 

다시 날 보고 얘기해. 이제 제대로 얘기하자. 


맥코이는 실날같은 희망을 느꼈다. 커크에게 다가서려던 맥코이는 곧바로 스팍에게 제지당했다. 


여기서 나갈 것을 권고하지. 지금 당장. 

맥코이는 순간 스팍의 갈색 눈에서 튀어나오는 불꽃을 본 것 같았다. 그는 지지않고 대들었다. 

그는 네 소유물이 아냐. 네 멋대로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어. 
날 그의 보호자로 전권 위임한 것은 당신이고, 이제 와서 아무 권한이 없는 당신이 그 사실을 변경할 수는 없어. 알아들었나(Am I clear)? 
네가 한 짓을 기억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너는 그를 돌볼 자격이 없어!! 너야말로 알아먹어? 나는 정당하게 그를 데려왔었다고! 

스팍과 맥코이는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고, (사실 목소리가 커진 쪽은 맥코이 혼자였다) 때문에 커크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는 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서툰 움직임이었다. 커크는 찾던 물건을 한참 동안 발견하지 못하자 결국 포기했다. 


그만... 그만해주세요. 

커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거진 악을 쓰던 맥코이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스팍은 이를 무시했다. 커크는 급기야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님!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스팍과 맥코이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커크를 바라보았다. 커크는 기어들어가려하는 목소리를 붙잡아 공기중에 토해냈다. 

싸우지 마세요. 전부 제 잘못이에요. 



-



스팍과 본즈가 커크의 양육권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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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문이 소리없이 움직였다. 맥코이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얀 벽과 종이책이 듬성듬성 들어찬 책장, 정갈한 침대 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는 스타플릿의 회색 정복이 모자와 함께 걸려 있었고, 원목 책상 위에는 작은 엔터프라이즈 모형이 새초롬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낯익은 등과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짐- 

맥코이는 차마 입을 열어 그를 부르지도 못했다. 탄식만을 내뱉은 그의 입이 뻐금거리다 이내 닫혔다. 의자에 앉아있던 커크는 문이 열린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짧고 삐죽삐죽한 금발에 맑고 진한 하늘색 눈동자가 빛났다. 그러니까, 왼쪽 눈의 안대와 흉터만 제외하고는 여상스러운 커크였다.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였다. 


함댱님!! 

체코프가 가장 먼저 울먹이며 달려들었다. 스콧도 지지 않겠다는 듯 진짜 죽은 줄 알았슈, 짐보! 라 덧붙이며 뒤따랐고 술루 또한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가득 띄운 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커크는- 

놀랍게도 웃었다. 그는 자신의 품에 매달린 체코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코끝이 발개진 채로 투덜대는 스콧에게는 죽긴 누가 죽었냐며 농을 던지기도 했다. 술루와는 진한 눈인사를 주고 받았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있는 맥코이 곁에 스팍이 다가왔다. 그는 잠자코 뒷짐을 지고 서서 커크와 크루들을 지켜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맥코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그를 추궁했다. 스팍은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일말의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그를 고쳤지(I fixed him). 
제정신이야? 

스팍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맥코이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할 수 없었던 일이야. 당신이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이기도 하고. 


맥코이가 한쪽 눈썹을 거의 찌그러뜨린 채 스팍을 돌아보았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저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서커스의 광대처럼 다른 사람 흉내를 내는 게? 

크루들이 들을까 싶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지만, 스팍에게는 분명하게 들렸다. 스팍은 빠르게 답했다, 

정상인가 비정상인가는 문제가 아냐. 그는 분명 우리의 '그'가 아니지만 동일한 외모를 가졌고 이를 충분히 이용할 수 있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냐. 
저게 문제가 아니면- 젠장, 빌어먹을 벌컨에게 중요한 게 대체 뭔데? 자기만족? 인형놀이? 

