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과 지낸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커크는 날짜를 헤아리다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의사 선생님 와? 

PADD위를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책상에 앉아있던 스팍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개인 사정으로 오지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의료 등급이 있는 제가 대신 당신의 신체 상태를 체크할 겁니다. 
그렇구나. 

커크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커크는 손으로 한쪽 팔을 만지작거리며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그 반응이 어딘가, 스팍 내면의 불편함을 야기했다. 그 모습을 본 스팍은 PADD를 내려놓고 커크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커크. 
응? 
닥터 레너드 맥코이를 보고 싶습니까? 
응. 
제가 말씀드린 것들 전부 기억하십니까? 
응. 

커크는 어느새 자신의 팔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의 핏기가 사라져 하얗게 된 채였다. 이를 눈치챈 스팍이 팔을 뻗어 그의 손을 떼어놓았다. 


그만하세요. 혈액순환이 안 됩니다. 


커크는 아, 하고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 듯했다. 스팍은 그 와중에 살짝 스친 커크의 피부에서 밀려들어오는 공백의 감정을 느꼈다. 즉,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스팍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해야만 할 일이 있는데, 스팍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찬찬히 기억을 떠올렸다. 


일전, 당신이 제게 제임스 커크가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응.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하십니까? 
'응'이라고 했어. 

커크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스팍은 자신이 필요 이상의 말을 하고 있다고 인식했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제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커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짐은 존경하는 친구이자 사랑하는 형제였습니다. 그는 제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줄 알았고, 제게 놀라운 세계를 알려준 사람이었습니다. 무모하지만 용감했고 가벼웠지만 유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팍은 커크가 아닌 그 앞에서 차곡차곡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당사자에게 진심을 고할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지금 이 기회, 이것이라도 놓친다면 앞으로 다시는 말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말하지 않은 생각은 마음 한 켠에서 먼지에 파묻히다 종래는 잊혀지고 말 것이었다. 보내지 못한 편지와 하지 못한 말들처럼. 끝끝내 수신자를 잃고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들처럼. 

그의 전략은 천재적이었고, 그의 말은 다정했습니다. 지구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인간적인 영웅. 고고한 우주의 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은 절대 그가 될 수 없습니다. 


커크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스팍 또한 그의 무반응에 더이상 개의치 않았다. 

과거에 제가 감정적으로 행동했던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그런 사람을 잃었다는 생각에, 당신이 감히 그를 흉내내고 있다는 생각에 감정의 영역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겁니다. 지금은 문제가 발생할 여지를 모두 제거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커크가 운을 뗐다. 커크는 자신의 팔 대신 환자복을 움켜쥐고 있었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취해진 행동이었다. 즉, 일종의 습관이었다. 스팍은 그것을 다시금 그것을 지적하려다 입을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럼 왜 지금은 내가 그를 흉내내길 원해?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위해서인데? 
저와 당신을 제외한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커크는 이해하지 못했다. 스팍은 부연했다. 

당신이 지금 세계로 나간다면 다른 사람들은 제임스 커크를 당신으로 기억하겠죠. 백지 상태의 무능력한, 죽어가는 인간. 저는 제임스 커크가 그렇게 기억되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의 최후 또한 명예롭게 역사에 기록되길 원합니다. 
내가 사라지길 원하는구나. 커크가 중얼거렸다. 
10913이라는 사람은 저와 닥터 맥코이만 알고 있으니까요. 셋 중의 한 사람이 발설하지 않는 한 그 사실이 밝혀질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제임스 커크로서 살아가면 됩니다. 


스팍이 강조했다.


죽을 때까지. 


커크의 손에 힘이 풀렸다. 잔뜩 구겨졌던 환자복이 그제야 제 모습을 찾아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세게 접혀 생긴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이미 발생한 일을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지극히 단순한 논리구조였다. 커크는 죽었고, 자신은 그 커크가 아니며, 스팍은 그가 커크가 되기를 바랐다. 따라서 커크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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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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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터 밖으로 나가던 스팍은 로비에서 술루와 마주쳤다. 


스팍 대령님. 
대위. 


엔터프라이즈의 5년 임무 종료 후 그들은 각기 한 계급씩 승진했다. 커크 실종 이후 무사히 함선과 크루들을 이끌어 탐사를 마친 것에 대한 상급이었다. 그 이후 엔터프라이즈의 일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지상직을 선택한 술루, 스타플릿에서 교편을 잡은 체코프를 비롯하여 다른 함선에 탄 우후라, 엔터프라이즈에 남은 스코티, 제대하고 병원으로 돌아간 맥코이 등 구심점을 상실한 이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스팍 혼자 커크를 잃은 게 아니었다. 그들 모두, 그리고 스타플릿과 지구 또한 제임스 커크를 잃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긍정하지. 
여긴 어쩐 일로.... 

반가운 표정을 지었던 술루는 스스로 답을 찾은 듯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이를 눈치챈 스팍은 로비 대신 뒷문을 이용할 것을, 하고 5초 간 후회했다. 

함장님, 아니, 미스터 커크가 여기 있군요. 
내가 귀관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어. 

술루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대령님. 단지 추측했지요. 
근거 없는 추측은 삼가도록. 귀관은 왜 이곳에 왔지? 
여동생이 여기 있습니다. 

술루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었다. 스팍은 그럼, 하고 자리를 피하려 했다. 술루가 그를 붙들었다. 

대령님. 그가 무사한 것 맞습니까? 우리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은퇴하다니 짐이 그럴리가 없어요. 물론 몸이 안 좋다고 들었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모습이라도 보여주셨어야죠. 지금은 정말 그가 살아있는지조차- 
귀관이 상관할 문제가 아냐. 

스팍이 냉막하게 뿌리쳤다. 술루는 얼굴을 굳혔다. 

스타플릿에 모셔온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엔터프라이즈에 들어갔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저희들은 그를 만날 수 없는 겁니까? 
크루들을 보지 못하게 한 건 닥터의 권고였어. 그에게 더 충격을 주지 않고자 하는. 
왜 저희를 만나는 것이 충격이라는 거죠? 


스팍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그 충격이란, 정확히 말하면 그의 충격이 아니라 크루들이 받을 충격이었다. 맥코이는 커크가 아닌 커크를 보게 될 크루들의 반응을 걱정했다. 스팍조차 한때 그것을 견뎌내지 못한 것을 보면, 그의 우려는 신빙성이 있었던 셈이다. 그들에게 지금의 커크는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였다. 

나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해. 

