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팍이 원하는 사람과 맥코이가 원하는 사람은 달랐다. 물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은 본래의 제임스 커크였지만, 그는 현실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대체자- 일명 10913에게 자신이 원하는 커크를 투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10913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하고 결정한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그의 '주인'이 골라주었다. 그는 무언가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조차 주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10913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첫 주인을 떠올렸다. 잘 생각나지 않았다. 두 번째도,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다섯, 여섯, 일곱 번째도.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에 이르러서야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독특하고 이상했던 사람들. 모든 주인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그 얼굴들은 바뀐 적이 없었다. 

 


 

커크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의사들이 대여섯 명 달라붙어 그를 고치려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문제 부위가 정확히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아귀가 맞지않는 조각을 억지로 끼운 퍼즐처럼 온통 고장나 있었기 때문에. 
 


 

수술실 밖에서 스팍은 타인의 시선도 아랑곳않고 맥코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허공에 들린 발이 허부적대며 가없는 몸부림을 쳤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를, 그를 되돌리려 했어. 짐 흉내를 내는 걸, 그만두라고-
그래서 그에게 충격을 준 건가?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아냐! 나는- 저 정도까지 되리라고는-

 

스팍은 계속해서 변명도 듣지 않고 맥코이를 몰아붙였다. 


비논리적이군. 대관절 무엇으로 그를 되돌린다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그건 아무런 가치와 쓸모가 없는 일이야. 타당한 근거 없는 당신의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어. 
젠장!! 그러는 너는 왜 '고쳤다'고 했어? 고치긴 뭘 고쳐! 그래봐야 쟤는 제임스 커크가 될 수 없는데!! 
 

숨이 막혀 얼굴이 붉어진 맥코이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스팍은 천천히 그를 놓았다. 콜리나르를 받았음에도 울렁거리는 가슴이 숨을 쉬이 드나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 뇌리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자신은 그를 '고장난' 상태라고 여겼던 것인가? 그를 제임스 커크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 자체가 그를 정말로 커크라고 상정했던 것인가? 혼란스러워하던 스팍이 손에서 힘을 풀었다. 바닥에 내려선 맥코이는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리고 예리한 말로 스팍을 비난했다. 


그도 똑같은 인간이야. 제임스 커크든 아니든. 왜 타인이 되기를 요구해? 그의 인권이나 마음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벌컨 사전엔 그런 단어가 없나보지?
 

맥코이의 비아냥에 스팍이 눈썹을 세웠다. 자신이라고 할 말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대로 돌려주지. 그는 자신의 의지로 행동하고 있었어. 하지만 당신 또한 그에게 누군가가 되라고 강요했지. 당신의 입맛에 맞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으로. 그럼, 맥코이. 나와 당신의 차이점이 뭐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맥코이는 스팍의 말에 항변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응급 처치가 끝난 후에도 커크는 한참이나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때문에 의기양양하게 커크를 만나러 왔던 크루들은 실망을 안고 돌아가야 했다. 스팍과 맥코이는 크루들이 있거나 말거나 조용히 그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약속이나 한듯 한 사람이 들어오면 한 사람이 나갔다. 그런 식으로 언제나 커크 곁에는 최소한 한 사람이 있었다. 

 

스팍과 맥코이는 그날 이후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았다. 대화가 필요할 리 없었다. 둘 모두 스스로가 커크에게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당한 요구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굳이 상대방에게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자숙하며 커크에게 용서를 구할 날이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스팍은 문 밖에서 두런두런 울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잠시 병실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스팍은 그것이 대화가 아니라 혼잣말임을 알고 조용히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미안해. 꼬마야. 네가 날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으니까 일어나 줘. 제발 일어나만 줘. 해달라는 건 전부 해줄게. 응...? 내가 잘못했어.... 