맥코이가 속으로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크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주먹쥔 손을 등허리에 걸었다. 그러자 두 남자는 거의 비슷한 포즈를 하고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스팍은 다시 시선을 커크와 크루들에게로 옮겼다. 

저것. 
저게 뭐? 
뭐가 보이지? 

맥코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틀어 그들을 주의깊게 보았다. 그는 체코프가 커크를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스콧이 커크의 어깨에 팔을 걸고 거칠게 반가움을 표시하는 것도 보았고, 술루가 안부를 묻고 커크가 자연스럽게 대답하는 것도 보았다. 약 5년간 볼 수 없었던-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했던 광경에 무언가가 울컥 하며 심장을 치고 올라왔다. 


맥코이는 스팍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진실....... 저들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어. 

맥코이가 애써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는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을 숨길 의무가 있지. 
아니야. 그 두 가지는 달라. 그건 의무가 아니라 네 욕심이라고. 
사사로운 감정은 개입되지 않았어. 이건 모두 저들과 제임스 커크를 위해서야. 닥터 맥코이. 

맥코이는 입을 다물었다. 크루들과, 사라진 제임스 커크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저 아이는? 무슨 잘못이 있기에 그런 역할을 감당해야만 하지? 

우리는 그에게 저걸... 저런 짓을 강요할 권리가 없어. 
그도 동의했어. 

스팍의 즉답에 맥코이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항변했다. 

그는 어떤 것도 거절하지 않잖아....... 


스팍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크루들은 맥코이를 손짓해 불렀고, 문가에 있는 스팍과 맥코이를 본 커크는 활짝 웃었다. 

본즈! 


뭐? 맥코이는 그 순간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참을 수 없었다. 속에서 극렬한 거부감이 일었다.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던 맥코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커크에게 다가갔다. 절대 스팍의 선택을 존중할 수는 없었지만, 동시에 기쁨과 환희에 젖어있는 크루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맥코이는 짙은 패배감을 씹으며 얼굴 근육을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짐. 
왜 이제 왔어? 

맥코이는 입 안을 깨물며 이 이상한 상황을 견뎌내려 노력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났다. 입 안에서는 피맛이 났다. 맥코이는 도저히 커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맥코이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자 크루들이 자연스레 뒤로 비켜서 주었다. 맥코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렸다. 


늦어서 미안해. 
괜찮아. 본즈. 

전혀 안 괜찮아. 괜찮은 건 아무것도 없어. 맥코이가 속으로 토해냈다. 구역질의 원인은 이것이었던가. 재삼 솟아오르는 역겨움을 삼킨 맥코이는 곱씹고 또 곱씹었다. '네'가 그 이름을 알아선 안되잖아. '네'가 그 이름을 불러선 안되잖아. 


어. 울어? 
아니. 아니야. 

시선을 피하는 맥코이에게 커크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맥코이의 턱을 잡아 올렸다. 맥코이는 흠칫 떨었지만 그를 뿌리칠 수 없었고, 그때서야 커크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본즈. 

동그란 눈이 잔주름을 만들며 둥글게 휘어졌다. 우주가 그 안에 잠겼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맥코이는 그 순간 눈을 감아버렸다. 

이건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건 아니었다. 



-



악마는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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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복도 전체에 붉은 빛이 점멸했다. 


이게 무슨-?! 

맥코이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에 스콧과 체코프 또한 깜짝 놀라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메디컬 센터는 평온했지만 스타플릿 시스템 내부적으로는 보안 레벨 레드가 발령된 상태였다. 맥코이는 거의 뛰다시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좀 해봐! 
이, 이건 제가 할 쑤 업서요(I can't do jat)! 써큐리띠 시스뗌을 해킹했다간 전 그대로 웜죄자가 된다구요!! 
거 영창 내가 가봤는데 별 거 없어! 빨리 스팍 그 양반이 보기 전에 꺼! 
해킹 기록운 남눈단 말이예요! 규약을 어기묘는 대령님께소 조를 가만두지 않으실...! 
됐어 그럼!! 거기서 도망치기나 해! 