스팍은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더 대화했다간 그에게 커크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들 소지가 있었다. 커크가 더이상 예전의 커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퍼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맥코이와 스팍이 유일하게 합의한 사안이었다. 스타플릿 외부뿐 아니라 내부에도 커크는 그저 심한 충격으로 요양중인 환자여야 했다. 술루가 급하게 그를 불렀다. 


스팍. 

스팍이 뒤를 돌아보았다. 


상관에 대한 예의를 지켰으면 좋겠군. 

이름 대신 계급 혹은 직함을 부르라는 지적이었다. 술루는 기죽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예의요? 대령님. 우리는 한때 엔터프라이즈의 일원이었고, 모두 한 배를 탄 가족이었어요. 우리에겐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게 예의가 아닌가요? 

스팍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술루가 평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어요. 스팍. 
내포된 의미가 불분명하군.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끝까지 모든 걸 감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경고인가? 
조언입니다. 

스팍이 입술을 오므리며 답했다. 

새겨듣지. 



스팍은 그 후로 더욱 주의깊게 메디컬 센터를 드나들었다. 정문과 로비를 이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늘 홀로 탑승했다. 또한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평균 20시간을 커크의 개인실에 있었다. 그곳에서 스팍은 자신의 업무를 보았다. 


커크는 노쇠한 장기를 인공 장기로 대체하는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인공 장기라고는 하지만 실제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노화하는 인간의 것과 달리 교체만 적절히 해준다면 영구적으로 기능할 수도 있었다. 스팍이 총력을 기울여 개발해낸 초기 시험버젼이었다. 

업무를 보지 않을 때면 스팍은 커크에게 제임스 커크에 대해 가르쳤다. 그의 말투는 어떠하며, 성격은 어떠했는가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커크는 성실하고 충실하게 그것들을 학습했다. 이유조차 묻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처럼 명령에 대한 수용에 불과했다. 

과정이 어찌됐든 결과론적으로 차츰 과거의 커크와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커크를 보고서도 스팍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콜리나르의 영향이었다. 단지 처음 커크를 데려왔을 때부터 느꼈던 익숙한 구토감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커크처럼 행동하는 커크를 볼 때마다 스팍은 목젖까지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애써 참아야 했다. 무조건 반사처럼 몸의 반응 중 하나로 굳어진 모양이다. 스팍은 그렇게 판단했다. 

맥코이는 질리지도 않고 끈질지게 연락을 해왔다. 마치 일전의 맥코이에게 스팍이 연락을 했듯이. 하지만 스팍과 달리 맥코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최소 대여섯 번은 부재중 전화와 욕설이 80% 이상인 음성 메세지, 커크는 어디에 있냐는 문자 메세지가 날아들었다. 물론 스팍은 그 어느 것에도 답장하지 않았다. 

커크가 인공 장기 이식 수술을 받고 요양하는 동안 스팍은 엔터프라이즈의 구 크루들의 사진을 챙겨왔다. 그들의 이름과 성격, 계급, 배경 등을 설명했다. 특히 제임스 커크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에 대해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이때쯤의 커크는 자신이 이 세계의 제임스 T. 커크의 대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게 스팍이 진행중인 과정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게 자신이 해야하는 일인 양, 존재의 이유인 양 따를 뿐이었다. 

그것만이 그가 가진 유일한 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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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 발제 다하구 원고까지 다해따..

이제 바나나 푸딩을 먹승료ㅜㄱㄹ이ㅛ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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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가 사라졌다. 


엔터프라이즈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실종됐던 그 날처럼. 원래 그것이 진짜 현실이고 몇 주 간의 일이 오히려 꿈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그는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맥코이는 온 집을 뒤졌다. 차라리 잠깐 외출하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숨어 자신에게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기를. 맥코이는 헛된 기대를 붙잡고 욕실과 옷장, 찬장과 벽장을 열었다. 그가 들어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침대 아래를 훑고 이불을 들췄다. 그의 방에도, 자신의 방에도, 부엌에도 거실에도 욕실에도 어느 곳에도 커크는 없었다. 그가 사용하던 물건들 또한 감쪽같이 사라진 채였다. 


그는커녕 그가 존재했다는 흔적마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맥코이는 커크의 방에서 자신이 준 선글라스를 발견했다. 단정하게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외에 맥코이가 사준 물건들은 옷이며 가방이며 모두 얌전하게 정리되어 옷장 안에 있었다. 


맥코이는 이 상실의 경험이 낯익었다. 


짐. 제발, 짐. 그만해. 그만하고 나와.... 


맥코이가 끓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파멜라와 헤어졌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냉정한 얼굴로 이별을 선고하던 그녀가 커크와 겹쳐 보였다. 
빈 집은 커크가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었지만 맥코이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소리내어 그를 찾으면 그가 없다는 게 정말 사실이 되어버릴까봐, 목소리를 내기조차 쉽지 않았다. 


원래 혼자 살았던 집인데도 지금은 그 집이 너무나 크고 넓게 보였다. 예전에는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갔는데, 말을 하면 답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자신의 말은 방향을 잃고 죽은 새처럼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제발. 


맥코이는 온기가 사라진 침대를 그러쥐고 울었다. 야속하게도 깨끗히 정돈된 침대는 마치 새것 같았다. 


아무도 그 위에 누운 적이 없던 것처럼. 



혹시 어제 저에 대해 언급하셨습니까? 


한두 명이 타기에는 과하게 큰 셔틀이었다. 커크는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스팍은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운전수를 제외하고는 두 사람이 셔틀의 유일한 탑승객이었다. 


아니요. 


커크는 고개를 저었다. 스팍은 부재중 통화 알람과 음성 메세지 알람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도 패드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창문을 흘끔이던 커크가 안전 벨트를 잡은 손을 꼼질거렸다. 불안해하는 그를 향해 스팍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스타플릿 소재의 메디컬 센터로 가게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그곳에서의 당신은 전 대령 제임스 T. 커크입니다. 전관 예우로 당신이 있을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불가한 특실이며, 가능한 최고의 보안으로 보호받을 겁니다. 또한 저는 당신의 치료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함께 있을 겁니다. 질문이 있으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디가 아파요? 


머뭇거리던 커크가 스팍을 돌아보았다. 스팍은 기계적으로 그를 마주 돌아보고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특정 부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심장을 비롯해 간, 폐, 내장, 위, 그리고 안구 등이 각기 다른 비율로 제 기능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그곳에 도착해서 자료를 보고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 죽는 거에요? 