맥코이는 대답없는 커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창백한 유령의 얼굴을 한 커크는 깨어나지 않았다. 살아있었다는 흔적조차 사라진 듯했다. 마지막에 함께한 게 자신이었기에 그는 더 자책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렇게 커크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미안하다, 고맙다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했는데. 만약 그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남은 평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먹먹한 무게감에 맥코이는 그제서야 울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신을 찾았다. 아내가 떠나고 제임스 커크가 죽고 그가 사라졌을 때조차 찾지 않았던 신에게, 커크를 돌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뒤늦은 후회는 언제나처럼 아무 소용도 없었다. 
 

다음날 병실을 지키던 스팍은 침대 옆에 서서 커크를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맥코이가 하던 것처럼 신에게 빌거나 기도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대신 스팍은 이전에 미처 하지 못했던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위험과 책임과 급변사태를 감수하고, 스팍은 커크에게 마인드 멜드를 시도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자복하고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물론 그가 용서해준다면 말이지만. 스팍은 한없이 무거운 마음으로 커크의 이마를 쓸었다. 


당신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나의 마음을 당신의 마음으로. 


그날 밤 맥코이가 찾아왔을 때 스팍은 방을 나가지 않았다. 꼭 나가야만 한다는 법은 없었기에 맥코이는 별다른 의문 없이 다른 의자를 끌어왔다. 스팍과 맥코이는 침대를 경계로 양쪽에 앉아 있었다. 
 

맥코이. 
 

스팍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을 때, 맥코이는 커크의 하얀 얼굴에 손을 뻗는 중이었다. 그는 손을 멈추고 반문했다. 
 

왜? 
그와 마인드 멜드를 했어. 
 

잠깐 조용하던 맥코이가 (마인드 멜드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뒤늦게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라고? 스팍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를 깨우기 위한 시도였어.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머릿속에서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이야기를 했다고? 깨어난 거야? 
 

맥코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커크와 스팍을 번갈아 보았다. 스팍은 그답지 않게 지친 얼굴이었다. 맥코이는 그제야 스팍의 얼굴에 어린 어두운 기색을 알아차렸다. 
 

무슨 뜻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스팍은 가만히 커크의 손을 잡았다. 맥코이는 의심 반 기대 반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커크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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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이 머지 않았다

Posted by 카레우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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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해보라니까. 제임스 티베리우스 커크. 위대한 영웅, 엔터프라이즈의 전 함장님. 못 말하겠어? 갑자기 부끄럼이라도 타? 


맥코이는 오기로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그가 꿋꿋이 커크 행세를 하자 화가 난 것도 있었지만,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싶은 심정도 꽤 컸다. 맥코이는 커크가 반응하지 않자 더더욱 말의 강도를 높였다. 

그건 알아? 네가 처음으로 여학생을 방에 끌어들인 날 나랑 약속을 하나 했거든. 물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아, 그래. 기억할 리가 없지. 다른 사람 얘기인데. 미안. 괜한 말을 했다. 
....... 

커크는 입술을 짓씹고 입모양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울듯 말듯 묘한 표정이었다. 맥코이는 그런 그를 못본 체 밀어내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내가 도대체 왜 여기 있지? 내가 찾는 사람은 여기 없는데. 다 들으라는 듯 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맥코이가 문 앞에 섰다. 그대로 나갈 셈이었다. 커크가 그를 붙잡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커크 흉내를 내는 그와는 볼일이 없었다. 원래대로의 그라면 또 모르지만. 맥코이는 문고리를 잡고 세게 돌렸다. 

잘 있어. 

맥코이는 그대로 그곳을 나갈 셈이었지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달칵 하고 어딘가의 걸쇠에 걸린 듯 열리지 않는 문 때문에 맥코이는 짐짓 당황했다. 이게 왜 이래, 당기고 흔들어도 보았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밖에서만 열 수 있어. 

담담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귀에 들어왔다. 맥코이는 어금니를 악물고 돌아섰다.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아아. 그럼 아침까지 기다려야겠다. 