맥코이는 그들에게서 도움받을 것이란 생각을 포기하고 통신기를 귀에서 뽑아내 집어던졌다. 그리고 복도 끝에 보이는 문을 향해 빠르게 다가섰다. 상당히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 문고리를 잡아 열게 되어있는 구식 문이었다. 

여기구나. 
여기에 있구나. 

순간적인 직감이 맥코이의 뇌리를 스쳤다.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이 문 뒤에 커크가 있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렸지만 걸쇠가 걸려 있었다. 맥코이는 이를 갈며 문을 세게 두드렸다. 

이봐! 짐! 너 안에 있지!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급속도로 불안이 몰려왔다. 맥코이는 목이 쉴 때까지 커크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내려치고 발로 찼다. 미세한 흠집만 생길 뿐 그 빌어먹을 문은 통 열릴 기미가 없었다. 긴장으로 지친 맥코이는 문에 주먹을 댄 채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는 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짐. 지미.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덕분에 형편없이 먹먹한 목소리가 났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맥코이는 주먹으로 얼굴을 비볐다. 애가 끓었다. 그는 차가운 문에 이마를 붙이고 가늘게 속삭였다. 


부탁이야. 제발. 안에 있다면 대답이라도 해줘. 

여기까지 와서 그를 만나지 못한다면, 이젠 정말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 게다가 더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조금 있으면 보안 요원들이 올라올테고, 그대로 끌려가겠지. 맥코이는 깜빡이는 붉은 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간청했다. 

널 다시 만나려고 왔어.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맥코이는 문에 귀를 붙이고 손을 댔다. 두터운 문에서는, 그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손바닥에 와닿는 감각은 잔인하리만치 냉막했다. 자신을 거절하듯 차갑고 무정했다. 

한 번만,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맥코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정신없이 빌고 또 빌었을까. 맥코이는 어느새 보안 레벨 레드가 해제된 것도, 일단의 사람들이 걸어와 자신 앞에 서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주저앉은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맥코이는 그 잠깐 사이에 폭삭 늙은 얼굴이었다. 


독또르.... 

안타까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맥코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체코프를 비롯하여 스콧과 술루가 모두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다들 씁쓸하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맥코이의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의 소유자가 있었다. 


벌컨은 평균적인 인간의 수준보다 월등히 높은 청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닥터 맥코이. 

뭐? 맥코이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스팍을 바라보았다. 크루들 사이로 나타난 스팍은 맥코이를 노골적으로 내려다보았다. 다른 크루들은 그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알고보니, 그들의 작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더 구체적으로는 스콧이 술루에게 가라고 외쳤을 때부터 스팍은 그들이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리프트에서 그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 것 또한 모두 들었다) 술루의 요청에 순순히 따른 것은 그들이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는가 관찰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는 맥코이가 31층에 들어간 것도 금세 알았다. PADD와 써큐리티 시스템이 직접 연결되어 있었던 덕분이었다. 스팍은 경고등이 울린 즉시 술루의 통신기를 이용해 스콧과 체코프가 올라오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직접 술루를 데리고 31층에 올라왔다. 보안 레벨을 해제한 것도 그였고, 이러한 불상사에 대비해 보안 시스템을 설치해둔 것도 그였다.

 
정리하자면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팍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한 치의 벗어남도 없이. 

스팍. 

전말을 알게 된 맥코이는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비슬비슬 일어섰다. 혀끝에 와닿는 감각이 썼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다. 


아니,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커크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예전 동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는 어쩌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들을 이용한 것일지도 몰랐다. 맥코이는 정말이지 커크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스팍 앞에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었다.


규율을 어겼다고 잡아가도 좋으니까, 제발 마지막으로- 
비키십시오. 스팍이 그의 말을 잘랐다. 
뭐? 
문을 열 수가 없잖습니까. 

맥코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을 했고, 스콧이 대신 달려들어 맥코이를 끌어냈다. 맥코이는 당황한 얼굴로 스팍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어허, 의사 양반. 쉿. 