스팍이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오. 당신이 죽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도심 외곽으로 향하는 동안 스팍은 몇 가지를 당부했다. 자신을 '스팍'으로 부를 것과 존댓말을 사용하지 말 것, 누구든 인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주 인사해 줄 것 등이었다. 커크는 당혹스러워했지만 그것 또한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이전 주인들도 비슷한 명령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스팍은 그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센터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뒷문으로 들어가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덕분에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꼭대기 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커크는 아무것도 질문하지 않았고, 스팍은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커크의 개인실은 단조롭고 깔끔했다. 침구와 협탁, 작은 원목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엔터프라이즈 모형이 수줍게 앉아 있었다. 커크는 모형에 홀린 듯 다가가 책상에 턱을 괴고 그것을 우러러보았다. 


이게 뭐에요? 


스팍은 대답에 앞서 커크의 말투를 지적했다. 커크는 그가 일러준 대로 고쳐 말했다. 


이게 뭐야? 
NCC-1701. 스타플릿 소속의 우주탐사선 엔터프라이즈호입니다. 
내가 이걸 알아? 


기묘한 질문이었다. 커크의 손가락 끝이 닿을 듯 말 듯 엔터프라이즈로 향했다. 그 움직임은 신중하다못해 경건했다. 커크의 연푸른 우주에 하얀 함선이 가득 들어찼다. 


예쁘다. 


스팍은 그 미묘한 어긋남을 인지하는 대신 친절히 설명했다. 


제가 당신을 데려간 적이 있습니다. 일전, 함께 브릿지에 방문했었습니다.


커크의 손가락이 엔터프라이즈의 길다란 엔진부를 훑어내려가다가, 둥그런 원반부 중앙에 닿았다. 원반부 중앙, 바로 그 아래는 브릿지가 있는 위치였다. 톡톡, 손가락이 다정하게 엔터프라이즈를 두드렸다. 커크는 스팍의 말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말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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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말 20화에서 완결날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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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길었다. 맥코이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Nothing). 

귀로 떨어지는 절망적인 답변에 맥코이는 커크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아무렴. 그랬겠지. 다시 한 번 커크를 꽉 안아준 맥코이는 천천히 그를 밀어냈다. 커크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럼 이제 가서 자. 
같이.... 
오늘은 내가 너무 피곤해. 그 얘기는 내일 하자. 

맥코이가 몸을 돌려 옷을 벗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피곤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다 차분한 상태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명한 결론에 이른 맥코이는 커크를 무심하게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찬물로 샤워를 하자 더 명료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커크가 아니라 스팍을 추궁하는 편이 빠를 것이다. 맥코이는 세면대를 짚고 진작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거울 속의 레너드 맥코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듯해서, 맥코이는 시선을 내려버렸다. 차디찬 물방울이 턱을 타고 흘렀다. 

물론 커크가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은 또다른 문제였지만, 그것 또한 스팍 탓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 아닌가. 맥코이는 마음을 편히 먹고 내일 오전에 병원에 출근하며 스팍에게 연락하리라고 다짐했다. 그에게 어떤 욕설을 쏟아부을지 고민하자 차츰 기분이 나아졌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 맥코이는 커크가 침대 옆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쓰러움도 잠시, 그를 이렇게 두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맥코이는 둥그렇게 몸을 말고 자던 그를 흔들어 깨웠다. 커크는 눈을 반쯤 뜨고 마지못해 웅얼거렸다. 

여기서라도 자게 해 주세요. 


맥코이는 여느 때처럼, 최초의 그를 만났을 때처럼, 그리고 제임스 커크에게 했던 것처럼- 

그를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올라와서 자. 

맥코이는 침대 위를 두드렸다. 그리고 대충 바지만 걸치고 반대편에 누웠다. 커크는 잠깐의 휴지pause 후에 (맥코이는 커크의 반응 속도가 느린 것이 마치 버퍼링이 느린 기계 따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매트리스에 손을 얹었다. 맥코이는 등을 돌린 채였지만 매트리스의 흔들림으로 커크가 침대 위에 눕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무게와 맥코이의 무게로 양분된 매트리스가 버거운지 삐그덕 소리를 냈다. 

맥코이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간밤에 커크는 뒤에서 맥코이의 등을 껴안은 것 외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지 꽤나 시간이 흐르고 맥코이 또한 살풋 잠에 들락 말락 하는 시점에, 타인의 팔이 허리를 감아오는 것을 느꼈지만 맥코이는 그를 그저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아침까지 등을 돌린 채 자다가 일어난 것이었다. 


맥코이가 눈을 떴을 때 커크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시트에 남은 미미한 온기로 맥코이는 그가 자신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으리라 짐작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커크는 평소보다 공을 들여 아침을 차렸다. 하지만 어제 급히 퇴근한 덕에 병원에서 질책 아닌 질책을 받았던 맥코이는 아침을 반쯤 먹고 일어섰다. 출근하며 스팍에게 연락도 해야 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았던 맥코이는 마지막으로 물 한 잔을 비우고 현관으로 향했다. 


다녀올게. 
안녕히 가세요. 


배웅하는 인사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을, 급히 나가던 맥코이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맥코이의 바람과 달리 스팍은 연락을 받지 않았다. 출근하는 중에도, 수술과 수술 사이 잠깐 짬이 날 때도 연결을 시도했지만 단조로운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맥코이는 스팍에게 이것을 확인하는 즉시 회신하라고 반 협박으로 메세지를 남겼다. 


오후에는 커크의 치료에 대해 문의했던 의사에게 (미시시피 주립 의대 동창이었다)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장기 이식 쪽으로 경험이 많은 친구였다. 맥코이는 커크의 신체가 위험한 이유는 첫 번째로 그의 장기가 언제 기능이 멈출 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라 보았다. 때문에 커크를 치료하려면 내부 기관 먼저 손을 보아야 했다. 그는 친우인 맥코이의 개인적인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었고 일사천리로 수술 일정이 잡혔다. 커크의 혈액 샘플을 통해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장기를 찾아낸 것이었다. 


맥코이는 친구와 대학 시절 무용담을 주고 받으며 들떴고 스타플릿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는 약간 우울해했다. 수술과 연구, 친구와의 대화로 그날은 모니터를 확인할 새도 없었다. 


퇴근한 맥코이는 사과를 대여섯 알 샀다. 스팍에겐 여전히 연락이 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어제의 일에 대해 화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같이 자고 싶다면 수술이 끝난 뒤에, 건강한 상태에서 고려해보자고 말할 참이었다. 남자와 잔다는 것에 대해 한 줌의 거부감도 없다면 거짓말일 터다. 맥코이는 한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아 키웠고 남자와 남자 간의 교류는 자신과는 연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던 평범한 23세기의 남자였다.