맥코이는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팔짱을 낀 방어적인 자세는 풀지 않은 채였다. 커크는 가만히 서서 맥코이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맥코이는 잠깐의 침묵과 커크의 눈길을 견딜 수 없었고, 그래서 입을 열어 2차 공격을 시작했다. 적당히 진실과 거짓말도 보탰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아가야. 제임스 커크 새끼와 나는 질기고 지독한 악연으로 연결되어 있단다. 
...거짓말 마. 커크의 눈빛이 흔들렸다. 
네가 뭘 알아? 맥코이가 비웃었다. 그 새끼랑 나는 서로 토사물을 주고받은 사이거든. 토사물뿐이겠어. 밤에 뜨거운 우정도 나누는 사이였지. 그 멍청한 벌컨이 뭘 가르칠 수 있었겠어. 정작 중요한 건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물론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맥코이는 집요하게 커크가 아파할 부분만 파고들었다. 그게 그에게 또다른 상처가 되리라는 생각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본즈....... 
날 그렇게 부르지 마. 그 호칭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어. 
....... 

냉담한 맥코이의 말에 커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눈을 비볐다. 얼굴을 반쯤 가린 팔은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았다. 커크는 소리없이 침을 삼켰다. 입을 앙다물고, 끝까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도저히 그런 커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힘들다면 흉내를 내지 않으면 될 텐데. 스팍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될 텐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고집스럽게 저러고 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한참 후에 커크가 젖은 소매를 내렸다. 그는 그것을 등뒤로 가리려 애쓰며 짧게 말했다. 

싫다면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을게. 내일 아침까지 편히 있다가 가. 침대에서 자도 돼. 잘 자. 

커크는 몇 걸음 물러서서 의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가지런히 두었던 책을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가 하는 모습을 보고있던 맥코이는, 더는 참지 못하고 성큼성큼 걸어가 의자를 돌렸다. 놀라 동그래진 눈에 물기가 가득 어린 것이 보였다. 맥코이는 팔걸이를 잡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무 의지도 감정도 없던 네게 사명감 따위가 갑자기 생길 리 없잖아. 스팍이 주인이랍시고 명령했어? 그래서 그렇게 죽어라고 따르고 있냐? 
무- 무슨 얘기 하는지 잘 모르겠어.... 
왜 몰라! 맥코이가 윽박질렀다. 커크는 어깨를 움칠거리며 눈을 찡그렸다. 맥코이가 커크의 턱을 쥐고 치켜올렸다. 커크는 반항하지 못했다. 
모르긴 뭘 몰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 제임스 커크를 연기한다는 가증스러운 짓 말야. 
연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제임스- 읍. 

맥코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야. 아니라고. 너는 그가 아니야. 대체 어떻게 내 앞에서조차 그런 연기를 할 수 있어? 네가 떠난 뒤로 난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어. 널 찾느라 방방곡곡을 뒤졌어. 스팍이 이런 곳에 꽁꽁 숨겨뒀을 줄은 몰랐지만. 알았어? 적어도 나한테는 원래대로 대하라고. ...그래도 된다고. 이 멍청한 자식아. 

맥코이가 길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동정심이라면 동정심이리라. 맥코이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커크는 하나뿐인 눈동자를 굴리며 한없이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결국 택한 것은 예전과 다를 게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이 손 놓아줘.... 

오오냐. 끝까지 그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그 순간 맥코이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네가 정말 제임스 커크라면, 내가 이제 무엇을 할지 알 거야. 

커크가 퍼뜩 눈을 들었다. 그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맥코이는 턱을 쥐었던 손을 내려 커크의 셔츠를 밀어올렸다. 커크는 허둥지둥 벗어나려 했지만 의자에 앉아있는 채로는 아무 소용도 없었다. 맥코이는 그가 어떤 반응을 하건 개의치 않았다. 손을 뻗어 커크의 가슴을 주무르자 커크가 미약하게 버르작대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맥코이는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갈색 눈동자가 혐오 반 비웃음 반으로 빛났다. 


싫어? 짐은 이런 걸 좋아했는데. 

커크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나뿐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맥코이는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그의 눈 위에 다정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유두를 지분거리던 손은 점점 내려가 허리께를 더듬고 있었다. 맥코이의 입술이 속살거렸다. 

자, 이제 짐이라면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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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를 풀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어흥

Posted by 카레우유 :