앞으로는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방문 요청을 하길 바랍니다. 모두에게 주지시켰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만약 앞으로 또 규율에 어긋나는 방법을 사용한다면, 모두를 규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스팍이 구식 열쇠로 문의 시건장치를 해제하며 말을 이었다. 딸깍, 하며 걸쇠가 풀어졌다. 

알겠습니까? 

문이 열렸다. 



-



사랑은 열린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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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하지. 


스팍은 리프트 버튼을 누르고 뒷짐을 진 채 섰다. 술루 또한 그와 비슷한 자세로 나란히 섰다. 그들은 리프트 문이 열리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께 발을 들여놓았다. 술루는 재빨리 버튼 앞에 서서 운을 뗐다. 몇 층 가시죠? 스팍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간결하게 답했다. 

31층. 

그 단어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자마자 스콧과 체코프가 다급하게 떠들었다. 

의사양반!! 31층이란다! 
31쯩! 독또르 맥꼬이! 31쯩요! 

맥코이는 그들을 향해 짜증을 냈다. 

나도 들었어! 

술루는 31층의 버튼을 누른 뒤 10층도 눌렀다. 여동생의 병실이 있는 곳이었다. 두 남자 사이에는 다시금 침묵이 가라앉았다. 자신의 역할을 마친 술루는 그저 맥코이가 잘 해주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한편 맥코이가 탄 승객용 리프트는 체코프가 해킹해두어 외부에서 버튼을 눌러도 열리지 않았고,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맥코이는 안에서 31층 버튼을 찾다가 이내 하얗게 질렸다. 

여긴 31층으로 가는 버튼이 없는데? 
머요??

말 그대로였다. 승객용 리프트에는 30층까지 가는 버튼밖에 없었다. 즉, 31층은 직원용 리프트로만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맥코이와 스콧이 번갈아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동안 사색이 된 체코프는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쑬루! 미슷또 쑬루! 오또케 하죠?? 
그 양반은 스팍이랑 있는데 물어봐서 뭐한담! 일단! 일단 내리슈! 우린 최대한 시간끌어 봐야제! 

맥코이는 다시 지하 1층에서 문을 열고 내렸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직원용 리프트의 버튼을 눌렀다. 입술이 말라 거의 잡아뜯다시피 하던 맥코이는 곧 리프트를 조종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고, 즉시 통신기에 대고 외쳤다. 

체콥, 직원용도 해킹할 수 있지? 
아, 아예! 
정지시켜버려! 

예?? 체코프가 놀라 반문하자 그보다 빠르게 스콧이 손을 놀렸다. 놀랄 시간이 어디 있슈! 

덜컹, 순간 술루와 스팍이 탄 리프트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섰다. 마침 딱 10층이었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10층 밖에 선 사람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술루는 식은땀을 흘리며 열림 버튼을 눌러댔다. 

갑자기 왜 이러죠? 고장났나? 

스팍은 아무 말 없이 비상 버튼을 눌러 통신을 시도했다. 센터 관계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은 스팍은 뒷짐을 지고 입을 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는군. 잠시 기다리지. 

술루는 손에 차오른 땀을 숨기려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작전을 계획하고 총괄한 사람으로써 술루는 거한 책임감을 느꼈다. 목적은 하나였다. 그들이 이렇게 상관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도치 않은 피해를 입혀가면서까지 이 작전을 시행한 이유. 


그들은 커크를 만나야만 했다. 

빌어먹을, 직원용 엘리베이터는 그거 하나야. 술루! 스팍을 거기서 내리도록 해야 해! 

맥코이의 통신을 듣고서도 술루는 손만 쥐었다 폈다 하며 스팍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그다운 자세로 뒷짐을 지고 묵묵히 상황이 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루!! 맥코이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대령님, 제 생각에는- 

결국 술루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리프트가 갑작스럽게 추락할 수도 있으니 여기서 내리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마침 10층이고. 대령님이라면 수동으로 이 문을 열 수 있으실 텐데. 
관계자의 말로는 곧 수리할 사람이 도착한다고 했어.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위험 확률을 줄이겠지. 대위. 