물론 맥코이는 커크가 스타플릿 생도일 무렵에도 남자와 자는 것을 많이 보아왔고 그 행위가 올곧게 쾌락만을 향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였고 마음을 주는 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커크는, 아니, 지금의 커크 또한 어떻게 보면 그와 같았다. 그는 몸과 몸을 부대끼는 행위 즉 스킨십을 통해 안정감을 찾았다. 그 방법 밖에는 없다는 걸 맥코이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맥코이는 '그런' 커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사소한 성적 취향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알람처럼 들려야 할 커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조차, 맥코이는 커크가 먼저 자고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냥 그런 줄 알았다. 묘한 이 기시감을, 맥코이는 애써 무시했다. 적막한 집 안, 그가 싫어하는 우주처럼 고요한 침묵을 그는 깨뜨리려 노력했다. 맥코이는 소파에 가방을 집어 던지고 부엌에서 부러 큰 소리를 내며 사과를 씻었다. 커크가 일어나는 기미는 없었다. 맥코이는 사과를 손에 든 채 커크의 방문을 슬그머니 열었다. 방은 깨끗했다. 커크가 매일 청소해서 티끌 하나 앉지 않은 깔끔한 방이었다. 여느 때와 같았고, 모든 게 그가 나가기 전과 동일한 상태였다. 


하지만 커크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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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사왔는데 왜 먹지를 몬하니! 응? 왜 먹지를 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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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정너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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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코이는 정해진 시간보다 빠르게 퇴근했다. 응급 수술만 급하게 처리하고, 잡혀있던 다른 수술은 동료 의사에게 떠넘기고 나온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맥코이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현관문에 들어섰다. 

다녀오셨어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커크가 그를 맞이했다. 표정없는 얼굴도 여전했다. 맥코이는 나지막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커크가 시계를 보고는 다시 물었다. 


저녁 준비할까요? 

아니. 됐어. 


건조한 대답에 커크 또한 미심쩍은 기류를 감지한듯 입을 다물었다. 맥코이는 도대체 어떻게 이 상황을 해석해야 하는지, 또는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는 감시 카메라를 통해 스팍과 커크가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스팍이 나가는 짧은 광경만을 보았다. 커크가 스팍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 스팍 또한 평온하게 자신의 집 안에 들어왔다는 것, 그 모든 것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고싶은 말은 입 안 가득 차 있음에도 나오는 건 메마른 한숨뿐이었다. 커크는 대화가 끊어지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오랜만의 어색한 침묵에 맥코이의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손에 배어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맥코이가 먼저 운을 떼었다. 

오늘 별일 없었어? 

직접 말할 수도 있었다. 대놓고 아까 일을 추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팍에 대해 아는 체하며 묻는다면 (감시 카메라는 영상만 비출 뿐 음성 데이터는 녹음하지 않는 종류였다) 자신이 집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꼴이었고, 맥코이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내심은 커크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하여. 

아무 일 없었어요. 

담담한 대답에 맥코이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거짓말. 스팍이 왔었잖아. 둘이 이야기까지 했잖아. 혀끝까지 내달렸던 문장이 도로 목구멍으로 기어들어갔다. 맥코이는 끝까지 커크를 믿고 싶었다. 맥코이가 마지막으로 한숨쉬듯 내뱉었다. 


정말로 아무런 특별한 일 없었어? 

커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검은 눈에서는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연푸른 눈동자는 잠깐 맥코이의 시선을 피했다. 

...없었어요.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맥코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커크는 제자리에서 손톱을 물어뜯다가 방으로 향하는 맥코이의 옆에 달라붙었다. 

도와드릴게요. 


커크가 맥코이의 겉옷에 손을 댔다. 맥코이는 날카로워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괜찮아. 들어가서 쉬어. 

커크는 더 안절부절 못하며 맥코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커크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음에도, 맥코이는 신기하다는 생각보다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팍에 대해서.

커크는 주인 눈치를 보는 애완견처럼 맥코이의 방문을 서성댔다. 뭔가 켕기는 거라면, 거짓말을 안 하면 되잖아. 맥코이는 도무지 커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커크는 벽을 긁으며 맥코이의 관심을 끌려 노력하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결국 맥코이가 질문을 던져 주었다. 커크의 얼굴이 마치 하고픈 말이 있는데 맥코이가 묻기 전에는 먼저 말을 꺼낼 수 없다는 식의, 그런 묘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맥코이는 자신이 져주는 심정으로 그의 답을 기다렸다. 


오늘 같이 자요. 

낯익은 문장에 맥코이의 인내심이 한계치까지 솟아올랐다. 뭐? 맥코이가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커크가 자신을 가리키며 강조했다. 

나랑, 자요. 

맥코이는 이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스팍과 무슨 대화를 했기에, 지금까지 잘 지내왔던 커크가 (물론 미묘한 순간들은 몇 번 있었지만 큰 문제랄 것들은 없었다) 갑자기 또 이러는 걸까. 그가 조언이라도 한 걸까? 맥코이는 점차 몸집을 불리는 상상들을 가까스로 중단시켰다. 

커크는 확실히 고장난 상태였다. 솔직히 '자자'라거나 '섹스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그나 예전의 그나 다를 게 없었다. 객관적으로는 둘 모두 개방적인 성생활을 한다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제임스 커크는 쾌락 추구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에 반해서 지금의 커크는 이유와 목표도 없이 그저 강박적으로 그것을 추구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대화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커크의 전 주인들이 그것을 당연시 여기도록 커크를 교육했던 것일 터다. 커크는 고장난 신체 못지않게 망가진 정신을 갖고 있었다. 맥코이가 설령 운이 좋아 커크의 몸을 모두 고친다 하더라도 그의 인식체계와 사고방식은 여전할 게 분명했다. 

차츰 자신이 커크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치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맥코이는 자신감을 잃었다. 마음이 약해지자 절로 환하게 빛나던 짐 커크가 보고 싶었다. 이런 백지 상태의 커크가 아닌, 정말 해처럼 자신을 비추던 그가 보고 싶었다. 그라면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우울해하는 자신을 놀렸을 텐데. '본즈'라고 불러주었을 텐데. 그만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을. 


지난 날의 추억과 그리움이 진득하게 눈가에 감겨들었다.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맥코이에게 커크가 다가갔다. 그의 손이 맥코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울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이를 악문 맥코이가 갑자기 커크의 손목을 낚아채 비틀었다. 커크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눈만 크게 떴다. 맥코이가 눈물이 엉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내뱉는 문장의 음절마다 그간 쌓인 억하심정이 매달려 있었다.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네가, 항상 잘못했다고 말하는 네가 정말 무엇이 잘못인지는 아냐고. 
저는.... 제가.... 

맥코이가 커크의 손을 들어 손가락 끝에서부터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손마디에도 꼼꼼히, 그리고 손바닥에도, 맥코이는 깊게 키스했다. 그 통에 커크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맥코이가 커크의 손에 긴 한숨을 토해낸 후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안았다. 갑작스레 안긴 커크는 맥코이의 품에 얼굴을 묻었고 폐까지 한달음에 들이닥치는 약품 냄새, 희미한 피 냄새, 진득하고 끈적한 땀과 살내음 따위를 맡을 수 있었다. 맥코이는 그 상태로 커크의 부스스한 정수리에 턱을 비볐다. 


아냐. 미안해.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 

커크는 조용히, 가만히 있었다. 맥코이는 그런 커크의 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줘. 마지막이야. 낮에....... 

아무 일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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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편에서 완결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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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는 눈만 깜빡일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질적인 눈동자들을 향해, 스팍이 물러서지 않고 재차 강조했다. 그의 눈빛도 단호하게 빛났다. 


당신을 모시러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커크는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시했다. 

열 번째 주인님이에요? 
...아닙니다. 

이전의 그라면 커크의 대답에 가슴 한 구석을 저미는 서글픔을 느꼈겠지만, 지금의 스팍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이 콜리나르였고 그것이 스팍이 선택한 결과였다. 스팍은 담담하게 오해를 정정해주었다.


여덟 번째입니다. 10913. 

스팍이 스스로를 지칭한 단어와 자신을 호칭한 단어에, 커크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번호는 확실히, 커크에게 특정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스팍은 이에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제가 알던, 이 세계의 제임스 T. 커크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타플릿을 비롯하여 지구 전체에는 당신이 그 사람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 저는 그런 당신을 보호하고 책임질 의무를 지닙니다. 

스팍은 잠깐 숨을 쉬었다. 해야할 말, 그에게 주지시켜야 할 정보들이 많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이 충분할지는 미지수였다. 스팍은 감시 카메라를 곁눈질하며 뒷짐지었던 팔을 풀어 그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제 불찰으로 발생했던 사고에 대해서는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다시는 그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면서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십시오. 

커크는 드물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파를 세게 쥔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일어나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명확했다. 커크의 혼란을 감지한 스팍이 덧붙였다. 

닥터 레너드 맥코이는 당신의 주치의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당신을 방문할 것입니다. 또한 그는 당신을 임시로 보호하고 있었을 뿐 정식 책임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커크가 희미하게 울상을 지었다. 

인사하고 가게 해주세요. 

이번에는, 스팍의 눈썹이 눈에 띄게 꿈틀거렸다. 



스팍이 커크를 찾아온 그 시각에 공교롭게도 레너드 맥코이는 수술중이었다. 한 수술이 끝나고 쉴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의사가 다루는 것은 환자의 목숨이다. 수술 중 다른 곳에 정신을 팔았다간 한 인생이 지상과 저승을 오가는 것이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있는 맥코이는 아무리 머릿속에 짐 커크 두 단어가 가득 차 있어도 환자를 대할 때면 잠시 그를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곤 했다.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워낙 간사해서, 삶의 이곳저곳에서 뜬금없이 생각이 툭 튀어오르곤 한다. 그리곤 꼬리를 물고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이다. 수면에 떨어진 물방울이 다시 옆으로 튀어 동그란 파문을 퍼뜨리듯이. 

맥코이는 환자의 흉부를 열어젖히며 커크의 몸 안에 있는 서로 다른 커크의 유품들을 떠올렸고 환자의 조각난 다리뼈를 맞추며 커크의 하얗고 얇은 종아리를 떠올렸다. 

지금의 커크는 이를테면, 이미 부서진 유리를 투명한 테이프로 이어붙여 놓은 상태였다. 테이프의 접착력이 약해지거나 더한 충격이 가해진다면 산산조각날 운명이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커크를 쉽게 떠나보낼 생각이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그의 신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되, 그를 낫게 만들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가 (의사로서) 매일 하는 일처럼, 맥코이는 속으로 끊임없이 되내었다. 

내가 널 치료해줄게(I will cure you). 

수술을 끝마친 맥코이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개인 사무실로 들어왔다. 커크를 보는 일은 가장 중요한 일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터치 키보드에 암호를 입력하자 집 안의 정경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가 당신에게 숨긴 것이 있습니다. 


스팍이 입을 열었다. 커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스팍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당신의 신체가 붕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그가 말한 적이 있습니까? 추론컨대 말하지 않았을 것 같군요. 그 이유로 제가 당신을 데려가는 겁니다. 그는 당신이 알아야만 할 사실을 숨겼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신체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저는 적정하고 윤리적인 방법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유지할 방법을 강구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

제가 당신을 고칠 겁니다(I will fix you). 
제가 또 뭔가를 잘못했나요? 


커크가 손톱을 물어뜯으며 물었다. 

스팍의 시선이 카메라와 시계를 차례로 오갔다. 끝나지 않을 선문답이다. 스팍은 판단했다. 이미 인식 체계가 고정된 그에게 무언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스팍은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닥터 맥코이가 잘못한 것입니다. 저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장소에 온 것이며, 원한다면 그와 함께할 수 있는 하루의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루요? 
예. 단, 맥코이에게 저에 대한 것이나, 떠나는 것에 대한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저와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십시오. 그는 분명 막으려 할 겁니다. 당신과 맥코이 두 사람 모두를 위해서입니다. 만약 그를 더 오랫동안 보기 원한다면, 제 말을 따르십시오. 
네. 


커크는 고개를 끄덕였고, 스팍은 그것으로 일단 물러났다. 예상보다 커크가 순순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스팍이 알고 있던 예전의 커크와는 또 미묘하게 달랐다는 뜻이었다. 맥코이와 한동안 지낸 탓이겠지. 스팍은 문을 나서며 목례했다. 

내일 이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스팍의 시선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커크는 인사도 잊은 채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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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의 천재 레너드 호레이쇼 맥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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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가자. 어디로든 떠나자. 

어느새 맥코이는 커크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커크는 저항 없이 차가운 벽에 등을 대고 섰다. 맥코이의 손이 커크의 셔츠 안으로 들어가 가슴을 훑어올렸고, 그의 입술은 커크가 말 한마디 못할 정도로 키스를 퍼부었다. 커크는 맥코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떠나요? 
그래. 둘이서. 
당신이랑 나랑? 
그래. 너랑 나랑 단둘이서. 
그럼, 먼저 나랑 자요. 

맥코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우울하게 거절을 뱉어냈다. 

안 돼. 
왜요? 
맥코이는 커크의 눈에 다시 키스했다. 커크는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대답이 없자 그는 다시 물었다. 
왜요? 