술루를 바라본 스팍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얼굴이 굳어있는 걸 알아챈 듯싶었다. 술루는 그가 의심할세라 선수를 쳤다. 

제 여동생에게 오늘 빨리 가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물론- 늦어서 엄청 화낼 테지만. 그거 아세요? 사실 제 동생이 스팍 대령님의 팬이거든요. 그래서 스타플릿에 입대했어요. 만약 얼굴 한 번이라도 비쳐주신다면 정말 좋아할 텐데. 
내게 부탁하는 건가? 
예? 아, 예. 개인적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바쁘지 않으시다면요. 제 여동생은 화나면 정말 무섭거든요. 

스팍은 10에서 멈춰있는 층수 표시기를 흘깃 보고, PADD를 꺼내 현재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20분이었다.

좋아. 리프트가 수리된 후 문이 열리면 동행하도록 하지. 
예? 아. 그렇죠. 문이 열리면요.... 


술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스팍은 자세 하나 변하지 않았고 술루는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스팍과 술루의 대화를 듣고있던 스콧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저 고지식하고 단호한 벌컨에게는 뭐가 통하는 법이 없었다. 

아 거 미치겄네! 그냥 열어버리게! 
구래두 대요?! 
몰러!! 

또다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덜컹대며 리프트의 문이 열렸다. 마침 기다렸다는 것처럼 작동하는 리프트에 스팍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딱히 술루를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운이 좋네요. 벌써 고쳤나봅니다. 

술루는 속으로 여동생이 자고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며 리프트에서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스팍은 군말없이 그를 따라 내렸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게 리프트에 탔다. 

병실은 이쪽입니다. 대령님-. 

술루가 시간을 끄는 중에 (그는 병실 앞에서 주의사항이라며 여동생에 대한 사소한 프로파일을 읊어댔다) 체코프는 리프트를 조작해 맥코이가 있는 층에 보냈고 맥코이는 잽싸게 그것을 잡아탔다. 리프트가 제멋대로 움직인 것에 당황한 사람들에게 현재 리프트가 고장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코이가 리프트에서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후 31층을 누르자 리프트가 흔들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발. 빨리 좀 움직여라. 

맥코이는 버튼을 두들기며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리프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31층에 리프트가 멈춰서고 문이 열린 순간, 맥코이는 그야말로 총알같이 튀어내렸다. 그는 텅 빈 복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가 한 발을 내딛자마자 그를 반기는 목소리가 있었다. 

보안 레벨 레드. 신원 미상 침입자입니다. 



-



세상일은 언제나 생각대로 되진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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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스팍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대해 아주, 매우, 굉장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한 가지- 크루들에 관해서는 그와 의견을 같이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크루들에게는 커크의 상태를 알리지 말자.


이는 자신들만 비밀을 간직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사람들을 진실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시행한 조치였다. 스팍과 맥코이는 자신들이 커크를 잃고 고통스러워한 것과 마찬가지로 크루들이 어떻게 가슴아파하는지를 보았다. 특히나 맥코이는 지금의 커크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결국 그는 모든 크루들에게 줄 부담을 홀로 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었다. 또다른 슬픔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제임스 커크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된다. 맥코이는 그렇게 여겼다. 


스팍 또한 이에 동의했다. 맥코이와는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스팍은 임무가 종료되는 와중에 크루들에게 불필요한 감정적 충격을 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래서 커크의 몸 상태가 최악이라든지 그가 기억이 전혀 없다든지 하는 자세한 내용은 맥코이와 스팍만 알고 있었다. 당시 크루들에게 전달된 내용은 짧았다. 


제임스 T. 커크 함장은 트랜스포터 오작동으로 다른 우주에 갇혀있다가 돌아왔다. 건강상의 이유로 그는 함장직을 사임한다. 


돌아온 커크는 메디컬 베이의 특수실에 격리되어 있었고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건 맥코이, 그리고 스팍뿐이었다. 커크에 대해 신비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무성한 소문이 퍼졌던 것은 그래서였다. 엔터프라이즈의 전 크루 중 누구도 돌아온 커크와 대화하거나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들이 커크를 만나려는 시도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주치의인 맥코이의 허가 하에 커크는 제대 후 일신을 스팍에게 의탁했고 따라서 스팍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브릿지 멤버 중 일부는, 특히 우후라를 필두로 한 몇 명은 단체로 스팍을 찾아가기까지 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레너드 맥코이라면, 최소한 피도 눈물도 없는 벌컨은 아니지 않은가. 크루들이 마지막으로 맥코이를 찾아갔을 때 그는 모든 권한을 스팍에게 넘겼다는 이유로 그들의 부탁을 거절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맥코이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고, 크루들이 이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연락을 받은 술루가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저녁 무렵이었다. 자신이 부순 것을 대신해 최신형 통신기를 사주기로 약속한 맥코이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 언제 왔는지 스콧까지 책상 위에 앉아 체코프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는데요. 
한 백 년쯤 됐제? 


술루가 들어서자 스콧이 농을 던졌다. 오 개월 정도 되오씀니다! 체코프도 끼어 작은 사무실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맥코이는 이에 낄 생각이 없어 그저 잠자코 있었다. 한동안 사는 얘기를 주고받던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맥코이를 돌아보았다. 


긍까, 이렇게 정예 부대를 불러제낀 이유가 뭐요 의사양반. 역시 그거요? 


스콧은 특정 단어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체코프와 술루는 이해했는지 시선을 주고받았다. 맥코이는 팔짱을 낀 채로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 


스팍이 짐을 데리고 있어. 그건 모두가 알고있는 사실이지. 한 달 전에는 정비소에 있는 엔터프라이즈에 들어가기까지 했고. 


스콧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멀리서 봤소. 짐보가 그 노오란 셔츠를 입고 브릿지에 들어가시더라고. 허, 증말 눈물나는 줄 알았다니깐. 내가 달려가려 했는데-


맥코이는 길게 이어지려는 스콧의 말을 제지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몇 주 동안이나 짐이나 스팍을 보지 못했어. 스팍과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좀 했었거든...어쨌거나. 그 후 체코프는 스팍이 자택근무로 전환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최근 스팍이 자택에 들어간 기록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는 것도 알아냈지. 나는 직접 가봤었는데, 스팍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어. 


맥코이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럼 스팍과 짐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몇 가지 사실을 제외했지만 결정적인 이야기들은 충분히 전달된, 맥코이의 브리핑이 끝나자 체코프와 스콧이 눈을 깜빡이며 고민에 빠졌다. 그들은 거기서 막힌 상태였다. 스팍이 있는 곳을 찾는다면, 그곳에 커크도 있을 텐데. 맥코이마저 인상을 풀지 않는 가운데 술루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 질문에는 제가 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후라는 우주에 있어 그들의 작전에 함께하지 못했고, 캐롤 또한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운 터라 그들에게 응원 메세지만을 전해왔다. 


짐에게 안부 전해줘요. 
제 안부도요. 
염려 딴딴히 붙들어 매라굽쇼. 


스콧이 가슴을 팡팡 쳐 보였다. 우후라와 캐롤이 통신을 종료하자 스콧이 호버링 카 뒷자석을 돌아보았다. 키보드를 두들기던 체코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잘 들리쇼? 


스콧의 질문에 술루와 맥코이가 차례로 답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깨끗하게 잘 들립니다. 
잘 들려. 


체코프와 스콧은 스타플릿 메디컬 센터 지하주차장에 주차한 호버링 카에 있었고 술루와 맥코이는 센터 내부에 있었다. 스콧은 모니터링을, 체코프는 해킹을, 술루는 작전 지휘와 스팍 블로킹을, 맥코이는 커크를 찾는 역할을 맡았다. 