맥코이는 커크의 눈에 촉, 촉 거듭 입을 맞추었다. 커크는 눈을 뜨지 못하는 대신 입을 벌렸다. 왜요?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번만은 맥코이도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너를 안은 사람들이 모두 너를 떠났다고 말했지. 
네. 
나는 너와 자지 않을 거야. 
네? 
너를 떠나지도 않을 거야. 


궁색한 변명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커크의 몸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자신의 신념과 의지였다. 그는 커크와 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커크에게 지나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커크는 불안정했고, 그의 신체에 특정 자극을 가한다는 것은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특히나 잠자리는 명실공히 큰 자극 중 하나일 터였다. 그러니 정말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맥코이는 이 대화로 인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유혹-그것은 정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하던 커크의 모습을 회상했다. 그때는 거의 넘어갈 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고한 결심이 선 상태였다. 


맥코이는 다시 키스하려다 벌어진 커크의 눈을 보고 섬짓함에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눈 감아도 돼. 커크는 하얀 얼굴과 검은 눈동자로 답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냐. 짐.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럼 왜 나를 안지 않아요? 


짐, 짐. 그의 이름을 부르는 맥코이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맥코이는 두 손으로 커크의 얼굴을 감싸쥐고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나는 너를 지켜주고 싶어. 늘 네 곁에 있고 싶어. 같이 자는 것만이 사랑한다는 증거는 아니야. 


맥코이의 심정과는 다르게 커크의 목소리는 점점 단조로워졌다. 표정은 여전히 백지처럼 비어 있었고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나한텐 그래요. 


짧은 대꾸에서 맥코이는 서글픔을 느껴야만 했다. 커크가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면서, 맥코이는 재차 강조했다. 


사랑해. 정말로. 자는 것 외엔 뭐든지 해줄게. 말만 해. 원하는 거라도 있어? 같이 우주로 나갈까? 보고 싶은 게 있어? 가고 싶은 곳은? 아니면-. 
괜찮아요. 


괜찮기는. 맥코이는 목구멍에 턱 걸리는 무언가를 애써 삼켰다. 한참 그를 달래보기도 하고 명령조로 말해보기도 했지만 소용 없었다. 커크는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저 이대로 삶을 유지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걸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바로 그거라고.

 
덕분에 맥코이는 전전긍긍하며 그날부터 커크의 시중 아닌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어렵지는 않았다. 커크는 불평하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맥코이가 그런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퇴근하며 사과 한 봉지를 사들고 온다거나 함께 외식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게 전부였다. 


그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아마도, 스팍이 그 집에 찾아온 날까지. 


맥코이는 병원에 출근한 뒤였고 커크는 홀로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은 구하기도 힘든 종이책이었다. 맥코이의 배려였지만, 커크는 짤막한 감사를 표할 뿐 크게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사실 커크는 드러내어 감정 표현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른 오후였고 맥코이의 퇴근 시간과는 거리가 있었다. 베란다로 비치는 햇살을 받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커크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들어선 사람을 향해 몸을 돌렸다. 


다녀오셨어요. 


입버릇과도 같은 인사를 끝까지 말하고 난 뒤에야, 커크는 그가 맥코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스타플릿 정복을 갖춰입은 스팍은 현관에 서서 집 안을 구석구석 주시하다가 (그가 찾는 것은 감시카메라였다) 커크의 목소리에 그를 돌아보았다. 


스팍은 짧게 목례했다. 


데리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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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 vs 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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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팍은 맥코이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커크를 만나게 해주지 않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스팍은 맥코이에게 말하지 않은, 커크의 신체 상태에 대한 또다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말하지 못한 것은 스팍을 쫓아낸 맥코이 그 자신의 탓이었다. 


스팍은 맥코이를 통해서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제대한 맥코이와 달리 스팍은 여전히 스타플릿 소속이었고, 대령이었으며, 권한을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병원 입구를 나온 스팍은 금세 인파 틈에 섞여들어갔다. 


사무실 창문으로 스팍을 지켜보던 맥코이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다시 버티칼을 돌렸다. 책상위를 정리하는 그의 손이 분주했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커크였다. 맥코이는 스팍이 '갑작스런 노화 반응 혹은 기관 정지'가 올지 모른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또한 커크에게 남은, 그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음을 기억했다.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커크가 시력을 잃어버리거나 심장이 멈춰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와 같았다. 


맥코이는 커크가 홀로 죽어가게 둘 수는 없었다. 커크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또다시 무력하게 커크를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맥코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기에. 



다녀오셨어요. 


여느 때처럼 커크가 거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맥코이는 아무 말 없이 커크를 바라보았다. 다소 부스스한 더티 블론드, 검은 눈자위, 파란 눈동자. (게다 그의 머리는 자신이 직접 손질해준 것이기도 했다) 어떻게 만들어졌든지간에 그는 커크였다. 자신의 새로운 짐 커크였다.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낸 장난감이 아니라 특정 존재가 의도를 담아 만든 피조물이었다. 맥코이의 눈길에 동정과 연민과 애정이 어렸다. 커크는 맥코이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고개를 갸웃하며 반복했다. 


다녀오셨어요?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맥코이가 커크를 끌어당겨 안았다. 커크는 그의 팔에 안긴 채 눈을 크게 떴다.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 없는 질문을 던졌다. 두 팔이 갈 곳을 모르고 허공을 저었다. 


쉬, 맥코이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커크는 손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커크는 맥코이의 표정을 읽었다. 어떤 의미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눈을 내리깔며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말을 중얼거렸다. 맥코이에겐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짐, 지미, 속으로 거듭 부르며 맥코이가 커크의 얼굴을 매만졌다. 조각품을 만지듯 섬세한 손짓으로 커크의 이마와 아미를 덧그렸다. 피부는 거칠었지만 따스했다. 커크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고, 맥코이는 커크의 볼을 그의 큰 손으로 감쌌다. 마침내 커크의 벌어진 입과 맥코이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 날, 그 사건 이후 스팍은 변했다. 그는 자신이 감정과 이성 모두 제대로 다룰 수 없음을 통감했다. 깨달음을 얻은 스팍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뉴벌컨에 가서 약식으로 콜리나르를 치르는 일이었다. 그것은 감정을 한 개체에서 절제해내는 벌컨의 전통 의식 중 하나였다. 기실은 감정을 내부에 더 깊이 파묻는 과정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그것을 치른 벌컨만이 진정한 벌컨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우주의 스팍은 그것에 반대했다. 당신은 콜리나르를 치르지 않았냐는 스팍의 질문에 그는 침묵했다. 이유가 어떤 것이든 그가 콜리나르를 치르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스팍은 또다른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의식을 치른 후에야 스팍은 훨씬 더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그 커크'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었다. 그가 커크든 아니든 자신이 저지른 일은 분명 비이성적인 일이었고, 그래서 스팍은 그것을 사과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이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임무 중 실종'된 제임스 커크와 동일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나 그와 실질적으로 동등한 개체는 아니었다. 