기억하시죠? 제가 스팍 대령님을 붙들고 시간을 끌테니 닥터는 그 사이에 먼저- 
그 설명만 다섯 번째야! 


술루의 말에 맥코이가 투덜거림으로 답했다. 술루는 지난번의 경험을 토대로 스팍이 센터 로비 대신 뒷문을 이용할 거라 예상했고 그것은 적중했다. 스콧이 속삭이듯 외쳤다. 


주인공 오셨수! 


알고보니 스팍은 개인 차량이나 대중교통 대신 무료 셔틀만을 이용했다. 탑승 기록이 남지 않는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또한 맥코이를 비롯한 크루들이 스팍을 쉽게 찾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스팍은 셔틀에서 내려 잠깐 주변을 살피고는 센터 뒷문으로 들어왔다. 모니터를 주시하던 스콧이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스팍을 확인했다. 그는 주차장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직원용 엘리베이터로 직행했다. 


움직여, 움직여! 


스콧의 재촉에 술루가 비상계단에서 튀어나갔다. 술루를 알아본 스팍은 멈칫했고 그 틈에 술루가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본격적인 작전 시작이었다. 


또 뵙네요. 





사실 이 소설의 장르는 첩보 액션 스릴러 입니다 


Posted by 카레우유 :

한편 레너드 맥코이는 백방으로 커크와 스팍을 찾고 있었다. 군의관을 때려치고 나온 맥코이로서는 다시 스타플릿 소재의 건물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고, 스팍은 이를테면 군부의 권력자 중 하나였다. 그리고 철통같은 시스템의 보안을 뚫을 능력이 맥코이에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해낼 사람을 알았다. 


구로니까 스팍 부함댱님- 아니 대령님께서 일하시눈 곳만 찾으묜 되죠? 구론 고죠? 
그렇다니까. 
저도 지굼은 아까데미 소속이라 들키묜 안 돼요. 구나저나 왜 구걸 찾으시눈 고에요? 
그게....... 


맥코이가 말을 골랐다. 


사소한 말다툼을 했는데, 나한테 단단히 삐졌는지 내 연락은 죽어도 안 받아. 그 몹쓸 빌어먹을 못되처먹은 냉혈동물 파충류가. 


다채로운 욕설을 듣고 체코프가 멋쩍게 웃었다. 


두 분께소 싸우시돈 게 어디 하루이뜰인가요. 구롬 다른 사람 통신기로 욘락해 붜시눈 건 오때요? 


맥코이가 잠잠해졌다. 체코프는 터치 키보드를 치다 말고 옆을 돌아보았다. 


독또르? 
넌 정말 천재야, 꼬마. 전화 좀 빌릴게. 


맥코이가 그의 통신기를 낚아챘다. 체코프는 당황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독또르!! 
내가 돌아올 때까지 찾아놔! 
구치만...! 독또르 맥꼬이! 


체코프는 닫힌 문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시 모니터를 주시하고 한숨을 쉬었다. 느릿한 표정과 대비되게 키보드 위의 손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 분 다 죵말 제멋대로라니까....... 



스팍은 파벨 체코프 교수로부터 연락이 온 것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그는 커크의 개인실에서 업무를 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추론해봐도 그가 개인적으로, 그것도 먼저 자신에게 연락해올 일은 없었다. 업무적으로 스타플릿 아카데미에 자신을 초청한다거나 세미나 연락이 아닌 이상은.

 
아니, 그런 경우에도 그가 아닌 담당 교직원이 연락을 할 터다. 스팍은 체코프가 연락할 이유란 얼마 전 술루가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커크에 대한 것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잠시 외출하겠습니다. 
다녀와. 