한편 맥코이의 의뢰는 돌고돌아 스팍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졌다. 지구 내에서라면 가히 최고의 과학 지식과 분석 능력을 지니고 있는 벌컨(대부분의 벌컨이 뉴벌컨으로 이주한 상황에서 지구에 거주하는 벌컨족은 스팍이 유일했다)에게 그 정보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한동안 연락을 받지 않는 맥코이 때문에 고민하던 스팍에게 커크의 검사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를 자극했다. 그 결과 스팍은 커크의 검사 자료를 토대로 대부분의 실험에 참여했다. 


닥터 레너드 맥코이의 개인 의뢰였기에 분석에 참여한 다수의 과학자와 의사들은 피분석자가 제임스 커크라는 사실조차 몰랐지만, 스팍은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관계자였다. 엔터프라이즈의 5년 탐사 임무가 종료된 후, 정식으로 스타플릿으로부터 제임스 커크의 보호자로 승인받은 남자였다. 


그 날, 맥코이가 구두 합의 하에 (더불어 스팍의 직접적인 요청도 있었다) 커크의 신병을 인수해 데려갔더라도 기록상 커크를 돌볼 자격이 있는 것은 스팍이었다. 비록 그가 커크가 아니라 해도, 그를 보호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는 자신이란 뜻이었다. 또한 콜리나르를 완료한 지금은 그를 이성적으로 대할 자신도 있었다. 


스팍은 맥코이가 개인적인 감정에 휩싸여 커크를 내주지 않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 또한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그는 커크가 아닌 자를 커크로 여기며 자기위안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스팍은 생각했다. 이는 병원에서 날을 세우는 맥코이를 본 이후 더욱 굳어졌다. 
물론 사실과 크게 다르지도 않은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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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ㅈ님께 커미션 드렸는데 요로코롬 너무너무 이쁜 커크가 왔습니다!!!! (주먹울음)

 

정작 14화 본편에는 커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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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에서 커크를 데려온 이후로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었지만, 맥코이는 스팍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 일이 있었던, 그 날로부터는 별로 긴 시간도 지나지 않은 터였다. 그러니까, 겨우 두 달 남짓. 맥코이는 숫제 으르렁거리며 스팍을 경계했다.


다시는 나나 짐을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스팍은 뒷짐을 진 채 마찬가지로 쌀쌀맞게 대꾸했다.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방법으로 검사 결과를 운반하라고 요구한 건 그쪽이야. 닥터.
그래서 네가 왔다? 웃기지도 않는군. 결과 내놓고 당장 여기서 나가주겠어?


맥코이는 스팍이 빈손으로 왔음을 알아차렸고, 스팍은 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그 의미를 알아챈 맥코이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예측하지 못한 본인의 불찰이었다. 차라리 페이퍼로, 아니, 직접 가지러 갔어야 했다. 끝까지 만전을 기했어야 했다.


원본은 파기했어.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지.
젠장(Dammit).


여전히 재수없는 녀석이라고, 맥코이가 진심을 담아 투덜거렸다. 동시에 짐짓 손을 뻗어 모니터를 껐다. 자신의 커크를 스팍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스팍은 꼿꼿이 선 채 말을 이었다.


아마 예상하고 있겠지만 그 자-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의 신체를 가진 자는 우리가 찾던 짐 커크가 아니야.
...무슨 뜻이야.


맥코이가 이를 지긋이 악물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오히려 확실하게 듣기를 바랐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커크든 커크가 아니든 오직 하나의 진실을.


방사성 동위 원소 붕괴 정도로 신체의 연대를 측정했고, 그의 몸에 있는 장기들이 저마다 그 연대가 다른 것을 확인했어.
그래.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게 왜?
분석 결과 그건 모두 제임스 커크의 것이었어. 닥터 맥코이, 한 개체의 세포와 기관이 다른 속도로 노화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맥코이는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때아닌 갈증에 책상 위에 있던 물컵에 저절로 손이 가려 했지만, 참았다.


불가능하지. 그래서 장기매매 암시장을 뒤졌잖아. 어떤 놈이 어떻게 바꿔치기를 했는지 기록을 찾아내려고-
맥코이. 나는 방금 그의 모든 기관을 구성하는 세포가 제임스 커크의 체세포와 동일하다고 말했어.
그러니까 내 말도....... 잠깐. 그건 불가능해.


맥코이가 얼굴을 굳혔다. 스팍은 담담하게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우주에 동일한 개체가 하나 이상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알고 있지.
뭐?
두 명의 나.


스팍이 남의 일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두 명의 스팍. 다른 우주의 스팍. 다른 시간대의 스팍.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커크. 하지만 분명 커크이면서 커크가 아닌 커크.
마침내 두 사실을 연결지은 맥코이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모든 장기는 제임스 커크의 것. 하지만 연령대가 다르다. 그 의미는-.


여러 명의 제임스 커크.......
그것도 각기 다른 나이의.
맙소사.


맥코이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천천히 부서진 파편들이 모여 특정한 하나의 사실을 만들어냈다. 맥코이는 그제서야 커크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집에 있는 커크는 한 명의 커크이면서, 한 명이 아니었다. 타인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괴물, 프랑켄슈타인처럼 여러 인간의 피와 살과 기관들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리고 그 여러 인간이 바로 평행 우주의 제임스 커크들이었다.


감히 그런 시도를 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아니, 그 생각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 인간으로 인간을 만들어낸다는 발상을 할 수 있지? 그것은 그 자체로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다. 물론 맥코이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최소한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의사로서 그 비윤리적인 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 만들어졌다는 게 그런 의미였던 거야?


커크는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것은 비유나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는 '만들어진' 존재였다. 어디에도 없으며, 그 자체로 커크이면서 커크가 아닌 존재.


그를 만든 그의 창조주는, 스팍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대체할 마땅한 단어를 찾지 못했는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의 창조주는 분명 고차원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리라 예상돼. 또한 현존하는 기술로는 불가능한 결과물이니 사용된 기술 또한 미래의 기술이리라 추정한다.
칸은 어때? 그것도 칸의 손자의 손자쯤 되는 놈일지도 모르지.


맥코이가 비꼬았다. 스팍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것까진 예측할 수 없어. 하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군.
젠장, 스팍!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맥코이가 책상을 내려쳤다.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 커크에게, 짐한테 그 사실을-
그를 커크라 지칭하기엔 무리가 있어. '커크들'이 보다 정확한 표현이지.


맥코이는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스팍은 공기 중에 흐르는 감정의 기류로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알았지만, 하려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또한 검사 결과에 따르면 그의 신체에서 돌발적인 노화 반응 혹은 기관 정지가 발생할 가능성이 75%이상이야. 따라서 그를 24시간 감시할 수 있는 시설에 거주하게 하고, 이 사실에 대해 그에게 고지할 의무가 있어.


불만스럽게 책상을 두들기던 맥코이의 손이 멈췄다. 그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짧게 선언했다.


주치의는 나야. 내가 결정해.


스팍도 지지 않았다.


닥터 맥코이. 나는 스타플릿 소속 과학장교이자 현 엔터프라이즈 함장으로써 전 함장인 제임스 T. 커크에 대한 충분한 예우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내 행동을 막는다면 스타플릿에 대한 비협조적인 태도, 주요 인물에 대한 허가받지 않은 보호 관찰 시행을 이유로 정식 고소장이 접수될 거야. 그것을 원하나?
날 군부 법정에 세우려면 네가 커크에게 한 짓에 대한 변명거리부터 생각해둬야 할 거야. 죄목은 심플해. 강간이라고, 들어는 봤지? 초록피가 흐르는 고블린 동네에도 그런 단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스팍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맥코이는 기세를 몰아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심술궂게 웃었다.


이제 볼일 끝났으면 나가주시죠. 써(Sir).

 

 

 

Posted by 카레우유 :

보고 싶은 장면이 많음 -> 한 화에 우겨넣음 -> 전개가 들쭉날쭉; 

퇴고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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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가 처음으로 뭔가를 요구했다. 맥코이는 그 사실에 감동하면서도 그 내용에 전율했다. 커크는 맥코이를 끌어안고 가슴에 볼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안아줘요. 


맥코이는 미약하게 몸을 떨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동상처럼 굳어있는 맥코이의 허벅지를 커크가 천천히 쓸어올렸다. 


내 말 듣고 있어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커크의 말대로 그와 잔다면, 자신과 스팍이 결국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몸은 그를 원했다. 그를 잃었던 시간만큼 더욱더 그를 원했다. 되찾은 그를 안고 싶었다. 어쩌면, 스팍에게 크게 화를 냈던 것도 자신이 가질 수 없던 것을 그가 먼저 가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신뢰의 대가가 섹스라니, 농담이라면 잔인한 농담이었다. 참을 수 없을만큼 가볍고 지독한 장난. 제임스 커크 그 자체였다. 맥코이는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 선택은 아마 지금까지 해온 것 중에 가장 큰 무게를 가지게 될 터였다. 
슬금슬금 다가오던 커크의 손이 사타구니를 스쳤을 때, 맥코이는 결심을 내렸다. 그는 커크를 밀어내고 벌떡 일어섰다. 

이건 아니야. 

확신보다 자기합리화에 가까운 말을 되내며, 맥코이가 물러났다. 커크는 미미하게 상처받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지 마세요. 
잠깐 바람 쐬고 올게. 먼저 자. 알았지? 
가지 마세요. 
금방 올 거야. 걱정말고. 
가지 마세요. 
다녀올게. 

아귀가 맞지않아 삐그덕대는 퍼즐 조각처럼 두 사람의 대화도 기묘한 방식으로 어긋났다. 그것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하는 자동차였다. 달리면 달릴수록,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거리가 벌어지기만 하는 무한의 두 직선이었다. 

맥코이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멀리 갈 수도 없었다. 만약 커크가 집을 나간다면 붙잡아야만 했다. 맥코이는 촌스러운 빛을 점점이 뿌리는 가로등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술이 고팠다. 



맥코이는 날이 밝은 뒤에야 집에 들어갔다. 커크는 보이지 않았지만, 식탁에 차려진 단촐한 아침이 커크가 아직 집 안에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맥코이는 반쯤 안도하고 반쯤 후회했다. 무난해 보이던 관계는 껍질을 벗겨내고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원점이었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사람들은 여러가지 반응을 보인다. 문제에 덤벼들어 부딪치거나, 문제를 못 본 척 외면하거나, 혹은 문제로부터 도망치거나. 다수의 사람들이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택한다. 과거를 덮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넓은 길이었고, 쉬운 길이었다. 맥코이 또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침 고마워. 

맥코이가 식사를 마치고 목소리를 높였다. 방문을 반쯤 열어둔 커크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다녀올게. 

대답은 없었다. 맥코이는 커크를 남겨두고 집을 나섰다. 그가 혼자 잘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때보다도 더 마음이 무거운 이유를, 맥코이는 부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적지근하게, 또는 아슬아슬하게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 이틀, 사흘. 커크는 다시 그 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맥코이 또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커크와 맥코이는 금요일마다 외식을 했고 토요일마다 장을 봤다. 커크는 가구도 많지 않은 집을 매일 깨끗이 청소했다. 빨래와 아침 준비 또한 커크의 몫이었다. 맥코이는 커크가 하는 일에 한 번도 토를 달지 않았다. 서로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게 자신들의 해야 하는 일인 양 굴었다. 

눈 때문에 이발하러 갈 수 없는 커크를 위해 맥코이는 손수 가위를 잡기까지 했다. 제딴에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커크의 머리는 들쭉날쭉해졌다. 맥코이는 미안하다고 말했고 커크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맥코이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했다. 



커크는 맥코이의 면도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맥코이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은 면도마저 그에게 맡겨버렸다. 커크는 칼을 쓰는 구식 방법 외에는 몰랐고 맥코이는 몇 번이고 칼을 소독한 후에야 사용을 허락했다. 몇 번 면도기의 사용법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밤마다 하얀 거품에 젖은 커크의 손이 맥코이의 턱을 매만졌다. 서늘한 칼날이 느긋하게 입가를 노니는 것을 느끼고 있노라면, 맥코이는 그대로 커크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마음을 참아야만 했다. 



오늘은 커크의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맥코이는 병원에서 그것을 혼자 볼 생각이었다. 


오후 7시. 맥코이는 일을 마무리하고 검사결과를 가져온다는 사람을 기다렸다. 정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죠. 

맥코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못박혀 있었다. 화면 속의 커크는 침실을 정돈하고 있었고, 맥코이는 그런 커크를 지켜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때문에 들어온 사람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닥터 맥코이. 

팽팽한 실처럼 높은 톤.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맥코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스팍이었다. 


Posted by 카레우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