커크는 잡고있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맥코이의 집에 있던 것과 동일한 아날로그형 장서였다. 스타플릿 규약집이라거나 우주 외교 분쟁에 관한 판례집, 외계생물학 등 재미없는 책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커크는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완벽한 커크가 되기 위해 그것들을 탐독했다. 


그럼. 스팍은 짧게 목례하고 개인실을 나섰다. 그리고 커크가 들을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곳까지 멀어진 후에야 연락을 받았다. 


스팍입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체코프 교-. 
야 이 개자식아!! 


연락을 받자마자 터져나오는 노호성에 스팍은 즉시 미간을 찌푸렸다. 발달된 청각을 지닌 벌컨에게 큰 소리는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스팍은 통신기를 자신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욕설이 쏟아져서, 스팍은 이 장소가 밀폐된 복도라는 데 매우 감사했다. (메디컬 센터의 꼭대기층에는 커크의 개인실 하나밖에 없었으며, 일정 계급 이하는 들어올 수 없는 등 엄중한 보안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게 커크를 데려가면 모를 줄 알았냐는 둥, 허락도 없이 집에 들어왔으니 고소하겠다는 둥, 당장 튀어나오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는 둥 다양한 협박과 으름장과 욕설이 이어졌다. 스팍이 즉시 연락을 끊지 않은 이유는 인내심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런 맥코이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스팍은 묵묵히 기다리다가 맥코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을 때에야 통신기를 원위치에 두었다. 


용무가 끝났다면 통신을 종료하도록 하겠습니다. 닥터 맥코이. 


아카데미 건물을 나와 교정에 서 있던 맥코이는 다시 분을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주변을 지나가던 생도들과 교관 몇이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야!! 지금까지 얘기한 거 어디로 들었어?! 귀는 큰데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먹어?? 


제 종족을 비하하는 발언과 제 인격을 모독하는 당신의 언급을 10분 동안 경청했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이 연락한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이라 사료되는 바입니다. 또한 타인의 통신기로 연락하는 행위는 삼가주시면 고맙겠군요. 그럼 이만. 
스팍!! 젠장, 스팍!! 끊지 마, 빌어먹을, 끊지 말라고!! 제발!! 


맥코이는 숫제 땀을 흘리며 통신기를 붙들고 매달렸다. 워낙 소리를 지른 탓에 (그리고 스타플릿에 소속된 사람들에게는 낯익은 이름을 거리낌없이 불러제낀 탓에) 맥코이는 사람이 뜸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잠시 동안 스팍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맥코이는 거의 절망했다. 그는 통신기를 부여잡고 애타게 요청했다. 


제발, 제발 부탁이야. 스팍. 끊지 마. 
용무를 말씀하시죠. 


스팍의 딱딱하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맥코이는 심호흡을 하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어쨌거나 현재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스팍이 아닌가. 맥코이는 두 손으로 소중히 통신기를 쥐었다. 긴장감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짐.... 너랑 있어? 


스팍은 뜸을 들였다. 맥코이에게는 천추보다 긴 5초였다. 


부정합니다. 


순간 맥코이는 통신기를 던져버리고 욕을 내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내가, 봤어. 감시 카메라로 네가 내 집에 들어왔던 걸 봤다고. 그리고 다음날 그가 사라졌어.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다섯 살짜리 꼬마라도 알아! 


결국 맥코이의 언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스팍은 평온하게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우리의' 제임스 T. 커크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긍정합니다. 당신의 집에 있던 자는 사라졌지만 제임스 커크라면 제 근처에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빌어먹을 헛소리야? 


맥코이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스팍은 더없이 냉정하게 답했다. 


조만간 알게 될 겁니다. 
젠장, 내가 알아듣게 설명- 


뚝.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스팍은 그대로 연락을 종료했다. 


덕분에 맥코이는 학생 시절 이후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 상스러운 말을 마음껏 쏟아냈고, 이번에야말로 있는 힘껏 통신기를 벽에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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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할 시간도 업서ㅠㅠ 학어ㅜㄴ 컴으로 몰래몰래올리는중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